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강윤후 시인 / 서른 살의 사랑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6. 08:00
강윤후 시인 / 서른 살의 사랑

강윤후 시인 / 서른 살의 사랑

 

 

사랑은 기다림이 아니라

서투른 몸짓으로 조급하게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서슴없이

네게 다가가기라는 것을

오랜 기다림 끝에

내 기다림에 지쳐 네 기다림이 떠나고서도

다시 많은 날이 흐른 뒤에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

 

힘줄 질긴 미련이 갑자기 끊기던

그 깨달음의 순간

심장이 한 치쯤 자리를 옮기는 듯한 아픔이

약기운처럼 지긋이 내 온몸에 퍼지고 나는

연거푸 찬물을 들이켰지 그리고는

제풀에 맥이 빠져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

너에 대한 기다림을

 


 

강윤후 시인 / 마흔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강윤후 시인 / 다시 쓸쓸한 날에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세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이나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

쑥뜸 떠 毒氣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랫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노래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끓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얘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바짝바짝

퉁명스레 말라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를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대쪽처럼 쪼개지리라.

 

 


 

 

강윤후 시인 / 빗길

 

 

그리움이 깊어지기 위하여 비는 내리는가

비가 내리면 새들도 갈 곳 모르는데

기억은 못이 툭툭 빠져 물 위를 흐르고

높아서 흐려지는 고층의 창들

사람들 사이가 젖어 흔들려도

더 멀리 가는 길은 서슴없이 밝아져 아득하고

잎 떨어진 가지 끝에 침묵이 굳기까지

완고한 그림자 위태롭게 걸려 나부끼리니

무심히 흘린 발자국에 쫓기며

비가 멎는 곳까지 걸으면

뒤늦어 소문뿐인 그대 기다림

맑은 햇살에 잠겨 먼지처럼 흩날리며

내 기약 없이 떠돈 그 많은 날들

다 용서해줄 텐가

눈부신 현기증에 고단한 내 젖은 옷

또 하나의 기다림으로 증발할 텐가 그러나

나는 아직 좁은 어둠으로 우산 받쳐든 채

빗속에 갇혀 있고

迷兒처럼 방황하는 세상의 다른 길들

포개지며 묽어져 정녕

길을 묻지 않는 자의 정처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비는 내리는가

비가 내리면 흔들림은 깊어져

기억의 저지대가 끝내 침수되고 마는데

 

 


 

 

강윤후 시인 / 봄눈

 

 

단념하듯 봄눈 내린다.

가로수들이 속죄하는 모습으로

눈을 맞으며 서 있다 아직

집에 닿지 못한 길들이

새로 갈리며 세상을 넓힌다

추억이 많은 길들은 적막하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약속도 없이

벌어지고 또 얼마나 많은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았는가 때늦어 당도한 눈발들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다 다만

하루살이처럼 떠돌며 망각을 부른다

높은 가지 끝에서 찬란한 빛으로 소멸하는

한 점 눈발을 두고서 나는 이제

다른 예감을 품을 수 없다 언젠가

때가 오면 띄어야 할 訃告가

내게도 있다는 걸 알 따름이다

한 번 갈린 길들은 결코

되돌아올 줄 모른다 나는

세월보다 빨리 늙어간다

 

 


 

 

강윤후 시인 / 먼봄

 

 

 햇살은 쏟아지려나

 무너진 돌담 너머로, 병실의 빈 침대 위로, 놀이터 미끄럼틀의 녹슨 난간으로, 공장짇ㄹ뚝들속으로, 철야한 아침의 쓰린 빈속으로, 사형수의 음습한 독방 안으로, 밤새도록 다 털린 노름꾼의 아침으로, 긴 밤을 시달린 창녀의 방문 앞 섬돌 위로, 고드름 주렁주렁한 양로원의 북쪽 처마 아래로, 겨우 밖으로 나온 어린 아이의 서툰 걸음마 앞으로, 헐벗은 채 겨울을 나고 있는 이웃들에게로

 그래서

 아직 흙을 움켜쥐고 있는 죽은 뿌리들이

 다시 꼼지락거릴 수 있을까

 

 


 

 

강윤후 시인 / 여름!

 

 

 여름 뒤에 느낌표를 달아두고 싶다. 여름이면 온 세상이 느낌표로 일어서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이 넓이의 계절이고 겨울이 깊이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높이의 계절. 그래서 여름이 되면 세상은 늑골마다 더운 바람을 한껏 담은 채 풍선 모양의 느낌표로 일어선다. 신발을 당에 벗어두고서 짱짱한 하늘로 목을 뽑아 일어선다. 날아오른다. 땅 밑 어둠을 모조리 긁어모아 하늘에 흩뿌리듯 나무들은 가지마다 푸른 물이 콸콸 터지고 해바라기는 불을 토한다. 햇살은 나무들의 발치에 그늘 한 무더기씩 던져준 채 발가벗고 거리를 뛰어다닌다. 누워 있는 것들을 발길질하여 일으켜세운다. 쟁글쟁글 쇳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세상은 금방이라도 증발할 듯 들뜬다. 모든 생명은 여름에 높은 곳을 향한다. 여름은 그 높은 곳에서 가을날의 찬란한 추락을 예비한다.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여름일수록 가을을 넉넉한 죽음으로 덮을 수 있다. 어느새 가을이 가까이에 있다.

 

 


 

 

강윤후 시인 / 여름!

 

 

 여름 뒤에 느낌표를 달아두고 싶다. 여름이면 온 세상이 느낌표로 일어서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이 넓이의 계절이고 겨울이 깊이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높이의 계절. 그래서 여름이 되면 세상은 늑골마다 더운 바람을 한껏 담은 채 풍선 모양의 느낌표로 일어선다. 신발을 땅에 벗어두고서 짱짱한 하늘로 목을 뽑아 일어선다. 날아오른다. 땅 밑 어둠을 모조리 긁어모아 하늘에 흩뿌리듯 나무들은 가지마다 푸른 물이 콸콸 터지고 해바라기는 불을 토한다. 햇살은 나무들의 발치에 그늘 한 무더기씩 던져준 채 발가벗고 거리를 뛰어다닌다. 누워 있는 것들을 발길질하여 일으켜세운다. 쟁글쟁글 쇳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세상은 금방이라도 증발할 듯 들뜬다. 모든 생명은 여름에 높은 곳을 향한다. 여름은 그 높은 곳에서 가을날의 찬란한 추락을 예비한다.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여름일수록 가을을 넉넉한 죽음으로 덮을 수 있다. 어느새 가을이 가까이에 있다.

 

 


 

 

강윤후 시인 / 한밭, 그 너른 들에서

 

 

나를 표시하는 몇 개의 숫자들과 더불어 산다

간혹 집 전화번호나 통장 비밀번호 같은 것을 잊고서

청어 대가리처럼 어리둥절해 한다.

먼 도시의 지인(知人)들 사이에 떠도는

나에 대한 소문들을 듣기도 한다

소문에서 나는 무엇에 대단히 화가 나 있거나

누구를 아주 미워한다 행복한 가장이 되어

세월을 잊고 세상일마저 모른 채 지낸다고도 한다

소문만으로도 내 근황이 충분하므로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본다

아무 징조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문득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 너른 들판 어디쯤에선가 나도

그렇게 시동이 꺼질 것이다

갑작스레 멎을 것이다.

 

 


 

강윤후 시인

1962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1991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옴.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우송공업대학 문예창작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