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동문 시인 / 낭만을 철회한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30. 08:00
최동문 시인 / 낭만을 철회한다

최동문 시인 / 낭만을 철회한다

 

 

나는 살아 있는 죽음을 보았다

눈물은 또 다른 함성

추악한 검은 뿔을 양심이 꺾는 날

어제와 오늘, 내일도 이어지리라

나는 얼마나 많은 불면을

착한 비겁으로 울었던가?

낭만을 철회한다

혼자 움직였던 수많은 지옥을 넘어

아버지의 피 묻은 손수건과

어머니의 마른 죽음을 품고

어제 스러졌고

오늘 그 위에 쓰러져 우는 당신을 소리없이 지키리라

내 투명한 영혼이 단련한 날 선 손가락이

당신과

당신의 당신을 살리고

태어날 당신을 죽이려는 가면의 추악과

위선을 흙으로 보내리라

낭만을 철회한다

그 오래 전에 목숨을 철회한 고백을

달밤에서 두 손으로 받아 모셔

푸른비 내리는 광장을 보는 어린 눈들,

오목한 손 잡은 지친 가족 무릎 무릎 앞에

엎드려 다시 고백한다.

낭만은 철회되었다

혈관을 타고 모음과 자음이 살아나고 있다

오늘과 내일은

어제를 기억하는 당신의 역사다

 

 


 

 

최동문 시인 / 거미의 아침

 

이슬이 거미를 불고로 만들었다.

안개 속 거미줄을 잡은 물방울들.

거미는 가장 낮은 자세로

물방울에 포위된다.

이 순간 거미는 지배받는다.

네 멋대로 할 수 없다.

무거운 불 속에 갇힌 거미에게

가장 무서운 선고다.

안개 자욱한 아침마다 거미는 멸망한다.

거미는 줄 속에 속한 운명이었다.

거미는 수 없는 발길질로

이슬을 털어낸다.

햇습에 마르기 시작하는 먹이의 가슴에

깊숙한 허기를 박아 넣는다.

 

 


 

 

최동문 시인 / 풀꽃

 

 

 꽃을 훔쳐 꽃잎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안다. 훔친다는 것은 꽃잎을 꽃의 허락 없이 딴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키운 꽃잎으로 아름다운 장식을 엽서에 붙여 높은 가격으로 시장에 팔기도 한다. 어떤 풀꽃들이 처한 현재의 단면이다. 나는 행진하는 풀꽃무더기를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그들과 한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동시대에 만난 풀꽃과는 교감을 넘는 통정이 있다. 풀꽃은 키가 작다. 나는 엎드리거나 비스듬히 줍는다. 풀꽃이 피는 계절은 주로 봄이어서 졸음과 더불어 풀꽃 곁에서의 합방은 마냥 가는 시계 초침을 의미 없게 만들곤 한다. 가까이서 눈을 크게 떠야 풀꽃을 볼 수 있다. 섬세한 풀꽃 잎이 만든 간격이 보인다. 풀꽃이 담아낸 우주의 기호들 하나하나가 바람에 나부낀다. 풀꽃이 옆으로 눕는다. 나도 비스듬히 누워 춘곤증을 안고 풀꽃 속에서 잠이 든다. 풀꽃은 나를 몽상가로 만든다. 종교예식보다 몽롱한 계절이다. 나는 풀꽃과 한몸이 된다.

 

 


 

 

최동문 시인 / 득음得音

 

 

매화나무 건너 한 줄기 물길이다

장대비 속에서 울다 넘어 온

핏덩이 한 줌이다.

비단구름이 구렁이로 넘던 고갯마루다.

그 속으로 걸어나온 신선의 지팡이다.

울리다 울리다 미루나무 되어

도끼에 찍혀 넘어지는 소리다.

바람 갈 길 놓아두고

봄피리로 울어대는 싹이다.

들어보아도 들리지 않고

귀 멀고 나서야 마음에 차오르는

기러기 날개 소리다.

눈물 마른 여인의 낡은 동정깃이다.

 

 


 

 

최동문 시인 / 살며 만나는 몇 가지

 

 

아버지는 논물 속에 잠겨 계셨다.

나는 착한 올챙이가 잠자리 잡는 개구리 될 때까지

논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온통 흐린 날에

어름 꽃이 산기슭에 어깨를 걸고 엎어져 있다.

벌통이 앉아있는 마을 안팎을

토종벌은 꿀을 먹고 벌통으로 등을 숙이고 들어갔다.

새파란 볼을 가진 하늘에 누워보면

오색 알들, 가을의 알곡들이

익어서 떨어지는 소리가 귀의 깊숙한 속부터 들렸다.

시골길을 먼지가 일지 않았다.

반듯한 시멘트길 가에

코스모스 꽃잎이 분홍으로 휘날리고

봄에 이사 온 어린 벚나무가 길 끝까지 달렸다.

아이들은 물안경을 쓰고

종일 개울 속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물의 아들딸이 되었다.

개울처럼 맑은 하늘이 하품을 하면

잠자리들이 하늘의 목젖에서 날아와

실금 간 날개로 누런 논을 덮고 있었다.

 

 


 

 

최동문 시인 / 빈손

 

 

늘 연필을 들고 있었던 오른 손.

오늘 내려놓으니.

 

허공이 와서 손금을 슬며시 들고 있다.

빈손도 손.

 

겨우내 장갑을 끼고 있었던 왼 손.

봄이 와서 장갑을 벗으니,

 

아지랑이 와서 따습게 잡고 있다.

빈손도 손.

 

-시집 <밤의 태양> 2020년 시산맥

 

 


 

 

최동문 시인 / 고덕에서 버스 잡기

 

 

 안개가 자욱한 길과 길 사이, 보면 엉킨 길 같지만 모두 이어진 길, 길들어진 길과 낡아가는 길이 있거나, 만드는 길, 끊긴 길, 늘어나는 길이 있거나.

 

 풍경 속 풍경, 고덕에 서서 안중 가는 정류장에서 96-1번 버스가 올 때까지 겨울비는 한 방울씩 찔레에 박힌다.

 

 정다운 찔레 열매와 마른 찔레 잎과 그 잎과 열매를 키운 가지와 이리저리로 다닌 줄기와 뿌리 근처로 갈수록 두툼하고 거칠게 돋아난 껍질의 흔적들, 풍경은 나이를 앞지른다.

 

 쓰레기장이 안개에 묻히고 있다. 안개가 사라져도 쓰레기들은 겨울바람 속으로 굴러다닌다. 청소부는 외진 곳에 오지 않는다.

 

 안중安中이란 이름도 고덕高德이란 이름도 차와 쓰레기와 나를 덮은 우산마저 빗소리, 빗발 속에서 입을 다문다.

 

 겨울 해는 빗속에서 바로 보아도 눈멀지 않았다. 빛에 숨은 그늘을 기다렸다. 한 시간을 기다린 버스가 오고 나는 팔로 손을 들어 버스를 세웠다. 시간을 세우는 중이었다.

 

-시집 <밤의 태양> 2020년 시산맥

 

 


 

최동문 시인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수료. 199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즐거운 거지』 『아름다운 사람』 『유리동물원』.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