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시인 / 꽃의 통곡을 듣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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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시인 / 꽃의 통곡을 듣다
꽃의 통곡을 듣다 밖에서 누가 부르니까 꽃이 피는 겁니까 누가 찾아왔다 간다 나를 찾아올 사람들은 죽었는데 주먹을 자기 얼굴 앞에 가만히 울리고 가운뎃손가락 마디로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한다 먼 곳이다 작년의 그루터기와 얼음을 밟고 오는 그 신의 증인들일까 나는 대답을 놓쳤다 안에 주인 분 아니 계십니까 혀는 있는데 언어가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 물은 고야 침묵한다 방문이 실례가 된 적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오늘 안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안에서 부름켜가 인간의 마음을 듣고 있었다 숨어 있는 것이 있다면 대답 않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꽃이 오는 길이 매우 춥고 그 시간은 우리가 태어나던 침묵의 흐름입니까 그림 밖에서 누가 부르지 않아도 꽃은 피는 것입니까 하지만 가지에 저렇게 많은 꽃이 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등뒤에 그리고 뇌 속에 그들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고형렬 시인 / 나는 ICBM
비밀 지하에 누워 있는 ICBM이 수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한 번쯤 대륙을 건넜으면 했지만 다행히 인욕의 예언은 무시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상의 메타포 앞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이었다 이차세계대전 때의 젊은 실존주의자들처럼 부서진 발사대 밑에서 청춘들은 생을 담보로 담배를 피워물고, 흑백사진 한 컷 찍을 시간도 없었다 어쩜 그들은 모두 가짜일지 모른다, 그런 곳엔 우린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곤 없다 왠지 산은 흰 구름과 무관한 초음속미사일도 핵도 무섭지 않았다 오늘도 지구 뒤켠에서 천둥 번개 때리는 수백 발 미사일은 발사되었고 아침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얼마 뒤의 쓰라린 이별을 예감할 뿐이다 살아남은 소년 시절의 눈 선한 가을은 한 시대 속에 저물고 수정이 깨어질 것 같은 대륙성고기압의 잔해들이 산을 넘는 과거가 되었다 나 ICBM은 자아가 없다, 고도를 향해 미라처럼 누워 있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고형렬 시인 / 흐르는 물에 몸을 주고
지금도 깨어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같이 흐르는 물이고 싶다 그 물에 몸을 담그고 늦여름에 온 가을이고 싶다
눈 아르르 속꽃잎 하나 손도 못대고 서천을 떠가면 지상에 가까워진 눈물의 색채처럼
물에 다 씻겨 흘러가던 그때 기억으로 정신을 되찾아 물에서 나와 머리 큰 메뚜기 울고 가는 풀밭을 맨발로 디디고서 허리 구부려 바지에 발을 넣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흔들지 않고 잎 사이로 불어가는 바람일 수 없어 흐르는 물에 혼자 와서 옷 벗고 몸을 넣으면 위대하고 거창한 것들은 도무지 무섭지가 않았는지
나는 나를 씻고 다팔다팔 흘러간 물이고 싶었다 저녁 물속에 흘러가는 한줄기 물은 나를 두고 살았겠지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고형렬 시인 / 無悲
쓸 만큼 쓰고 할 만큼 해서 이젠 생식기도 성기도 아닌泌尿器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딴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을 따라주지도 않는다 오래된 그 덧없는 인간의 도는 욕망이 떠나고 업이라 할이름도 없이 다 마친 상태다 푸석한 옷섶 속에 그냥 거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있을 뿐이다 멀쩡하게 아들과 손주가 직장과 학교로 정신없이 뛰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로 남아 몸뚱이 한가운데 우두커니귀처럼 달려 있을 뿐이다 비뇨기는 그러나 지난날의 자신의 일과 꿈이 어떻게 됐는지모른다 한꺼번에 모이고 울컥 쏟아내고 들어오고 움켜잡던, 절대적으로 믿고 옴 붙듯 살아온 살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悲淚조차 없는 흉터와 같은 곳이 되었다, 박덕한 생애, 그 슬픔과 그 일들 다 말해줄 수 있는 주인도 책도없을 것이다 가끔 의사나 달고 있는 사람이 살점을 만지고 씻을 때가 있지만 이젠 휑한 오줌만 몸에서 내보내는 남녀들, 하나의 물건이다 하나의 비뇨기에 불과할 뿐이다.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2001, 창작과비평사
고형렬 시인 /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성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북천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눈이 내려도 찾아가지 않고 멀리서 살아간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바다가 넘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 바다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나는 그 북천과 바다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더는 멀어질 수 없을 때까지
나와 북천과 바다는 만날 수 없다 오늘도 그 만날 수 없음에 대해 한없이 생각하며 길을 간다
너무 오래된 것들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성 북천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길을 가다가도 나는 몇날 며칠 그 북천의 가을 물이 되어 흘러간다 다섯 살 때의 바다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서른다섯 때의 아침 바다로
다 말하지 못한 것들만 거울처럼 앞에 나타난다
고형렬 시인 / 화살
세상은 조용한데 누가 쏘았는지 모를 화살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져 있다 누가 나에게 화살을 쏜 것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화살은 단단하고 검고 작았다 새 깃털 끝에 촉은 검은 쇠 인간의 몸엔 얼마든지 박힐 것 같다
나는 화살을 들고 서서 어떤 알지 못할 슬픔에 잠긴다
심장에 박히는 닭똥만 한 촉이 무서워진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파 왔다
혹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장난삼아 하늘로 쏘는 화살이, 내 책상에 잘못 떨어진 것인지도 몰라
고형렬 시인 /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고산지대
파란 고산지대엔 벌써 가을 처연함에 반소매는 아무래도 짧은 것 같죠 또 언제 이렇게 되었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첫가을이 온 것은
아침 해도 스치면 떨어지는 이슬을 먹으려고 산마루에 떠올랐다 그 해 있는 곳은 시의 나라에선 천공 속의 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파도와 흰 구름과 새벽과 함께
이렇게 파란 배추와 무는 처음 보았네 한번쯤 팔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다시 거둘 수 없는 생의 높이 때문일지 어른보다 먼저 아이들 얼굴에 가을이 와 있었다
아이들이 늘 세상과 아버지를 걱정하죠 가을은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또 지나가고 생채기 하나 유리금 긋는 저 고산지대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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