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승기 시인 / 화살나무 사랑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7. 08:00
김승기 시인 / 화살나무 사랑

김승기 시인 / 화살나무 사랑

 

 

누구를 떠난다는 것은

그의 하늘에

하나의 뭇별이 되는 것이다

 

​길 잃고 아득할 때

당신은 보았는가?

 

​하나~둘~

별들이 스러져가도

하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그 찬 별 하나

 

​사랑할 수 있는 이만이

떠날 수도 있다

 

 


 

 

김승기 시인 / 고마리

 

 

그대는 보았는가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은인성자를

 

늘 젖어있는 곳으로 몸을 낮추고

청정한 물가만 골라

이상향을 꿈꾸는

가을의 젊은 성자를 보았는가

 

진창 굴헝에서 쓰러지고 뒹굴어져도

흙 하나 묻히지 않고

가시 세우며 다시 일어서서

오직 한 곳을 바라보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다부진 얼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하찮은 세상일에는 무심한 듯한,

하얗고 붉은 미소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가

비바람불고 천둥소리 요란한 세상

피 흘리며 쓰러지는 것들

아픈 상처 지혈시켜 주던

맑은 눈빛

 

그러나 보았는가

깊은 가을하늘 속을 걸어가고 있는

피멍든 눈동자를

 

 


 

 

김승기 시인 / 단독자單獨者를 꿈꾸며

 

 

나의 배경을 조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만의 작은 길을

홀로 걷게 하소서

그 길 위에서 한껏 작아져

풀꽃들과 눈 맞추게 하시고

가슴엔 좁은 문은 없어

새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사방 뛰어놀게 하소서

길은 항상 끊어집니다

산등성이를 돌아설 때

나도 잠깐 끊어져

너무 먼 꿈을 꾸지 않게 하소서

나는 매일, 가던 길과 헤어지고

오는 길을 데리고 옵니다

내 뒤엔 발자국들이

상사화 꽃대궁처럼 피어나

외딸지는 않는 자세로

기꺼이 나를 보냅니다

혼자라는 것은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과 같이 하는 것

다가설 세상을 위해

나의 한켠을 항상

공손히 비워두게 하소서

 

-시집 <가라앉지 못한 말들>에서

 

 


 

 

김승기 시인 / 동행

 

 

나목(裸木)이

무너지듯 기댄다

옆에 있던 헐벗음이

그 무게를 온전히 받는다

 

자신도 고개 떨구고

못내 같이 기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의 상처를 핥고

 

그렇게 겨우

새살 돋은 아침

 

자신의 무게를 빼내어 절룩절룩

다시 세우는 길

 

그래그래, 뒤돌아보지 않기

자꾸 돌아보며 울지 않기

 

 


 

 

김승기 시인 / 가끔씩 죽어야 하는 남자

 

 

완전히 방전되었다

 

희락원 문을 열고 들어가

구석에 꾸겨진다

 

이미 주인 여자는 내 계획을

알고 있다

 

한 병의

깊고 차가운 혀가

구석구석

벌건 내 뇌를 핥는다

 

징그럽게도

다닥다닥 핀 능소화

지쳤다

지쳤다

지고

 

허공에 플러그를 꼽고

 

하룻밤, 나는

곱게

죽는다

 

 


 

 

김승기 시인 / 병아리풀

 

 

 화장을 한다는 건,

 자기 얼굴 위에 정성스레 편지를 쓰는 일입니다

 

 먼저 바디필링으로 각질 벗겨내고 클렌징크림으로 다시 한 번 닦아낸 다음 스킨과 에멀젼을 塗布하고 나서 그 위에 리프팅 링클세럼으로 또박또박 낱말 받아쓰기하듯 꾹꾹 눌러 쓰면 비로소 편지는 완성됩니다

 때때로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달리 하는 색조화장은 덤으로 追伸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는 봄에게로 배달됩니다

 딱딱하게 얼어버린 땅을 봄비가 부드럽게 녹여주고, 봄볕 아래 어미 따라 나들이 나온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오후, 아유, 예뻐라, 예뻐라! 여기저기 병아리발자국마다 뾰족뾰족 새싹들이 돋아나 자랍니다

 

 편지는 다시 봄에서 여름가을로 배달됩니다

 편지 읽으며 쑥쑥 자란 새싹들은 계절 따라 검은 잎새들로 짙어지고, 짙어진 검은 잎새들은 더 밝아지려는 治粧을 도와 햇살 꾹꾹 눌러 쓰는 꽃편지, 화장을 고칩니다

 높아지는 하늘 따라 노오랗고 바알갛게 꽃탑 쌓아 올립니다

 

 무릎 베고 누우면 귀 후벼주는 사랑지기의 울긋불긋 콧노래,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점점 어린아이 된다 했던가요, 병아리 어미 품 파고들듯 사랑지기의 무릎 위에서 나는 병아리 되어 콧노래 자장가삼아 스르르 잠이 듭니다

 잠 속에서 양 볼 발그레 풋풋한 꽃화장으로 수줍은 병아리풀을 만나 허물어지지 않는 사랑탑 쌓아 올리는 꿈을 꿉니다

 

*병아리풀 : 원지과의 한해살이풀.

 

 


 

 

김승기 시인 / 바닥

 

 

 내가 추락할 때는 항상 네가 있었어.

 너를 본 적은 없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만큼에서 늘 나를 받아주었어.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웠는데, 오늘 보니 너는 바로 나였어. 나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느라고 움푹 파인 곳. 나보다 먼저 겁에 질리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고, 나보다 먼저 달려갔을, 그 가파름이 기둥 되기까지, 튼튼한 마루 되기까지.

 

 그 시간을 쓰다듬네. 파인 곳 다시 아파서 자꾸만 자꾸만 쓰다듬네.

 

 


 

김승기 시인

경기도 화성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경희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역』. 신경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