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남 시인 / 추일(秋日)의 강가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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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남 시인 / 추일(秋日)의 강가
낙엽 깔린 객지의 붉은 구름 누각 아래 호젓한 나의 하루를 네가 나를 데리고 강가를 거닐게 되면 나는 어쩌면 좋겠나
단풍보다 붉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다 누가 말했을 것이다 너는 무한한 여정을 목적을 갖고 비관 아닌 노래를 내게 안겨주며 앞서간 일행의 뒤를 따라올 것이다
체 게바라의 원대한 꿈을 꾸라고 하지만 여긴 머나먼 남미가 아니니 원하지 않는 일이 성취되겠는가 추일 강가에서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상자 속에 있다
저 강물 건너편은 백제 땅이다 지금 나는 황톳빛 전라도로 가는데 강진 바다가 황혼에 익어가고 고산 선생 보길도를 찾아간다
정일남 시인 / 변산반도
홀로 찾아가는 길이 있다 길은 전라도로 가는 길이고 한때 나병인이 서로 만나면 천형의 어처군이 없는 운명이나 주고 받고 나병인의 황톳길은 바다를 찾아가는 길이다 바다가 없으면 사랑할 근거가 없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 거니 길이 끝없이 머나먼 땅끝 마을에 이르면 고대 백제 해변에 이르러 살리라
서구 문명의 메소포타미아를 흐르던 강물이 바다가 되어 동방의 해변 변산반도를 찾아 오느니 멀고 먼 여정의 바다는 영일만을 거쳐 척주 포구에 이른다
정일남 시인 / 춘일엽서
여자 여럿이 상여를 메고 가며 노래를 부른다 길가엔 꽃이 문을 열고 내다보는데 나비가 상여 뒤를 따라 붙는다
사월은 장례 치르기 좋은 달 죽기도 좋은 달이다 배꽃은 울타리 안에서 본다 배꽃이 울었다는 것은 사연을 모르는 일 상여 멘 여자들 집 떠난 객지기에 부음이 전해질 곳이 없었다 여자들이 봉분 하나 만드는 날 배꽃에 벌 날아와 꿀 먹고 운다네
명자 가는 날은 햇볕 좋은 봄 날 사월이 배꽃에 머물다 가니 늦은 엽서 보낼 데 없다
정일남 시인 / 생존자
무엇 하나 잡히는 것은 없고 도시는 첨단 괴물 행렬이 홍수로 밀려간다 내 발꿈치 뒤로 떨어지는 투신자살들은 도시에서 밥을 구하다 실패한 자들이다 밤의 빌딩 그늘에는 정령들이 모여들어 밤을 노래하며 춤춘다
한편 생존 전쟁에서 밥그릇을 채우려고 어느 용접공 시인은 햇볕에 탄 얼굴로 철판을 자르며 뜨거운 불꽃의 시를 쓴다 누가 응원가 불러주지 않는 세상 생의 격전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접공 시인은 그의 손끝에서 파란불꽃을 발산했다
정일남 시인 / 자식들에게 주는 말
물려줄 재산은 없다 다만 내가 바라본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압축한 시 몇 편을 전할 뿐이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비굴하게 살지 않았다 한 번 넘어진 몸은 바로 설 수 있지만 잘 못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 말할 때는 몇 번 생각 끝에 하라 추한 행동을 하면 망신을 당한다
진실을 사랑하고 불의엔 등을 돌려라 돈을 벌어서 자립하게 되면 개성을 찾아 그 분야에서 길을 찾아라 건강이 보장되어야 행복의 길이 열린다 밤에 깨어 앉아 내가 누군지 돌아보라 나를 찾아 이기는 것이 승리자다
정일남 시인 / 초혼
사자들은 돌아서거라 노 저어 갈길 천만 길이지만 비에 깎인 내 목소리 세 번 이상 부르지 않겠으니 그 이름,내 옷 가슴에 넣고 다닌 이름 목젖이 아리도록 길게 뽑는다 노역의 내 손은 허공을 움켜쥔다 은하수에 쪽배 띄우고 혼만 실어 보낸다 미안했었어,받아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내 아니면 누가 불러주겠어 그 이름 마흔 다섯이란 이름 꽃나무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적막이 내 뼛속까지 들어와 박히니 한 생애 혼불의 마지막은 신혼인양 아름다워진다
정일남 시인 / 오동나무
오래 살아온 오동나무는 꿈이 있었다 가야금이 되어 가야를 노래하거나 거문고가 되어 진랑의 사랑을 읊거나 장농이나 탁자 문갑 혹은 병풍틀 아나면 나막신이라도 되어 살고 싶었다
오동꽃 호시절이 가고 명이 다한 오동나무는 무엇이 되어도 좋았으나 가난한 시인의 관이 되었다 오동은 숙명을 받아드렸다 시인과 시를 먹고 시인과 몸을 섞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에 누구 찾아오지 않아 고적감이 좋았고 나는 오동나무에 등을 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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