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 시인 / 무궁화 인쇄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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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화 시인 / 무궁화 인쇄소
무궁화호가 숨을 덜컹거리며 달린다 어디로 갔다 돌아오는 걸까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는 여자 마지막 노래가 끝나면 다시 재생되는 영원히 떠나지 못해 유리 한 장에 염소처럼 말뚝 묶인 얼굴 울음과 경적이 두 뿔, 레일 마음이 유리에 뜬다 이렇게 뜨거운 인쇄소가 어디 있겠는가 유리창 하나에 현상되는 인생 칸마다 같은 얼굴만 찍히는 이런 원고지 칸이 어디 있겠는가 어둠과 밝음이 경계를 넘나드는 화면 숨을 덜컹거리며 내 마음을 찍어대는 유리 인쇄기 한 장
굴러가는 바퀴 불꽃 튀기며 순간이 용접되는 길 독자가 오직 자신뿐인 책을 계속 찍어대는
이은화 시인 / Anne
멜빵바지를 입은 소년과 단발머리 소녀가 브런치를 먹고 있어 나이프를 든 소녀는 손을 떨어 마른 잎처럼 말이야
소년이 소녀의 손에 손을 얹자 소녀가 엷은 웃음을 지어 은발에 햇살이 쏟아지는 순간이야 느리게 접시를 비우는 동안 소녀의 떨림을 이해하는 소년 얼굴에 주름이 지고 있어 자꾸 소년과 소녀를 훔쳐보게 돼 예 쁠 것도 없는 은발의 풍경을 말이야
햇살을 만끽하는 중이야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사라져 짧은 키스처럼 말이야 그래도 키스가 필요하다는 믿음은 변함없어 사라지는 것들은 격렬한 자유가 있으니, 카페에서 홀로 쏠쏠할 때 키스는 위로가 될 수 있잖아
소년 소녀가 나란히 눕는 소리가 들려 사라진 길을 따라 은발이 되고 허리가 굽었겠지 소녀의 떨린 손을 잡아주던 소년 이 떠올라 아름다운 것들은 왜 슬퍼지는지 몰라 붉음일까 초록 때문일까
느리게 접시를 비울수록 자꾸 허기가 져 딥키스가 필요한 날이야 누구라도 괜찮다면 은발 소녀의 키스를 훔칠 거야 소년과 소녀가 사라지고 있어 햇살 속 눈 녹는 듯 말이야 아직 머리칼 한 올도 훔치지 못했는데 자꾸 사라지는 소리가 들려
- 계간 《시사사≫ 2023년 여름호
이은화 시인 /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
아버지가 달리자 오빠가 달린다 어린 나도 덩달아 달리던 토끼잡이 학교와 집에서 읽히던 동화책 잡아라, 토끼 잡아라 집집마다 산업화 액자에 걸려 있던
토끼는 어디로 갔을까 기계처럼 달리던 아버지와 오빠의 우상이던 토끼는 아버지는 산업화 토끼를 잡고 오빠는 민주화 토끼를 잡고 나는 자본주의 토끼를 잡기 위해 발랄하게 걸어가는 변천사
아버지는 토끼에게 잡아먹히고 오빠는 토끼 꼬리를 품고 숨어버린, 마른 숲에서 혼자 외롭게 달리는 토끼잡이
내가 달리고 어린 아들 딸이 뒤이어 달리는 토끼잡이 잡아라, 토끼를 잡아라 집집마다 자본주의 액자에 걸려 있는, 달렸으나 잡히지 않은 상상의 토끼 속도를 놓치자 느린 걸음이 그리워지는 울음 끝에서
거북아, 거북아, 부르면 슬프게 빛나는 눈 거북이 달린다 광화문 한복판 눈 짓무른 거북이 달린다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 에서
이은화 시인 / 꿈 한 페이지
어머니가 뒤주 속에서 뱀을 들어올렸다 손에 움켜 쥔 뱀 꿈틀거리고 비바람 몰아치듯 하늘은 꾸물거렸다 나는 뱀이 무서워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에 박힌 옹이를 따라 그려보다 마당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붙들어 앉히고 머리칼에 색실을 엮듯 뱀을 엮어 머리를 땋아 내렸다 기둥에 걸린 거울 속 창백한 달 정수리 위 꼿꼿이 선 뱀 대가리 땋아 내린 머리가 하리를 감으며 조여들었다 어머니 뒤주 속은 뱀들의 천국 나는 어머니의 우글거리는 근심 안에서 무릎 연골이 차고 키가 자랐다 뱀 득실대는 세상, 뱀의 지혜를 배워야 머리 물리지 않는다는 어머니 환청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서른하나, 살아오며 물린 뒤꿈치를 본다 뿌리처럼 사방으로 뻗은 뱀들과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無花果와 꽃피는 시절 없이 지나온 오늘 내 키는 더 자랄 것 없는 지금도, 낡지 않은 그림책 한 장 선명하다
이은화 시인 / 홍씨와 탁씨
웜메, 고약헝 거. 자네 밥 냅두고 왜 놈의 밥을 묵는 당가 워따, 참말로 생사람 잡아불구만, 나는 내 밥 묵었단 말시
내 참! 눈구녕 뒀다 어따 쓸라고, 놈의 밥을 묵고 난리여 자네야말로 눈구녕 빼서 개한테나 줘불소
먼소리여! 나가 개눈깔 박아불었는가안. 그래도 눈두덩 만지문 수북한 것이 영판 좋당께 염병! 오죽 좋겄네. 그나저나 밥알 튕게 말 좀 살살 하소. 이놈의 밥알은 별시럽게 끈끈하고 지랄이여
어이, 탁씨. 그라지 말고 사람 불렀으믄 쌈 한 번 싸줘 보소. 지 입에다간 허천나게 쑤셔넣문서 병신, 자넨 손이 없당가 발이 없당가. 싸게 입 벌리게
워따! 안 주고 뭐한가. 맘보가 그 모냥잉게 눈꼬락서니가 그라제. 말 인심만 살아갔고잉 사람, 성질머리 급하긴. 더듬는 것이 다 구멍이고 허방이랑께
-제12회《시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작
이은화 시인 / 연인산
삼계탕을 먹고 나와 등줄기 땀을 식히다 썩은 뱀 속에서 살 오른 구더기 떼가 꾸물꾸물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본다 계곡물에 발 담그고 앉아 올려다본 산 중턱에 상복 입은 사람들 더위에 지친 곡소리 바람에 섞여 끊겼다가 이어지고 삼복더위에저 시체는 잘 썩겠구나 푹푹 썩을 수 있다는 건 호상과 같은 일 물속 찬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울퉁불퉁한 돌을 괴고 앉은 옆 자리 먹다 버린 닭발들 쌓여 있다 훗날, 내 몸을 산실로 내어줄 수 있다면 수북한 닭발처럼 아름답겠구나 (저 닭발들이 머물 집 한 채는 되겠구나) 엉겅퀴 꽃 주위를 하릴 없이 휘적휘적 들렀다 사라지는 나비 한 마리 날갯짓 속에서 봉분을 다지는 인부들의 삽 소리가 텅텅 울리는 연인산 물줄기에 실려 내려오는 구성진 곡소리 한창이다 철 늦은 철쭉이 닭 벼슬처럼 낭자하게 핀다는 계곡에 앉아 환하게 잘 썩는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창작21』 여름호
이은화 시인 / 검지를 놓치는 순간
당신을 만지고 싶은 대낮입니다 사향으로 옷을 장식한 오늘,당신이 꿈속으로 흘러듭니다 한 세계가 낯설어집니다 바깥에서 초록 얼굴이 안에서는 검은 얼굴입니다 나를 열고 들어와 다른 문을 찾는 당신
당신을 따라 걷습니다 길을 막으면 싱크홀이 될 뒷모습, 흐느끼는 걸음 허공에 푹푹 빠집니다 그동안 나를 부르던 이름들을 삼킨 구멍이 꽃처럼 피어있는 길, 당신만은 내 체온에 가두고 싶습니다 불안한 낮입니다 독초의 매혹이 아지랑이 지는 싱크홀 앞
도발을 꿈꿉니다 당신 등 뒤에 총을 겨눕니다 권총의 매끈한 자루에 내 중지가 놓이는 순간, 달궈진 비명이 당신 왼쪽 등에 박힙니다 총알이 관통한 심장, 구멍 속으로 무너진 길이 보입니다
오늘은 내가 당신 몸속으로 침범합니다
- 2014년 <詩로 여는 세상>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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