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홍구 시인 / 그 사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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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홍구 시인 / 그 사람
급하다고-꼭 갚겠다고-날 못 믿으시냐고- 그래서 가져간 내 돈 2천만 원 자식들에게도 내가 돈이 어딨노 했고 마누라도 모르는 내 쌈짓돈 그 돈 그만 떼이고 말았다
애타게 찾던 그 사람 몇 개월 만에 전화가 왔다 제가 그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은행통장 번호를 알려 달란다
자기 식당 말아먹고 남의 집에서 하루 일당5만원을 받아 어떤 날은3만원을 또 어떤 날은2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
오늘도 그 사람 행방은 모르고 눈물 3만원어치를 받았다 기쁨도 3만원어치 받았다 돈보다 귀한 눈물을 받았다 내게 그 눈물은 행복이다 나도 눈물 3만원어치를 보낸다
ㅡ시집 <시로 그린 인물화> (북랜드, 2012)
허홍구 시인 / 가면
당신은 누굽니까? 늑대입니까? 양입니까?
언 듯 언 듯 더럽고 치사한 나의 얼굴도 보입니다
이제 우리 가면을 벗어 던집시다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허홍구 시인 / 얼굴을 감추고 싶다
철없고 겁 없던 시절 모자라는지도 모르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마구 쏟아 놓은 말과 글
여물지 못한 저 쭉정이와 가볍게 휩쓸리는 껍데기 이제 지워 버릴 수도 없고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다
건방 떨던 못난 짓거리 아직도 이리저리 흩어져 죽지도 않고 돌아다닌다.
어이쿠, 부끄러워라 부끄러운 흔적 어찌 지울까요 하느님, 부처님, 독자님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허홍구 시인 / 어버이날 일기
아버지 어머니 무덤 앞에 무릎 꿇고 큰절 올렸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다른데 아들을 알아보셨겠습니까
먼 산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 아프게 울다 왔습니다.
이 못난 불효자가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길을 걷다 왔습니다.
허홍구 시인 / 사람의 밥이 되어
오늘 왔다가 오늘 가는 하루살이의 생명도 위대하게 왔으리
길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나무 이파리도 신비롭게 왔다가 가느니
내 작은 한 톨의 쌀로 몸 받아 올 때 하늘과 땅이 있어야 했고 밤낮이 있어야 했고 해와 달 비 바람이 있어야 했다
농부의 얼굴을 뙤약볕에 그을리게 했고 애간장을 녹이게 했고 손마디가 굵어지도록 일하게 하고 땀 흘리게 했다
이제 사람의 밥이 되어 나를 바치오니 작은 이 몸이 어떻게 온 것인지를 일깨워 부디 함부로 하지말게 하소서
허홍구 시인 / 채송화
발뒤꿈치도 한 번 들지 않았구나.
몸 낮추어도 하늘은 온통 네게로 왔구나.
울타리 하나 세우지 않고도 꽃밭을 일구었구나.
올망졸망 어깨동무하고 사는구나
허홍구 시인 / 총알보다 빠르다
여자 홀리는데 날쌘 친구가 있었다. 우리들은 그를 총알이라 불렀다.
총알이 점찍어 둔 여자를 내가 낚아 챈 일이 있고부터 친구들은 나를 번개라 불렀다!
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대폿집에 몇이 모여 옛날을 이야기 하다가...
지금도 총알보다는 번개가 더 빠르다고 강조하였다.
총알이란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우리들 보다 훨씬 더 빠른 세월이란 놈이 있다고, 우리는 벌써 일흔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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