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경후 시인 / 거리의 리어왕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 08:00
김경후 시인 / 거리의 리어왕

김경후 시인 / 거리의 리어왕

 

 

 새벽 두 시, 종로 한가운데, 리어왕, 비틀거리고 계시다, 바지가 반쯤 내려간 리어왕, 벽에 머릴 박은 리어왕, 깨진 술병들, 고기 타는 냄새 한가운데, 물론, 주저앉은 리어왕도 계시지, 모든 리어왕은, 감히,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감히, 고함치신다, 그가 리어왕이 아닐리 없지, 그러나, 이때, 나타난 젊은이, 난세난국엔 감히 이런 일도 있는 법, 그만, 돌아가세요, 너, 감히, 내가누군지 알고, 정말 다행이지,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모두 그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야, 리어왕, 오늘 상연 끝났어, 뭉개진 분장은 지우라고, 오늘은 그만 죽어도 돼, 리어왕, 분장을 지워도, 리어왕, 내일이 시작하면, 또, 리어왕, 당신은 리어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 이래저래 리어왕, 정말 다행이지,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모두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지, 감히, 새벽 세 시, 리어왕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감히, 오늘의 대사를 읊조리며, 다리 난간을 붙들고,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 너도 리어왕이었지, 한때, 용감한 직언을 올린 젊은이, 그가 리어왕이 되는 새벽도 있었다, 배역은 매일 바뀌는 법, 그 그리고 감히, 또, 새벽 두 시,

 

-시집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 현대문학, 2018

 

 


 

 

김경후 시인 / 그믐

 

 

​나를 꽝! 닫고 나가는 너의 소리에

잠을 깬다

깨어날수록 난 어두워진다

기우뚱댄다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

눈을 감고 삼킨다

 

오래 머물렀던 너의 이름에서

개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온통 버둥거린 자국들

부러져 박힌 비늘과 지느러미들

 

나를 꽝!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내게 묻혀 있던 악몽의 알들이 깨어난다

깨어날수록 난 잠든다

컴컴 해진다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내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엔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 뿐

 

 


 

 

김경후 시인 / 두 시 구 분 육 초의 상상

 

 

흰 벽들 두 시 구 분 육 초 시간을 가리키는 것들은 왜

커튼 너머엔 내가 없어 커튼 너머를 난 상상해

축축하고 무거운 돌, 느려터진 돌,

부푸는 몸을 뒤척여 밤과 달을 몽땅 가리는 돌이 있어

 

커튼 너머엔 내가 없어 커튼 너머를 난 사랑해

창문에 뭉개지는 빗물 그 기분을 내가 아는 것처럼

난 알아 환청 이명 그 속에서도 알고 있지

이번에 침대 밑에 말라죽은 바퀴벌레는 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커튼 너머엔 돌이 있어 알아

 

외곽순환도로 상상해봐

커튼 너머엔 돌의 구멍을 지나는 외곽순환도로도 있지

뒤엎어진 차들과 술병을 던지는 유령들

두 시 구 분 육 초 나는 상상해

공중에 날아올라 불꽃처럼 터지는 타이어들

그 너머엔 목발이 낀 회전문 그 너머엔 회오리바람

 

회오리 바람에도 들지 않는 바람개비가 있어

또 그 너머엔

모래만 가득한 우물 그 우물을 담은 눈동자

다시 그 너머 너머엔 내가 돌릴 수 없는 회전문

두 시 구 분 육 초 난 상상해 커튼 너머로 닫히는 눈 난 알아

 

흰 커튼이 쳐진 흰 벽들이 방

다시

 

두 시 구 분 육 초

왜 바늘은 모든 시간을 찌르고 가는 가

 

 


 

 

김경후 시인 / 속수무책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 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김경후 시인 /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억을 옮긴다,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

 

 벽 같은 짐들 앞, 짐의 주인이 말한다, 나뭇잎 그려진 상자 못 봤어요? 기억 안 나요? 안 나요,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오늘 사내는 손이 없다, 힘이 없다, 불탄 낙엽 더미처럼, 빈방 그늘에 누웠다, 귀신은 뭐 하나, 나 같은 거 안 잡아가고,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사내는 짐이 아닌 어리광을 부릴 힘도, 없다,

 

 기억난다, 벽 같은 짐들, 그 짐의 주인, 기억나지 않는다, 손 없는 날, 기억난다,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김경후 시인 / 서예 시간

 

 

추락을 기억하는 깃털로 우리는 추락보다 긴 노래를 부른다

슬픔의 획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김경후 시인 / 세이렌의 바다

 

 

시신들만 그의 것

상연이 끝나고

폭우와 파도 먹구름은 다시 빛과 고요의 것

내 노래는 누가 듣지

듣고 죽지 마

시간의 시신들만 그의 것

 

바다는 물거품보다 훨씬 많은데

물거품보다 노래는 훨씬 많은데

 

텅 빈 객석

먼지 쌓은 무대만이 노래의 것

 

노래를 들으며 푸른 미역에 감기는 노래하는 입술

 

 


 

 

김경후 시인 / 야광별

 

 

별이 빛나지 않는 밤

별이 빛나는 방을 만든다

아득한 천장과 어둑한 벽 구석구석

문방구에서 사온 아광별들을 붙인다

이 별은 악몽을 위해

저 별은 불면을 위해

발리 별이 빛나는 밤을 만들자

 

하지만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

별 가득한 방

별도 방도 잠 속에서

어둠만 기다랗게 뻗어나갈 뿐

 

야광별 설명서:

이 제품은 충분히 빛을 받지 않으면 빛을 내지 못 합니다

130억 광년 떨어진 별의 누군가도

빛난 적 없는 지구와

빛난 적 없는 지구 위 나를 벽에 붙이고

영원히 기다리고 있을까 밤이 빛나길

빙하기 별똥별은 빙산을 가르고 떨어졌다

그 별은 지금 어느 어둠이 되었는가

 

깜깜한 야광별이 박쥐처럼 모여든

깜깜한 별밤

두 눈을 부릎뜨고 벌겋게 빛을 찾아 헤매는 밤

 

 


 

 

김경후 시인 / 동물원 데이트

 

 

파충류관엔

자기 머리보다 큰 짐승을 삼키는 뱀이 있다

비늘같이 어깨를 붙이고 손을 맞잡은 너와 내가 있다

 

유리판 너머

울컥 청록빛 목 비늘 속으로

울컥 쥐 몸뚱이가 다 드러난다

징그럽지?

뱀들의 복도를 서성이는 사람들

비늘의 밤 너머

우리는 서로의 목구멍을 타들어가는 서로를 알아본다

 

자정마다 울리는 뼈의 종소리

머릿속으로 납물이 부어진다

마르지 않는 납물에 자신의 지문을 찍어두는 연인들

징그럽지?

응, 징그러워

우리는 서로 꼬옥 껴안는다

토요일 동물원엔

납 비늘보다 단단한 사랑이 있다

 

 


 

김경후 시인

197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열두 겹의 자정』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