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광기 시인 / 벌레들의 울음소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30. 08:00
김광기 시인 / 벌레들의 울음소리

김광기 시인 / 벌레들의 울음소리

 

 

한여름 밤 창을 열면

벌레 소리 창연하게 들려온다.

 

도대체 몇 마리

몇 생들이 저렇게

종족을 뛰어넘는 울음들을 섞어놓고 있는 것인가.

 

오만가지로 섞여서 묻는 소리,

너는 또 누구냐는 듯하여

너희들의 울음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 하니

 

뭔 이상한 소리 하나를

또 듣고 있다는 듯

왁자지껄한 소리, 소리들 한다.

 

고즈넉한 숲속 같은 풍경 속에서

우리만 쓸쓸히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몇 생,

몇 종종의 생물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함께 지내고 있었던 것인가.

 

 


 

 

김광기 시인 / 물

 

 

모든 물들이 바다를 연모하지만

모두 바다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넓은 바다에 그렇게 소망했던, 드디어는

한 몸의 물을 보태고 나면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가.

바다로 가지 못하고 더러는 남아서 허공 중에 떠 있기도 하고

더 운이 없는 것은 곤두박질쳐서

캄캄한 지하에 갇히기도 하지만

끝내는 길어 올려져 누군가의 생명수가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피가 되어 생명을 이끌기도 하나니

물이라고 꼭 바다로 가서

소금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의 세상에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자양이 되고 물결이 되고,

다시 증발해서 수분이라는 명제를 안고 떠돌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몸이 되고 누군가의 삶이 되는

숨결의 의미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 것인가.

바다로 가든 바다로 가는 도중 증발해서

이 공간을 떠돌든 더러는 깊이 잠기게 되든

물은 영원히 물의 존재 의미로 남는 것,

물이 의미 없이 마르거나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떠나도 우리가 있던 이 자리에

더 소중한 의미로 남는 것이다.

 

-『문학과창작』 2023-봄(177)호

 

 


 

 

김광기 시인 / 프시케, 날갯짓

 

 

당신은 나의 혼이었다 하지요.

반짝이는 영혼이 나비처럼 내게로 옵니다.

궂은비 내려 날개가 젖습니다.

프시케, 아픈 나으이 사랑이 됩니다.

이 사랑을 그대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무게가

그대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비는 또 내리고 있습니다.

온 허공을 다 적시고 있습니다.

당신과 손을 잡고 그 빗속에 있습니다.

비는 슬픔이었다가 아픔이 됩니다.

다시는 비가 슬픔이 되지 않는 그런 날들 속에서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우산 하나 속에서 포근한

그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빗속에서 날아오는 날갯짓의

운명 같은, 그런 우산 하나를 갖고 싶습니다.

비가 내려도 젖지 않는

마음 깊숙이 우산대를 세우고

고운 눈빛 하나하나에 우산살을 붙입니다.

당신의 미소처럼 맑은 천도 덮습니다.

든든한 지붕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 사랑만 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반짝이는 당신의 날갯짓으로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문학과창작』 2021-가을(171)호

 

 


 

 

김광기 시인 / 풍경을 도둑맞다

 

 

스산해지는 계절에 등불을 켜고

풍경 하나하나를 비춰주던 밀감 밭,

돌담길 시간은 멈춰있는 것만 같았는데

소란스런 기운이 잠시 주위를 흔들고 있는가 싶었는데

부지런한 농부들 몇이서

그 고운 크리스마스 같던 등을 모두 거둬가고 말았다.

 

저 풍경을 매일 나만 보고 있어도

보이는 것 무엇 하나 내 것은 없었다.

나는 다만 저 길 위에 잠시 머문 그림자 같은 흔적이었음을

계절이 풍경처럼 익어가고 마침내는 그 풍경마저

누군가 가져가고 나면 알게 되는 것뿐

 

황구 한 마리 찬바람이 불고 있는 골목을 지난다.

꾀죄죄한 몰골 속에 야성을 감추고

오랫동안 이 길을 오갔던 듯 서로 관여할 일도

서로 경계할 일도 없다는 눈빛으로

나그네 같은 이를 흘깃 보고는

배경이 바뀐 풍경 사이를 터덕터덕 지나간다.

 

-시집 『내생의詩』 2022. <문학과 사람>

 

 


 

 

김광기 시인 / 도깨비 바람, 일출봉

 

 

눈보라가 내리치고 있었다. 일출봉

기슭을 치는 바람으로 일어서기도 하고

위에서 다시 바닥을 치듯 꽂히기도 하는

눈보라의 휘날림, 모든 차례에는

기다림과 마주침이 있을 법한데

순서도 없고 시차도 없이 휘몰아친다.

따듯한 지방, 남쪽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렇게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니,

해 뜨는 풍광이나 좀 보겠다고 올라선 비탈인데

호되게 매선 바람을 겪으며 보니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이쪽저쪽이고 없다. 우당탕탕 몰아치는 바람,

일출봉은 오를 생각도 못하고 혼쭐만 나서 돌아온다.

바람은 안에서도 불고 있었다.

문틈으로 사정없이 들어차는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린다. 바닥은 냉골이다.

팔순이 한참 지난 두 노인은 두터운 파커를 입고

바람을 견디는 중이었다. 손님에게

안방을 내주고 건넛방에서 바람과 맞서고 있다.

바닥에서는 전기장판이 철철 끓고 있다.

엉덩이가 뜨거울 정도인데 입김이 나고 있다.

성산 일출봉의 겨우살이는 그렇게 시작되고

긴 세월 동안 그렇게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바람을 막기 시작했다.

창틀을 고치고 문틈을 메우고 문을 닫아걸었다.

오랫동안 돌지 않았던 보일러도 돌리기 시작했다.

방이 후끈후끈해지자 노인들이 견디지 못하고

보일러를 끄기 시작한다. 보일러를 켜면 다시 끄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우도 어부와 성산 해녀로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

무서운 칼바람조차도 함께 더불어 살아온 것이었다.

그 바람을 막고 온도를 높여놓으니

먼저 노인들이 질식해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미친바람인 줄 알았는데,

피해서 웅크리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찬바람을 견딜 수 없는 것은 외지인들뿐이었다.

그 차디찬 기운 속에서 해는 뜨고 있었다.

 

 


 

 

김광기 시인 / 풍장

 

 

땅에 묻혀 소멸될 것들이 아니라면

이리저리 바람에 쓸리다가

바람보다 더 가벼워진다.

미세한 것들의 혼들이 이리저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불고 있다.

바람이 된다는 것은

생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선택된 것이거나

그냥 스치는 것처럼 지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이 버려진다는 것이다.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은

어제처럼 바람의 길을 묻고 있다.

바람이 된다는 것은

다 채워진 것을 마침내 비워놓는 일이거나

끝까지 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일,

그 길을 묻는다는 것은

끝끝내 바람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바람이 분다.

하늘을 쓸고 있는 버드나무 길을 따라

스스럼없이 바람이 된 것들과

끝까지 바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들이

뒤섞이면서 바람으로 날고 있다.

 

 


 

 

김광기 시인 / 해녀와 어부, 바람 바다에 살다

 

 

1. 해녀 홍희순 님의 바람

 

생선 살을 바르듯 무를 썰어 말리며

바람의 방향을 짚는다.

하, 오늘도 북서풍 된바람에 물살이 거세겠어.

서둘러 물길을 타듯 하늘로 치솟으려는 듯

물살을 휘어잡으려는 분주한 몸짓,

몸을 지탱할 수 없는 기류 떄문에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달라진 온도 때문에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다.

평생을 바닷물에 맞춰온 체온 때문에

화닥화닥하기만 하다.

된바람이 몸을 식혀주고 있지만

그녀는 늘 바다가 걱정이다.

할망은 오늘도 태왁을 구름 위에 띄워놓고

바람의 무사귀환을 기도한다.

 

2. 어부 박영숙 님의 바다

 

출렁이는 바닥을 흔들흔들 거닐고 있다.

온 생의 물결을 타며 바다를 걸어온

발자국들이 뜨락에 가지런하다.

일출봉을 바라보면서 자란 소년은

그 등성이에서 바다로 나서며 평생을 일궜다.

4·3의 난리를 겪던 그 시절에는 대마도로 부산으로

바닷길을 전전하다가 돌아오기도 했지만

바다를 떠나 다른 삶을 꿈꾸지 못했다.

큰딸은 아방의 곁에서 시인을 꿈꾸었지만

설마하니 시인이 될 줄은, 딸들이 석박사가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바람을 타며 고기를 잡았고

어한기 바닷가 농토를 일구는 데 힘을 다할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대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망망대해에 불빛을 쏘고 있는 세월 속에서

그의 발자국은 무심히 찍히고 있었다.

센 물살에 하염없는 세월이 지워지고 있었지만

그 불빛은 여전히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노쇠한 몸으로 바닷가를 거닐며 오늘도

기도의 눈빛으로 먼바다를 보고 있다.

 

 


 

김광기 시인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의 전략과 논술』 등.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아주대 등 출강. 학점은행제 <한국보육교사교육원> 운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