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시인 / 오후 4시의 부재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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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 시인 / 오후 4시의 부재
오래 걸어온 길의 끝일까 변형된 기억의 추종일까 담겨진 시간이 눅눅하다
먼저 잃어버린 한 짝인지 남겨진 한 짝인지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둘이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고 방향만 바뀌어도 전전반측하다가 천천히 뒤틀린 게지
꽃이 지는 모퉁이 돌면 버려진 헌 신발 한 짝에 고인 햇빛이 있다
김영애 시인 / 껍질을 까며
껍질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땅콩이 소우주 들어앉은 충만이 둘이라면 셋으로 혹은 하나로 변주되는 이단의 선택 둥그렇게 움츠린 것은 약한 것들의 지혜 단단한 껍질에 치명적인 각도는 살아있는 것의 운명이라 손가락에 힘주며 부서지는 껍질 앞에 숙연하다
김영애 시인 / 엘 로사리오, 전나무숲에서
세상에 오지 못한 어여쁜 아가야 너는 습자지보다 가볍다 여린 날개로 4천Km를 날아와서 겨울 산 온기에 기대는
어여쁜 아가야 다시 태어나라 미지의 성소를 향하여 여린 날갯짓을 계속해라 모나르까의 영광은 잠시뿐
김영애 시인 / 詩에게 4 -가재에게<시인에게>
가장 깊은 1급수 물이 고인 너의 심연에 한 마리 가재로 살고싶다.
바다로 이어지는 강 그는 얇은 갑옷을 입었네 높이 치켜든 집게발은 세상의 급류에 짓이겨져 이제, 효력을 잃은 무기라네 작고 가벼운 몸이 일급수 물이 고인 수초 그늘에 앉아 시를 쓰네 깊이 숨어라 시인아 바다로 이어지는 강의 길 수초 많은 곳으로 숨어라 숨가쁜 강의 물결을 타다 톡, 톡, 튀어오르는 등이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 띄이지 않도록 물살에 엉키어 뼈가 깎이고 등이 휘어질수록 납작 엎드려라 네 할 일은 큰 바다로 나아가 시를 쓰는 일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놀림감이 되지 말아라 들키면 안된다. 가재야. 꼭, 꼭, 숨어라 착한 병정아
김영애 시인 / 마디가 많을수록 붉다 -구체관절인형을 위하여
손가락 발가락 붉은 마디마다 긴 눈썹을 붙인다 깨알 같은 이야기를 씹어 삼키며 슬픔은 구부려 앉힌다 손목이나 손가락 마디를 접고 목을 비틀어 사연을 듣는다 머리뚜껑을 열어 아크릴 안구로 바꾸고 밝은 세상을 보여준다 화장을 지우고 새 눈썹을 그려주고 오므린 입술을 읽어준다 기다란 기억들이 흩어지지 않게 머리띠를 해준다
구부리거나 접거나 비틀어 줄 때마다 구르는 구체를, 마찰지수를 확인하며 너는 내 사랑이라고 속삭여준다
구체적이란 얼마나 슬픈가, 슬퍼야 아름답다 제 혼자 구르지 못하는 운명 붉은 마디마다 투명하게 어린 핏줄 작은 귀에 너는 내 사랑이라고 속삭여준다 고운 뺨에 너는 내 사랑이라고 입맞춤 해준다 구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마디마다 속삭여준다 너는 내 사랑이라고, 붉디 붉은 내 사랑이라고
너의 구체성, 굴러가는 외로움 오, 마디마다 붉디 붉은 궤적이여 어른이 되지 못한 계집애여
김영애 시인 / 자가면역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그리고 詩까지도 둥글다.’
김수영이 말한다 와파린을 복용하는 나는 둥글다에 감동한다 둥근 것이 찌를 리 없고, 피 흘릴 일 없고, 내가 무사하다 약사가 나를 위협한다, 응급실로 실려 오고 싶냐고 내가, 약사의 말씀을 구부린다, 응급실보다는 시체실이 낫지요 구부린 말이 나를 찌르지 못한다 찔리지 않으려고 둥글게 구부린다
김영애 시인 / 세상 끝 정원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줍다가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듣지요 얘야,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 종달새, 지리배배 지리배배 지종종, 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저녁 해는 마루 끝에서 아른거리고 웅얼거리던 계집애가 잠이 들어요 엄마가 어디로 갔을까요 뒤뜰에 가두어 놓은 칠면조 일곱 번 변하는 늘어진 벼슬과 푸른 돌기 분꽃이 오그라들고 온기 없는 굴뚝에서 고깔모자가 굴러 떨어지죠 가슴이 커지면서 두 번째로 그 소리를 듣지요 얘야,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 머루랑 다래랑,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백척간두에 서고
물푸레나무 반짝이는 강변에 여자가 잠들어 있어요 관 속에서 매일 새롭게 태어나던 마술사의 여자 너울거리던 혀를 독사에게 물렸죠 물거품에 갇힌 강물이죠 사라진 아가미가 도마 위에서 뻐끔거리죠
오월의 나뭇잎이 나부끼는데 세 번째로 그 소리를 듣지요 얘야,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 딱따구리, 따다닥 띠리다닥 띠리딕, 부서진 나무인형의 팔이 덜렁거리고
무성하게 자라서 온 지붕을 덮은 소문들이 살랑거리죠 밤이면 마룻바닥이 울리죠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리죠 들려주는 달콤한 말들이 발효하고 시큼한 혀가 독사를 물지요 물린 독사의 똬리가 풀리고 머리와 꼬리가 하나 되어 스미어들죠
혼자 있는 계집애, 습관처럼 지어내는 이야기가 끝이 없어요 끝이 없는 이야기로 천 년을 살아내죠 물기 없는 땅에서 천 년을 살아내죠 하룻밤이면 족할 거짓말이 붉은 꽃으로 피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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