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영 시인 / 뭉크의 절규 속으로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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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영 시인 / 뭉크의 절규 속으로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빛이 있다 이것은 살아있는 그림자일 수도 있고 어제의 죽은 고백일 수도 있다 언제나 그러했듯 빛의 방향은 확고하다 원색과 본색과 변색을 드러나게 한다 그림 속 사내가 가진 원색을 본다 입속의 위험한 말들과 눈동자 속 비명이 꿈틀거린다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을까 색의 살점들이 불안을 품고 괴로움을 채운다 그를 대변하듯 하늘과 산과 강이 요동친다 붉음과 검정과 노랑이 섞여 본색을 마구 휘젓는다 그런데 그림 속 사내가 나를 보고 있다 너도 나와 똑같구나, 말하는 것 같다 세계에 길들여진 나에겐 변색만 있다고 여겼는데 내 안의 색을 깨운다 내 안의 짐승을 들키고 만다 심장 속 똬리를 틀고 있는 원색과 본색 아무리 가려져 있어도 나는 나를 다른 색으로 덧칠할 수 없다 -계간 『아토포스』 2025년 여름호 발표
김숙영 시인 / 나무의 이상형
콧대가 높아요 늘 꼿꼿해서 직립을 고집해요
하하 호호 발랄한 이상형을 찾고 있나 봐요 목각 인형처럼 연기하더니 이상형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비나봐요 종일 우뚝 서서 너머의 너머를 바라보며 어느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고 반환점을 돌아 새가 날아오는 상상을 할 것만 같아요
바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구름이라는 닉네임을 덤으로 주었는데도 발목이 간질거려 추락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달빛이 닿지 않는 발끝에서 알 수 없는 진한 향을 발산하고 있어요 고도를 사는 나무는 바람이 힘든 게 아니라 바람을 껴안는 거라고 암시해 주는 것 같아요
어느 민족은 태양과 달을 숭배하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데 바람을 숭배하는 나무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걸까요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벌어진 입에선 가쁜 숨을 연이어 뿜어내도 새와 나무와 바람은 분리되지 않아요 서로 다른 방향이 하나가 되어 여기를 증명하는 몸짓들, 그런데도 생각만은 사방으로 뻗어가서 건조한 몸에 소멸이라는 문구는 어울리지 않아요
만약 나무에게 전생과 후생이 있다면 장작이거나 종이거나 숯이거나 가구이거나 관이거나 집이거나 했겠지만, 지금 하염없이 새를 연기하는 이 나무의 이상형은 수천 년 된 파피루스일 것만 같아요
날아갈 수 없는 건 숙명이라지만 외로움이 썩는 건 결코 견딜 수 없어요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김숙영 시인 /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박쥐를 부러워했지 야행성을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경계를 낳을 수 있으니까 모든 감각을 잊고 오늘의 여백을 껴안을 수 있으니까 상상을 틈타 몰래 그늘이 찾아와도 울 필요 없어 함께 숨어버리자 라고 말할 때 동굴을 맹신하는 동공의 속삭임이 가득할 테니까 난 사실 포유류가 싫었어 떠난 박쥐 대신 낯선 박쥐가 젖을 먹이고 있던 방식이 슬펐거든 길들인 심장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이젠 타인이 되어버린 박쥐처럼 열쇠가 달린 일기장에서 내가 모르는 나를 만들고 있었어 밤에 탈출할 때마다 난 분신술을 꿈꾸었지 표지를 여는 순간 말랑말랑한 기억의 윤곽이 드러났어 구불구불한 동굴의 표정이 나를 이끌며 습관적으로 날아올랐거든 그런데 내가 박쥐를 사랑한 게 아니야 박쥐가 나를 집요하게 찾아온 거야 태양과 밤이 섞이는 지점엔 눅눅해진 기분이 다정하게 나를 대변했지 그 속엔 암컷이길 거부하던 박쥐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어 박쥐는 어둠과 눈 맞아버린 사람의 머릿속에만 새끼를 낳았을 거야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이면서 말이야 난 자꾸 박쥐를 들키고 싶어 붉은 박쥐들이 겨울잠처럼 쏟아진 날엔 더더욱
월간 『모던포엠』 2023년 12월호 발표
김숙영 시인 / 고독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
아침과 저녁이 은밀해졌을 때 안녕, 키스라고 하자
내가 원하던 맛과 당신이 원하는 맛이 겹쳐진 자리를 애매한 풋과일의 맛이라 하자
작고 미약한 혀의 촉감 떨림은 아니고 떫음은 더더욱 아닌 한때 발갛게 달아 오른 심장이 식은 아침 위에 그대로 노출된 기분
비좁은 생각만 있을 뿐 틈을 메꾸는 건 계절일까 사유일까 까닭일까 블랙커피를 앞에 두고 서툰 대화로 길들여진 오전 사라질 표정 속엔 여백이 너무나 많은데 온기는 하나도 없다
접시 위에 놓인 위험한 말들이 컵 속에 굴절된 집요한 질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언어들이 지나치게 나를 닮은 지루한 눈빛과 현란한 몸짓이 겨울잠처럼 쏟아지는 걸 방치 하자
꿈인지 휴일인지 알 수 없는데 창밖엔 나만 실감하지 못하는 봄, 밀도와 깊이를 갖는다
이쪽과 저쪽의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배경 이젠 그만 전부 다 비워내고 싶은데 텅 빈 식탁만 보면 숨이 막힌다
-시집 『별들이 노크해도 난 창문을 열 수 없고』 2023년 수록
김숙영 시인 / 산자*
귀신들이 다녀갈 시간 열두 달 내내 밤은 환하다 실눈을 뜨고 자정의 표정을 살핀다 저 어두운 귀퉁이 무너지지 않으려는 엄마의 자세 수백 번 본 것만 같다 기름 냄새가 내 이불 속까지 스미면 꿈속까지 느끼하다 종갓집 며느리의 기분도 넓게 펴서 튀기면 귀신들이 맛있게 먹어 줄까 깨나 튀밥 대신 고명으로 올려진 한숨 고소한 것과 메케한 기분의 차이를 난 너무 일찍 알았다 폭우가 와도 폭설이 내려도 단 한 끼의 식사를 위해 귀신들은 집요하게 내려온다 이방인 같은 친족들이 날벌레처럼 몰려들고 호명된 귀신들의 대답을 어른들은 듣는 척을 한다 죽은 자가 허락한 음복의 시간 한과*는 산 자들의 입에서 바삭거리면서 무너진다 쌀알이 튀겨질 때마다 엄마의 심장은 곪아 점점 부풀어 오른다 다 돌아간 후에도 엄마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밤과 딸이 내내 아렸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김숙영 시인 / 언니가 갑자기
뼈를 내밀었다
물고기 뼈도 아니고 공룡 뼈는 더더욱 아닌 질투의 뼈를
항상 화가 난 화산처럼 질투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눈먼 기대와 은밀한 약속 사이에서 존재하는 건 사랑일까 분노일까 후회일까
언니는 등을 떠밀더니 손수건을 내밀었다
눈물과 미움의 뒤편에서 슬픈 눈빛은 안개처럼 조금씩 멀어졌는데
다른 얼굴이 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끝없이 가는 기분이다
다음날엔 언니가 사과를 내밀었다
화해는 짧고 단물은 길게 깊게 오래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어 있었다
언니의 트라우마는 애증으로 남았지만 나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불길했다
오전엔 울고 오후엔 웃었고 일요일엔 걷고 수요일엔 달렸다
낮엔 과장법에 젖고 밤엔 괜찮은 척을 했다
한쪽이 아프면 다른 쪽은 혼자 떠돈다
-계간 『시와 징후』 2024년 가을호 발표
김숙영 시인 / 저수지의 고백
내가 먼저 저수지에 말 걸지 않았는데 저수지가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물안개를 피우면서 스멀스멀 다가와도 내 발은 그저 시처럼 호응했을 뿐이다 먼저 나를 홀렸다 홀린 입술이 몽롱한 기억을 펼치면 두 발은 한사코 맹목적으로 간사했고 아홉 개의 꼬리는 여우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한 번도 젖지 않았다 유혹을 알고 있는 것은 나를 따라온 검은 개 하나뿐이었다 개의 꼬리의 방향이 위아래 좌우뿐이라고 여겼는데 언제나 저수지 쪽이었다
안개가 없는 날엔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저수지를 맴돌았다 낮엔 저수지의 거대한 입이 느껴졌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나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셀 필요가 없었다 억새와 뱀과 들쥐와 버려진 고양이가 각주처럼 달라붙었다
목소리는 추임새처럼 물결을 탔고 무릎의 감각은 한 뼘씩 진행형으로 바뀌었다
흔한 참회를 나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주문을 외우는 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더라도 혼자가 된 일요일을 들키지 않았다 그저 높은 철탑의 피뢰침까지 닿을 것 같던 나의 속삭임은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향한 불가능한 우화에 지나지 않았다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저수지의 깊이는 늘 솔직했다 독백의 농도가 끝까지 들쑥날쑥했고 발목을 가두라는 소리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목줄을 잡은 손을 격렬하게 뿌리치려는 검은 개와 아주 잠깐 두 눈이 마주쳤다
김숙영 시인 / 저수지의 고백 내가 먼저 저수지에 말 걸지 않았는데 저수지가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물안개를 피우면서 스멀스멀 다가와도 내 발은 그저 시처럼 호응했을 뿐이다 먼저 나를 홀렸다 홀린 입술이 몽롱한 기억을 펼치면 두 발은 한사코 맹목적으로 간사했고 아홉 개의 꼬리는 여우처럼 다정했다 그러나 한 번도 젖지 않았다 유혹을 알고 있는 것은 나를 따라온 검은 개 하나뿐이었다
개의 꼬리의 방향이 위아래 좌우뿐이라고 여겼는데 언제나 저수지 쪽이었다
안개가 없는 날엔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저수지를 맴돌았다 낮엔 저수지의 거대한 입이 느껴졌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나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셀 필요가 없었다 억새와 뱀과 들쥐와 버려진 고양이가 각주처럼 달라붙었다
목소리는 추임새처럼 물결을 탔고 무릎의 감각은 한 뼘씩 진행형으로 바뀌었다
흔한 참회를 나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주문을 외우는 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더라도 혼자가 된 일요일을 들키지 않았다 그저 높은 철탑의 피뢰침까지 닿을 것 같던 나의 속삭임은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향한 불가능한 우화에 지나지 않았다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저수지의 깊이는 늘 솔직했다 독백의 농도가 끝까지 들쑥날쑥했고 발목을 가두라는 소리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목줄을 잡은 손을 격렬하게 뿌리치려는 검은 개와 아주 잠깐 두 눈이 마주쳤다 -계간 『시와 징후』 2024 가을호 발표
김숙영 시인 / 폐소공포증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3초 동안의 공포, 그 앞에서의 짧은 기도와 주문이 반복됐지 매번 발끝이 닿지 않는 상상을 하곤 했어. 출구는 있는데 비상구와 계단이 없는 한 뼘 남짓한 네모 상자, 문이 닫히는 순간 상상은 시작되지, 절정은 순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떨어지면서 생긴다는 상상… 슬프지도 않은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쁘지도 않은데 낯선 기류에 몸이 둘러싸이지, 어떤 체위로도 닿을 수 없는 너와의 거리, 빌어먹을 사랑이 공포라니, 한번은 낯선 시선이 애도하듯 나를 흘겨보았어, 검은 새의 단단한 부리가 곧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것만 같았지 사람과 사랑은 바닥이 없어, 그건 너 하고의 밤도 마찬가지야 넌 1에서 10까지만 세면 괜찮다고 했지. 그런데 그거 아니? 10까지가 얼마나 먼 세계인지, 이제 너의 손을 잡아도 떨리지 않아, 너는 나의 엘리베이터이니까 모던포엠 2023년 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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