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원 시인 / 평화로운 밤, 슬픈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4. 08:00
김명원 시인 / 평화로운 밤, 슬픈

김명원 시인 / 평화로운 밤,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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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 밤이 저문다

휴일을 준 석가 덕분에 낮잠을 실컷 잤고

밀려 있던 원고를 썼고 이불 빨래를 해 널었고

사 놓고 듣지 못했던 임재범의 ‘고해’를 물리도록 들었고

모처럼 아산에 사는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비가 오나, 그것도 소낙비가,

아스팔트 위, 타이어를 스치는 습기 찬 소리

비가 그쳤나, 아파트 화단을 배회하는

고양이가 젖은 어둠을 끄는 느린 발자국 소리

두통이 일듯 적요한 고요가 배는 창가로

앞 동 아파트 불빛들이 연화등 같다

약속 받은 이상향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긍휼로 마음이 번쩍

그 쪽으로 뻗는다

일용한 하루,

그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푸짐하게 자비를 베푼 사내의 마른 맨발에

엎드려 입 맞추고 싶은 자정녘

세상은커녕 나 자신도 구원하기 힘들어

나 하나 욕심내어 진종일 살았지만

남은 게 없는

슬픔이 출출하다

 

 


 

 

김명원 시인 / 복사꽃 무덤

 

 

복사꽃 머리 위로 하늘 기차가 지나갔습니다

구름 뭉게 차창들이 흘러 갔습니다

빗방울 손자국들도 부드럽게 찍혔습니다

 

복사꽃 그늘을 뒤져 봅니다

몇 해 전 누가 떨어트리고 간 걸까요

갓 피어난 열여섯 살 젖가슴을 열고

첫 사랑의 입술을 더듬던 그 밤을요

기꺼이 죽을 듯 숨을 참던 그 정적을요

 

한없이 투명해지는

이 분홍 빛깔, 오래 번집니다

 

복사꽃 발 아래로 간이역 정거장들이 달그락거렸습니다

급류의 강이 건널목에서 멈췄습니다

추억을 호명하며 빛나는 발톱 세웠습니다

 

떨어진 복사꽃들 위로 보름달이 차올랐습니다.

 

이제 비극이 상연될 예정입니다.

 

 


 

 

김명원 시인 / 소심주의자의 하루

 

 

지하철에서 오랜만에 앉았는데

내 앞에 서있는 저 여자는 나보다 나이가 들었을까

백발에 주름에 자꾸 마음이 긁적여진다

그녀가 든 짐 보따리는 태산이다

자리를 양보해야하나 짐을 들어줘야하나

백번 쯤 고민이 정차하고 승차하고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하차한다

 

역사를 빠져나오는데

계절에 맞지 않는 지나친 외투차림 노인이

금간 썰물 바닥에 빈 조개껍데기마냥 엎드려 구걸한다

바구니엔 좌초한 동전 몇 닢

먹다 헤진 삼립 빵조각

아뿔사 지갑을 열자 천원짜리가 없다.

만원에 새겨진 세종대왕이 오늘따라 왜 근엄한지

초록빛 수평선 화폭을 접었다 폈다

해풍에 출렁이다 결국 계단 절벽을 올라선다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교탁에 커피 한 잔 놓여있다

노란 쪽지엔 날씨가 추워졌어요 교수님 힘내세요

따뜻한 응원 한 잔이 김영란법에 저촉된다는 경고기사로

쌀쌀한 차단벽 넘어 팔을 오르내리는 사이

창밖으로 *조락하는 포플러 잎을 바라보다가

커피를 가져다 놓은 범인을 찾아 유죄 판결문을 낭독한다

 

간신히 하루를 마치고 귀가, 청탁 시를 쓰는 밤

청탁시를 마주하고 오늘의 구보씨는 얼마나 소심했을까

이렇게 얼마나 살아야할까

이런 이야기가 시가 될까

주저리 깜빡이는 커서에서 황망히 방황하다가

뉘우치며 전원을 끈다

 

*조락:

1) 초목의 잎 따위가 시들어 떨어지다.

2) 차차 쇠하여 보잘 것 없이 되다.

 

 


 

 

김명원 시인 / 장기 출장

 

 

김태경 경사, 나이 32세,

무면허 음주 운전자를 검문하다가

달아나는 그 차에 매달려 죽은 남자

 

경사 배지를 가슴에 달던 날은

눈부신 봄날이었을 것이다

목련 꽃잎이 둥글게 말리는 영등포경찰서 운동장

김밥을 꼭 꼭 말아 온 애인이 보는 앞에서

어깨를 펴고 애국가를 듣고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하고

밭두렁에 동부씨를 넣고 상경한 부모님께 경례를 하던

그 날은 산천초목이 모두 그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유월의 햇빛으로 예식장을 치장하고

모처럼 양복을 입은 경찰서장이 주례를 서던 날,

동료들이 던지는 콩알 세례를 받으며

앞으로 단단하게 살 날이 그 콩알들보다 얼마나 많은가 헤아릴 때 밖에서 어깨 춤추던 느티나무, 쑥쑥 초록 이파리들을

키워 올렸을라나, 틈새 바람들 박수를 쳤을라나

 

아빠를 삼촌만큼도 보지 못한 아들은

불편한 상복을 입은 채

레고자동차를 맞추며 말한다

 

"엄마, 오늘도 아빠는 출장갔어?"

 

 


 

 

김명원 시인 /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서울상록회관 그랜드볼륨 결혼식장

마흔 두 살 신부가 든 백합부케가 떨리는 건

축가를 연주하는 조카아이의 등이

백합 암술보다 작게 보이기 때문일까요

 

혼자 된 언니가 가출한 뒤 갓 난 조카를 맡아

스물다섯에 엄마가 돼야 했던 이모 결혼식이군요

온갖 선을 마다하고 연애 한 번 못해 본 이모를

한 때는 친엄마인 줄 알았겠지요

 

큰 소시지 넣은 김밥을 꾹꾹 눌러 싸주었던 운동회며

회사를 조퇴하고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장마, 학교 정문이며

폐렴으로 입원시켰던 황사의 건조한 날이며

편의점에서 술을 훔쳐 보호자 진술서를 쓰고 나선 경찰서 골목이며 생활기록부를 쓰면서 잘 나오지 않는 볼펜에게 화를 냈던 밤이며

 

이모는 내 엄마가 아니에요, 잔소리꾼 노처녀, 히스테리 악마,

완강했던 무서운 밤들이 슬프도록 빠르게 다 지나가고,

아이야, 나는 네 엄마는 아니란다, 그러나 엄마란다

아이야, 너는 나의 영원할 첫 아이, 첫 딸이란다

 

문득 연주되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뚝 끊기는군요, 아이의 어깨가 숨 급한 폭풍처럼 출렁이며

두 손을 의자에 야윈 가지로 떨구고 고개를 숙이는군요

 

벼랑의 나날들이 그 숲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을까요

불이 난 후에야 비로소 나무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사회자는 아이의 축가 연주가 처음이라 긴장한 탓이라고

말하였지만 하객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요

 

더 이상 연주를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린 모두 힘차게 박수를 쳤지요

이미 흥건히 젖어있는 건반 위로 박수소리가

명징하게 울려 퍼지며 박수로 연주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연주되었지요, 창밖으로

연둣빛 하늘이 고요히 보이는

4월이었어요.

 

 


 

 

김명원 시인 / 바라다

 

 

그대 내 눈에 들길

다른 모든 길 마다하고 오로지 내 몸에 들길

언제였던가 서릿발 줄곧 대나무숲에 장엄히 내려

머나 먼 까마귀 발자국에도 겨울밤이 지워질 무렵

바람 소리가 설핏 스러질 듯 노래로 남아

그대 홀로인 창을 두드린다면

 

나인 줄 아시길

내 목메임인 줄 내 사무침인 줄 아시길

잔설이 듬성 놓인 저 산녘은

넘치는 내 마음인양 흘러내려 굽은 계곡이 되고

부풀어 터진 언 대지는 그리움으로 솟구쳐 올라

그대 슬픔을 받쳐주는 지평선 되려니

 

그래, 너무 깊어 한번 디디면 아득한

그대 눈보라에 나 이르려 하니

얼마큼이나 더 소란히 헝클어져야

문득 눈 그친 뒤 살찌우는

고요로 내 사랑

푸른 물 들지

 

 


 

 

김명원 시인 / 저녁의 색채

 

​너의 작은 성채 같은 심장에 이는 파랑을

꿈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친구여, 어쩌다 굽이친 파란 파도 한줄기를

밤이 도착하기 이전이므로

아직도 꿈이라 호명하지 말기를

저녁이 어깨를 말아 웅크리며 엎드릴 때

무릎 언저리로 차오르는 슬픔의 흰빛을

허무의 주소라고 새기지 말기를

어제가 사라진 골목마다 흩어지는

유년의 해진 신발을 함부로 줍지 말기를

전등을 켜자 사방에 몰리는 빛의 섬유질들을

곱씹어 삼키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를

검은 달을 기다리는 남회귀선 오른손이

젖어 내리는 붓끝으로 무슨 입술을 그릴지

친구여, 함부로 발설하지 말기를

쉿!

 

 


 

 

김명원 시인 / 슬픔에 줄을 긋다

가을이 변색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듯

예각으로 내리는 빗소리가

웅얼웅얼 흑색으로 덧입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시월 십일 저녁, 마침내 당도한다.

오른쪽 어깨가 탈골된 트리니티 대학 본관은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고 있다.

아니 마음 놓고 꺾이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해동된 오크넬 거리 종탑이

목 쉰 채 내지르는 토막말들은

실연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걸까.

나처럼, 한국에서 달려 온 실언으로.

틀니로 추위를 낭독하는 제임스조이스 동상에는

실명한 비둘기가 어둠의 조각을 쪼아대고

양털 스웨트를 입은 백발의 노인이 절룩이며

힘겹게 리피강을 끌고 간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전쟁의 포화,

평화가 왔을 때는 청년이 노인을 장사 지내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노인이 청년을 묻는다는 진실,

주검처럼 누운 배는 텅 비어 있다. 검은 하늘을 퍼 담으며

딱딱한 노을이 얼어가는 혀를 도심 깊숙이 밀어 넣을 때

이방인에게 타전된 타국어로 급조된 밤이

안개로 스며드는 골목에서 나는

부상 입은 별들에게 답신을 쓴다.

보속補贖으로 치르진 전쟁은 어디까지인지요.

기필코 살아남은 자가 영웅이 되는 시대에

명분의 빛깔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물기 터는 손으로

기네스 흑맥주를 파는 템플 바 앞에서

보란 듯이

나는 홀로 방랑의 문을 열며

이윽고 슬픔에 줄을 긋는다.

여기까지, 부디 바탄의 밑줄은

단 여기까지만,

삶의 한복판에서 치르는 이 허무라는

전쟁을 이제 끝내려 한다면.

목숨의 단추를 장렬히 여미려 한다면.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 『달빛 손가락』 『사랑을 견디다』 『오르골 정원 』. 시인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 등.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한국시인정신작가상, 대전시인협회상 수상, 『애지』 『시선』 『시와인식』 『시와상상』 웹진 『시인광장』등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 대전대학교 H-LAC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