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시인 / 육체의 비밀 외 6편
|
이민하 시인 / 육체의 비밀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눈꺼풀의 안쪽과 바깥
한 사람이 옷을 훌훌 벗는다면 부끄러움은 누가 뒤집어쓰나 벗은 몸의 안쪽과 바깥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당신 안에서 빠져 있는데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멈추는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사람의 두 발은 어디에 있나 한 뼘과 천 길 사이
굳게 닫힌 눈과 입 실금이 간 얼굴로 시체처럼 누워 당신은 가장 가깝고
나는 가장 먼 곳에서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고 옥수수알을 씹는다 천 개의 알갱이를 입안에서 터뜨리며 당신을 자꾸 귀에 대본다 깜깜한 백지처럼
입을 다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나 입술의 안쪽과 바깥
배시시 눈을 비비며 마주보는 당신은 멀리서 불빛을 보고 숙소로 찾아든 이방인 같다
모호한 발음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눈빛을 껐다 켰다.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다. 가장 투명한 곳에서
이민하 시인 / 가족사진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 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이민하 시인 / 벽 속의 누가累家
나무들이 한삽씩 빗물을 퍼붓고 있다. 벌어진 창틈 사이로 골목의 아이들이 웃음의 뼛가루를 뿌리고 사라진다. 나는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백년 전부터 눈을 뜬 것 같은데 희미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외로운 누가.
걸음마보다 숨바꼭질을 먼저 배운 언니는 뙤약볕이 싫었는지 벽 속으로 기어들어가 꼭꼭 숨었다. 언니의 뒤통수도 보지 못한 나는 엄마가 고함을 지를 때까지 자궁벽 안에 웅크려 잠만 자고 있었다. 잠보다 놀이를 먼저 배웠더라면 술래가 되어 언니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축축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벽에 물집이 번지던 여름날.
스무해 동안 갈아주지 못한 기저귀가 생각난 듯 갑자기 엄마는 하얀 시트를 둘둘 만 채 벽 속으로 들어갔다. 앰뷸런스도 배웅하지 못한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문법보다 마법을 배웠더라면 두 손으로 벽을 비집고 엄마를 꺼낼 수 있었을까. 딱딱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가구가 늘어도 한쪽 벽엔 늘 네모난 빈자리가 놓여 있는 이유. 나는 벽과 나란히 누워 있다.
벽에 박힌 사진 속에서 늙지도 않는 엄마를 마주 보다가 잡초 무성한 벽지를 움켜쥔 채 외할머니도 지난 여름 뒤따라갔다. 뺨을 타고 장맛비가 흘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흔들면서 가세요. 뒤늦게 입이 트인 나는 엄마의 손수건을 할머니 손에 쥐여주었다. 울음보다 음악을 먼저 배웠더라면 아름다운 곡소리를 낭송할 수 있었을까. 서늘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손끝으로 벽을 쓸어보면 생생하게 묻어나는 마지막 체온.
여름에 떠난 사람들은 영원히 추위를 모르고 비라도 내린다면 천근만근 살 껍질을 귤껍질처럼 벗을 텐데. 내가 잠들면 벽에 걸린 옷들은 어떤 기분일까. 구겨진 몸을 늘어뜨리며 없는 목을 매다는 연습은 왜 하나. 바닥에 납작 깔려 있는 나는 어제보다 얇아져 편지지처럼 고백이 늘었는데 말을 실어나르는 바람의 부피는 늘지 않는다. 눈앞에 마주 보이는 천장이 지난밤보다 낮아진 것일까. 무심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빗줄기가 날리면 덜컹거리는 액자들을 창문처럼 열어젖히고 눈이 텅 빈 얼굴들이 뚫어지게 바라본다. 벽 속에 집이 있다. 오래된 누가. 벽을 똑똑 두드리면 그녀들이 천장으로 올라가 두 발로 꾹꾹 밟으며 화답한다. 보름 전에 죽은 길고양이는 소리 높여 곡을 하고 빗소리가 함께 달구질한다. 목이 쉬도록 후렴구는 잠들 줄을 모르는데 나는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잠에서 깨어 거울을 보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는 이유. 손을 내밀면 잡아당길 거 같아 뒤로 감추는 이유. 간밤에 죽은 내가 거울을 열고 벽 속에서 빤히 내다본다.
이민하 시인 / 낭송가
한 사람의 악사가 사라졌네 벽에 기댄 기타는 연주를 멈추었지만 여섯 개의 덩굴손이 지붕 위로 음표를 뻗었네 가수인 나는 입을 벌리고
한 사람의 시인이 사라졌네 뒷골목을 떠돌아다니는 몇 권의 책이 그의 이야기를 훔쳤네 독자인 나는 입을 벌리고
한 사람의 당신이 사라졌네 그가 앉았던 의자는 거울 속에 발이 빠졌네 거울 속엔 빈 의자가 세 개나 있는데 허공에 앉아 식지 않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연인인 나는 입을 벌리고
화산이 폭발하고 붉은 혀가 흘러내리는 극장과 식당과 우체국과 신전에서 그들을 더듬으며 서로의 화석이 된 신도들처럼
구겨진 지붕 속으로 타오르는 뒷골목 속으로 구멍 뚫린 거울 속으로
한 사람의 내가 사라졌네 목격자인 내가 간밤의 표정을 발굴했네 목소리를 복원하자 박수 소리가 터지고
몇 줄의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네 밀고자인 그들은 입을 벌리고
이민하 시인 / 비어 있는 사람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떤 체위로 가능할까
십 년 만에 몸을 뒤집고 있는 것 같아 텅 빈 입속엔 구르고 있는 돌 하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혼자 하는 키스처럼
처음부터 물려받은 독백처럼 십 년이 또 지나도 문패가 바뀐 후에도
이민하 시인 / 야유회
한 사람이 손수건을 살며시 놓고 갔다 그것이 이별인 줄 알았는데
돌아볼 수 없어서 두 손만 뻗어 뒤를 더듬었다 그런 건 게임인 줄 알았는데
다음 사람이 수건 대신 찢어진 페이지를 돌렸다 이야기가 등 뒤에서 겉도는데
둥글게 둥글게 합창이 흐르고
벼르던 사람이 그물을 던지고 뛰었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벗어나
달아나면 사람이 죽은 새를 몰래 흘리고 뛰었다 쫓기던 사람이 쫓는 사람이 되어
몇 바퀴를 헛돌던 사람이 핏덩어리 아기를 두고 뛰었다 발을 뺄 수 없는 한마음이 되어
둥글게 둥글게 눈빛만 흐르고
재빠른 사람이 폭탄이 떨어뜨리고 빈자리에 숨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의 등 뒤에서 불이 확 타올랐다 죽은 사람이 죽이는 사람이 되어
사람들은 하나둘 육신을 내려놓고 떠돌았다 배가 고파 모니터 밖으로 나오면
둥글게 둥글게 밤하늘은 흐르고
야식 배달 소년이 일용할 먹이를 돌렸다 이것이 결말인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일기장을 신발처럼 벗어두고 떠났다 이야기가 입가에서 맴도는데
씹는 사람이 씹히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는 꼭 혀를 깨물었다
이민하 시인 / 전망 좋은 창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가 달력을 들추더니 저금통을 털어 시장(時場)에 다녀오신다
뭐하려고요, 아직 가느다란 혀들을 가누지 못하는 내가 검은 포대기에 싸인 채 묻는다
아버지는 찰랑찰랑 웃음을 처마 끝에 달아두고 맑은 아침을 골라 화단의 흙을 손톱으로 팠다
고등어를 손질하던 엄마의 엉덩이가 햇덩이처럼 달아올라 비린내를 풍겼다 고추가루 같은 땡볕이 따끔거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꺼낸 꽃씨를 가득 화단에 묻고 집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했다
갑작스런 소낙비가 처마를 흔들고 지나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는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포대기에서 나를 꺼내 엉덩이를 탁탁 털더니 거꾸로 세워 허리까지 흙에 묻고는 시간의 포장리본을 풀었다
광택이 흐르는 연둣빛 신발들을 핏기 없는 발가락마다 신겨주고는 두 손을 탁탁
그러고는 생일상 위에 초를 꽂는 엄마가 있는 사각 창문 안으로 들어가 화단을 바라봤다
무성(茂盛)한 입들이 땅 속으로 뻗었고 무성(無聲)한 잎들이 바람의 계단을 밟고 창문을 뜯어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