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정애 시인 / 사라방드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30. 08:00
허정애 시인 / 사라방드*

허정애 시인 / 사라방드*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를 듣다가 겨울밤, 비상구, 골수를 다 내놓은, 실어증의 길, 불안한 마침표와 쉼표들, 살기 위해 삶을 버린 시인의 붉은 시어들에 눈을 팔다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여자가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꿈의 두터운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쥐들이 들끓는 밤거리였다 하수구에는 가벼운 여자들의 몸짓처럼 김이 피어오르고, 흐린 가등 아래 목이 긴 여자가 적막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 없는 눈으로 푸른 물 가득한 눈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어둠에 스며 있던 적막이 발을 떼었다 얇은 먹지 같은 그림자가 번번이 구겨졌다 오래된 자학이, 강박이 푸석푸석 떨어졌다 여자의 팔이 그림자를 부여잡았다 단단히 자신을 껴안고 있었다 바닥에 끌린 여자의 외투자락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흐린 가등 아래 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 3박자의 느리고 장중한 춤곡

 

 


 

 

허정애 시인 / The Artist is Present*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그녀가 마주앉은 관객의 눈을 바라본다. 관객이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반투명 광물 같은 눈 너머를 오래 들여다본다.

고대의 석상처럼 버티고 앉은 마리나 앞에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웃고, 좌불안석하고, 기행奇行을 하고

‘나는 방아쇠이고 거울일 뿐’이라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말한 대로 되리라, 아브라카다브라 주문처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떠나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을 울게 하는가, 웃게 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불안케 하는가.

백지 앞의 우리는 왜 폐허에 나부끼는 깃발 같은가.

무수한 사상과 감정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계

검은 창 뒤의 풍경처럼 식별되지 않는 타자들의 세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허정애 시인 / 시

 

 

나는 너에게 갇혔다.

사방이 허방인 무중력의 공간이다.

문이 없는, 모든 것이 문인

희디흰 어둠이다.

 

-시집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에서

 

 


 

 

허정애 시인 / 비극의 탄생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유일한 자'-소크라테스가 존재의 바다에 理性[Logos]라는 대못을 박았다.

 

섬처럼 떠 있던 바닷새들이 수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바닷속 무수한 디오니소스적 기호들이 종잡을 수 없이 激浪을 일으켰다.

 

-시집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에서

 

 


 

 

허정애 시인 / 푼크툼

punctum*

 

 

‘보바리 부인을 해부하는 플로베르’ 풍자 삽화를 보네

불거진 눈 검게 늘어진 안윤근 농구공만한 머리

가슴까지 八자로 뻗친 수염

간신히 균형 잡고 선 펜촉 같은 발, 그림 속 플로베르가

한 손엔 돋보기를, 한 손엔 피 흐르는 심장을 들고 있네

고대 문명의 제사장처럼 주도면밀하네

해부대 위 잿빛 바디에 델핀 들라마르가 겹쳐지고

 

악몽 속 군대가 나를 섭렵하네

 

내 손바닥 위에서 필라멘트처럼 경련하는 회백색

뭉클한 덩어리, 무수한 굴곡 갈피갈피

신이 새겨넣은 문장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새파랗게 섬광을 일으키네

득시글거리는 침묵의 이 소요를 무엇으로 잠재울까

현상 밑의 숨겨진 방들을 무엇으로 열어볼까

끝없이 더듬거릴 수밖에 없는

텅 빈 두개골의 내가 검은 실로 잘려진 귀를 깁고

 

어느 먼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네

 

* ‘화살처럼’ 사진에서 떠나와 나를 관통할 수 있는 뾰족한 부분

 

 


 

 

허정애 시인 / 너무 많은 손가락들을 꺾고

 

 

샤워기 아래 물줄기를 맞습니다

물의 살이 깊어 내 언어들이 고무공처럼 튀어 오릅니다

둥근 중심마다 섬모 같은 손가락들이 돋아나

물의 살을 문지릅니다

그는 끊임없이 출발하고 나는 수없이 미끄러집니다

내가 동요하는 걸까요?

 

그의 말간 눈동자를 꿰뚫듯 붙들어보지만,

그의 좌표를 늘 확인하지만, 그는 열리지 않습니다

도처로 표류하는 그를 쫓아갈 수 없습니다

우발적인

지극히 하찮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장애물들

내가 관대해져야 할까요?

 

미생물들은 보이지 않는 크기로 세상을 뒤흔듭니다

나는 피로하고 내 언어들은 역류합니다

나는 너무 많은 손가락들을 꺾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습니다

그는 사라지는 중일까요?

그는 부활할까요?

 

 


 

허정애 시인

서울여자대학교 졸업. 1999년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 시집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 『포레의 비가를 듣는 밤』. 2001년 제1회 짚신문학상 수상. 문예사조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국제펜클럽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