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리 시인 / 기억의 집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5. 08:00
김명리 시인 / 기억의 집

김명리 시인 / 기억의 집

 

 

바람 소리 세차다

현관 등이 켜진다 이 깊은 밤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산등성이 집

때맞추어 비 내린다는

시우리時雨里 산간마을에

시간의, 아주 먼 데서부터 누군가 찾아온 듯

현관의 센서 등이 저절로 깜박이고 있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더 깊은 속엣말을 찾지 못한 새들의

들릴 듯 말 듯 허공을 울리는 차임벨 소리

망연히 눈 감으면

한 떼의 새들의 텅 빈 눈자위 가득

드라이아이스로 떠다니는 밤구름들

아득히 바스러지는

마른 꽃잎 같은 기억들 사이로

시간의 청결한 눈目들이

밤의 등빛 속을 위태롭게 난다.

산약山藥 같은 비 냄새 흠씬 풍긴다

 

 


 

 

김명리 시인 / 녹우綠雨

 

 

4월의 비는

채 꽃송이 벌지 않은 백합나무와

아직은 연푸른 낙우송落雨松,

몰아올 낙엽과, 침엽의 두근거림 사이에서 시작되지

 

청도 지나는 봄빛,

헐티재 너머 각북*에 내리는 저 실핏줄,

 

송화 가루에 눈시울 붉어진 나비 걸음으로

내 섰는 여기는

연두에서,

잎잎 초록으로 넘어가는 강물의 세찬 굽이 속이라네

 

물머리 돌아 흐르는 꽃 붉은 산비탈

밀집모 눌러쓴 홍안紅顔의 백수광부여

늙은 몸이 맥없이 휘청거리는

아스라한 벼랑 끝끝까지

넘치게 술잔 기울이는 저 봄빛,

 

다시는 떠나보내지 않으리

단단히 묶어두리, 저 봄빛!

상처의 응이마다 아픈 내몸을 거기 누이리

 

슬픔이여, 하룻밤도 돌아눕지 않으리

 

*각북 : 청도군의 한 면소재지

 

 


 

 

김명리 시인 /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휘젓던 꽃샘바람 그치고 볕 좋은 날

잘 익은 너르바위에 식탁을 차린다

인적 드문 이 곳, 금빛골짜기

유릉 숲 사이론 푸른 해오라비 날고

물소리가 해묵은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아무래도, 덮쳐오는 봄빛은

치한의 눈빛처럼 이글이글해

만개한 산철쭉 두근거리는 바위틈으로

나 돌아간다 먼저 온 슬픔이 엿볼세라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채

더 깊이 바위틈으로 밀어넣는다

 

앗!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은둔하는 하루살이들이 개미 떼들이

바위 속을 온통 하얗게 누비고 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바위 속으로

널찍한 신작로를 내는 일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의 대지에

또 한 그루 망개나무를 심는 일

해 넘어가기 전에 불멸의 식탁을 차리는 일

 

내 마음 더 바삐 서두르며

그들의 신작로에 닿기도 전에

일몰의 고단한 꽃씨들이 몰려오고 몰려가고

망개그늘 아래로 가파른 둥근 물소리들

잠 없는 봄밤의 드높은 물보라로 치솟고 있으니

 

 


 

 

김명리 시인 / 산노을

 

 

또 저 텅 빈 허공의 호적부에

붉디 붉은 노을이 오고

 

死産한 내 아이들의

단 한 번도 소리내어는 불러보지 못한

차디찬 이름처럼

 

이 저녁

돼먹지 못한 슬픔이

쐐기처럼 가슴에 와 단단히 박힌다

 

발 푹푹 빠지는 허공의 애장터마다

나 말고 또

누가 내다버린

후레자식들이 지천이어서

 

구만리 장천

저 시퍼러니 말라붙은 젖꼭지들에

보란 듯 왁자하니 핏물 도는가

오래된 슬픔도 탕약처럼 써서

 

산비알 웅크린 天南星 잎새마다.

선혈의 핏방울 돋아나는가

 

 


 

 

김명리 시인 / 세월이 가면서 내게 하는 귓속말

 

 

나를 울려놓고 너는

내가 안 보인다고 한다

이 깊은 울음바다 속을 헤매 다니는

날더러 바람소리라고 한다 해가 가고

달이 가는 소리라고 한다

나를 울려 놓고 울려 놓고

가을나무가 한꺼번에

제 몸을 흔드는 소리라고 한다

수수 백년 내 울음소리 위에 턱 괴고 누워선

아무도 없는데

누가 우느냐고 한다

설핏한 해 그림자

마침내 떠나갈 어느 기슭에

꾀꼬리 소리 같은 草墳 하나 지어놓고선

어서어서 군불이나 더 지피라고 한다

새하얗게 이불홑청이나 빨아놓으라고 한다

 

 


 

 

김명리 시인 / 유행流行

 

 

흐르고 싶었네

엷어진 길들이 무더기로 꽃잎을 져나르는

새로 세 시의 매운 산울음 그대로 헝클며

나란히 나즉히 엎드리고 싶었네

흐르고 싶었네

이리 밀리는 미닫이 새와

저리 열리는 여닫이 새와의

그 엇물림의 자리

달빛에 물빛에 닳아질 때까지

오너라 굽이치는 저 강물 속으로

나란히 나즉히 업드리고 싶었네

 

 


 

 

김명리 시인 / 그 곳엔 아직 아무도 닿지 않았다

 

 

그 곳엔 아직 아무도 닿지 않았다

시월 햇빛이 누군가의 울음을 떠메고

이르고자 했던 그 곳.

부러진 옥수수 텅 빈 꽃대궁 속을

가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내 안의 풀벌레 울음소리

아직은 풀빛 짙은데

 

아아 그곳에 가 닿으려는 누군가의 울음!

 

 


 

김명리 시인

1959년 대구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섬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