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상윤 시인 / 메시지 예약전송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5. 08:00
이상윤 시인 / 메시지 예약전송

이상윤 시인 / 메시지 예약전송

 

 

일주일 전 세상 떠난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있지

난 잘 왔다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더라

그때 수고 많았고

고마웠다

빳데리가 없어

더는 연락 못 한다

 

 


 

 

이상윤 시인 / 단칸방

 

 

젖은 연탄 피우는 연기

움푹 꺼진 부엌에 잘팍히 고인 밤이면

우리는 좁은 필통 속

연필처럼 나란히 누웠다

 

깎아보면

심이 곯아 다 부러져 있는

여섯 자루의 아픈 연필

 

찬 기운이 기어들지 못하도록

한 몸으로 붙어 누운 새벽,

잠에서 깨어 바라본 유리창은

밤새 여섯 자루의 연필들이 뱉어낸 입김에

온통 눈 덮인 풍경

 

산엔 백목련, 들국화

들판 너머엔 설국雪國으로 달려가는 기차

하늘엔 먼데로 흩어지는 구름

그리고 얼굴, 얼굴들.......

 

아버지는 이미 부러지고

어머니는 부러질 날을 기다리고

두 형과 한 누나는 다른 필통 속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난 아직도 잊지 못하네

필통 속 잘 부러지던 연필들의 심,

그 흑연냄새를

 

 


 

 

이상윤 시인 / 시인 M

 

 

보지 않고 이름만

들어도

영락없는 시인

 

달빛 두근거리는

홀로 봄 뜰에 서 있는

 

저 소슬한

백목련 한 송이

 

 


 

 

이상윤 시인 / 안개의 근황

 

 

그즈음 11월에도

우리는 강을 끼고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강에 무리 지은 새떼를 삼켜버린 안개가

스멀스멀 강변도로로 기어 나와

근황을 물었을 땐

아직은 그래도 잘 있다고 안개등을 켜주었다

 

안개 속에 손을 집어넣어

당신의 짙은 목소리를 꺼내던 날들은

눈은 침침했지만,

온몸은 그래도 환했었다

 

안개의 어깨너머를 짚어보다

이젠 만질 수 없지만,

안개 속에서 많은 당신을 세어 볼 수 있었다

 

안개는 당신의 편이라 믿다.

먼저 등을 바라보는

사람의 편에 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

당신과의 거리가 덜 슬퍼졌다

 

그때부터 난

한나절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를 몰고 가는 바람을

담담하기로 한 이별처럼 바라볼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도

안개 밖에서도 기억은 산다

 

안개 속에 있는 당신과

안개 밖에 있는 나도

속과 겉 분별도 없이 살아내면서

축축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11월의 안개는

닿을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서

그렇게 기를 쓰며 자욱해졌던 것이다

 

 


 

 

이상윤 시인 / 집들이

 

 

네가 이사했다는 건

무소식만 전하던 친구에게서 들었다

1002동 505호

더 높이 오를 수 없는,

계단이 없는 신축 다세대주택

 

빈 술잔마다 고향을 채우던 너는

흙집을 원했지만

부지런함도 너의 편이 되어주지 못해

얼마 전 공사가 마무리된

분양가를 낮춘 이곳에 들었다

 

언제나 표정에 인색했지만,

평생 처음 이름을 건 집이라

문 앞에 선 너는

활짝 펼쳐둔 웃음을 접지 못한다

 

506호엔 박봉순 할머니가 살고

507호엔 예쁜 예린이가 살고

509호는 며칠 후면 입주할

김국현 씨 이름으로 계약되어 있다

 

집들이 온 사람들은

저마다 싸들고 온 음식을 펼쳐두고

웃다가 울다가

싱거워져 가는 기억을 한 술씩 떴다

 

사람들 기척 소리에도

문밖을 한 번 내다보지 않는 너는

참 많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깨우고 싶지 않아 그냥 돌아오려다

오래전 가을이던가,

우산도 없이 너를 찾아간 그 때처럼

문을 한 번 두드려본다

 

 


 

 

이상윤 시인 / 이별을 읽다

 

 

나를 앉혀 두고 당신이 왼쪽으로 눕는 것을

이별이라 부른다

 

내가 오른쪽에 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따뜻할 수 있었을까

 

이별은 어제 죽은 자의 오늘 같은 것

 

당신이 없는 거리에선 지는 꽃이 더 붉었다

바람이 지날 땐

꽃잎은 버리고 떨어진 향기만 보았다

 

이별은 이해되지 않는 장문의 편지

창의 왼쪽을 바라보는 난

새벽까지 한 문장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루는 생의 마지막처럼 저물고

나는 강가에 서서

오지 않을 즐거운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당신이 등을 두고 간 자리에서

젖은 돌 하나를 주웠다

모가 닳았다

동글해져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

 

당신은 가장 깊은 수심에서 건져 올린 돌

그 돌을 던져 강으로 돌려보낸다

수면에 그려지는 동그라미

 

자꾸만 당신 얼굴이다

 

 


 

이상윤 시인

1969년 경북 경산 출생, 국민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졸업. 2013년 《시산맥》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광영고등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