정시마 시인 / 말하지 않아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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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마 시인 / 말하지 않아도
이별은 갈대 속에서 찾아 왔습니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빗줄기 맞으며 돌아섰습니다
햇빛 찬란한 화요일 푸른 소나무 가지에 갈색 손목시계 걸어두고 멀어졌습니다
다시 빗줄기 너머 어둠을 품은 산등성이 소리들 내 심장을 흠뻑 적시고 막다른 길 재촉하며 달렸지만 붙잡지 못했습니다
밤하늘에 갈꽃 바람에 떨어져 흔적 없이 사라지고 젖은 공기로 뒤덮은 빗물에 쫒기 듯 뛰어갑니다 이 질긴 갈대 비는 그치겠지 젖은 신발 두 눈동자 두고 간 내 연민을 향한 쓰라린 눈물을 쏟았을 때 얼룩진 외로움으로 이어져 얼굴 하나 달아오르고 차라리 축복이 되리라 믿습니다
수십 년 세월 늘 이별은 따라 다녔어도 비의 운율을 타고 비상한 기회에 창백한 유령의 새벽을 보겠습니다
끝없는 갈대밭으로 퍼붓는 그 많은 빗줄기 손 흔들며 내 연인이여 안녕히,
- 미네르바 86호, 2022년 여름호
정시마 시인 / 나비의 현상
어쩌다 푸른 사과 익어가는 풀숲으로 거미줄에 빠진 건지 그러니까 검은 점 박힌 나비의 실체를 목격한다는 것은 나를 먼저 숨기고 다가가겠다는 말 날개 아래 생애의 비호감이 클 것이므로 조금 전의 많은 곡선 뒤척이지도 못한다 아무래도 능선과 능선 일으켜 날갯짓하여 주황빛 그늘 주홍으로 물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골짜기 우묵한 바람 둘러메고 피어오르는 안개 속 거미 한 놈 나비 향해 가는 줄 타며 은밀히 다가간다는 건 민첩한 행진이다
오늘이 아닌 낮달에게서 쌍꺼풀 짙은 얼굴 하나 떠오르는 산책길인데
막 시작한 거미의 배 불리는 오후 눈앞의 바닥과 맞닥뜨려 해체하려는 와중에 가둬둔 나를 요번 참에 새가 날아간 곳으로 쫓겠다는 말 검은 점 조걱조걱 뜯겨 부스러기 떨어지는 파란 사과의 이른 눈물을 흘릴 뿐 점점이 날개는 얼음을 채운 달걀 속 같은 하얀 숨소리만 돌아간다
나비의 무게로 북극성 얹어 비범한 숲에서부터 출발한 듯 나는 뭘 보았는지, 너는 가장 행복한 적 언제였는지 지난해까지 살아온 고향이라는 진부한 언어로 막막한 웃음을 준 그 불안과 고독 그 위대한 거미소굴 킬러에게 잡혀 먹힌 절정의 시간 앞에서 내 안의 삐져나온 레이스 구멍 뚫린 살점 뜯겨 나가는 듯 잃어버린 밤하늘 길 찾아 오른다
정시마 시인 / 아침의 피아노
비를 맞으며 서있는 거리에서 가을이 오고 겨울도 온다 그 사이 무수히 지나온 계절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피아노와 담배와 술을 좋아한 철학자 이국에서 너 없이 걸어야 했던 독일사는 시인 생의 첫 계절로 돌아가는 데는 육십 번의 가을자리일 것이다 겨울을 능가하는 찬바람 속에서 나는 피아노 선율에 젖는다.
지난해 찾아온 병든 시간인 만큼 덜 인간적인 도시를 보았지만 이제는 폭설 내려와 고립되지 않아도 될 아침 개인적으로 굳이 지난날의 공포를 떠올리지 않아도 될 밤 원시의 체질을 찾아 마음 굷겨도 될 새벽이 나에게 있다
오염된 적 없는 핑크뮬리 들판으로 뒷모습 사라진다 철학자와 시인이 남기고 간 여린 미소속의 고뇌를 창백한 피아노 선율을 듣고 있는 좁은 베란다의 빈 화분만 눈을 맞추다 낡은 피아노 관 속으로 누워 출렁거린다
얇디얇은 생각의 몸을 위한 노래 지상의 꽃보다 우월한 바람의 존재이고 사랑과 태양이 그리워지는 시간만큼 몸속 텅 빈 가장 낮은 강물소리를 듣는다 빗줄기 세차게 퍼붓는 날 헤어진 부부들처럼 절대적 혼자가 되어 말이다
가을과 겨울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악보 한 장 창밖으로 날아간다
-계간지 '시선' 2018년 겨울호
정시마 시인 / 월요일 생각
너희 집 화분에는 꽃이 피니 응, 행복한 우리 집 암술 수술들
벗어던진 삼각팬티가 오징어 대가리처럼 널브러져 있어 나는 빨랫줄에 샴푸 스프레이 냄새를 걸어두지 냉장고 속에서도 와인 코르크 마개는 왜 그리 깊숙히 박혀 있는지
감청빛 소파는 언제나 월요일 플라스틱 화분에서 도자기 화분으로 옮긴 꽃은 살아 있니 응,
낙지 같은 양말들 꼬불거리고 나는 성탄의 밤을 기억하려 애쓰지
티이브는 지겨워 불륜 이야기 뜨거운 만큼 판치는 영화 채널 낙타 사내와 박쥐 여자가 엉켜 채널 일흔 두 개 모두 돌려먹지
기형의 시간만 남기는 월요일 금간 화분들은 내다버려야겠어 더 이상 당신의 정물이 될 수 없는 암술 수술들 우리 집 화분에는 꽃이 피나
- 2009년 <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정시마 시인 / 굴참나무 효과
1 집 비웠다 돌아오니 냉장고 있던 자리에 굴참나무 한그루 떡하니 버티고 섰다. 캄캄한 눈꺼풀이 들어찬 나무 등걸 하나하나 여닫을 때 패킹 사이 다섯 손가락이 끼어 앗 나뭇가지가 휘청, 붉은 물살 일렁이는 냉장고 속은 오지게 가을이다.
2 냉장고는 지금 나뭇잎이 빽빽한 숲으로 드는 꿈을 꾸나 보다. 문짝 패킹이 잠꼬대 하듯 콕콕콕 호호 입김 불어댄다. 돌아누운 간고등어는 유통기한 지난 꿈이 되어 있다. 더덕향 배인 입 냄새는 오이와 캔맥주가 차갑게 헹궈낸다.
3 칸칸 검은 비닐봉지 부리가 부딪힌다. 꼬리 내린 채 둥지를 기웃기웃 살핀다. 나무는 손가락 마디마디 끊어먹고 시침 뗀 채 제 나이만큼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 죽이라도 끓여 빈 뱃속 채운다.
4 오랜만에 콘센트 꽂은 환한 굴참나무다. 곤쟁이 속처럼 나간 손가락도 마디마디 그늘을 푼다. 이 때다 싶어 숲은 천둥새 한마리 둥둥 날려 보내고 절구통만한 햇살을 둥글게 채운다. 이제야 울긋불긋한 단풍 웃음 콸콸 돌아간다.
정시마 시인 / 이상한 마음
시와 시 사이 온전히 살아본 적 없네 술자리에서 풀어놓는 이야기는 낙엽처럼 쌓여갈 때 입술 사이 끼어있는 슬픔을 웅변하고 있네 거름도 안 되는 슬픔은 질린다는 생각을 하다가 진화가 덜 된 고독의 시 그만 쓰면 좋겠다 말해주고 싶었네
앞자리 불투명한 지성의 합심으로 아름다운 이빨로 톱니바퀴 마구 돌리네 나는 둘이 되어 본 적 없어서 기댈 곳은 없고 순간 나만의 어두운 아지트는 있으니 다행이야 생각했네
시와 시 사이 침낭을 펴고 환한 동굴 속 들어가면 목련꽃 나뭇가지 찾아온 바람이 꽃잎의 숨결 끊어 놓아도 나를 괴롭혀 괴물이 되어 구더기문자 얼굴위로 득실거려도 나오지 않을 거네
오늘처럼 궁지에 몰려 지구 밖으로 버려져도 덜 익은 침묵의 과일 나무에 의자를 걸쳐놓고 아직은 살아있으니 시여, 할 말 없네
어디든 질주하는 반열에든 구름시인들 오늘도 죽어나가는 소식에 나는 거짓말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아! 주변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네
정시마 시인 / 네 개의 책장
잠자리 눈을 뜬 새벽 갑자기 책장이 사라졌다. 빛을 피해 반 지하 침대 아래 나란히 누운 걸 확인했다. 피도 흘리지 않고 미라처럼 누운 거다. 삼나무 책장은 숨소리마저 내뿜지 않는다. 한 번도 손가지 않은 두꺼운 책도 스스로 반 지하에 누웠다. 도감도 책자에 나무가 바위로 자랄 수 있다는데 점점 단단하게 변해가고 있다.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의 공간에서 책장 속으로 빛이 부서진다. 매트리스 천장 새들의 깃털 하나하나 잠든 시간 서있기만 한 책장의 사유에 자유를 택한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책장은 존재론을 고민하겠지만 시대를 넘어 수레가 된다 해도 그럴 것이다. 책속의 마을에서 백발이 되어도 만족할 것이다. 어제의 얼굴과 오늘의 손 사이 사라진 줄 알았던 책장 곁에서 숙명적인 문체를 만날 것이다. 공 모양으로 떠도는 먼지처럼 책은 쌓여 가는데 내 가여운 책장 옆으로 가서 나도 눕는다. 지쳐 누워있으니 하나의 갈색 조명으로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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