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명수 시인 / 혼자 밥 먹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7. 08:00
이명수 시인 / 혼자 밥 먹다

이명수 시인 / 혼자 밥 먹다

 

 

 가을 한철 ‘자발적 유배’ 살이를 했다

 추사는 내가 기거하는 고산과 이웃한 대정 귤중옥(橘中屋)에서 9년 간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살이를 했다

 가시방석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며 추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키이스 페라지의 「혼자 밥 먹지 마라」를 읽으며 혼자 밥을 먹는다

 앞집, 옆집, 뒷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들도 혼자 밥을 먹는다

 “서쪽에서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 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 시간과 겨루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추사는 가시밥을 먹고 한기 서린 책을 읽으며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그에게 혼자 밥 먹는 일은 온축(蘊蓄)의 의식이었으리라

 추사 곁에서 배운 ‘온축’의 힘으로 시를 쓴다

 자발적 유배지에서 쓴 시가 사막에 버려진 무상 경전이 되어도 좋으리

 

*박경리의 시 「못 떠나는 배」의 한 구절

 

 


 

 

이명수 시인 / 객주리 조림*

 

 

공복空腹이 추사유적지를 돌아 용머리해안으로 내려온다

산란함은 가라앉히고 평온함으로 길을 내

모슬포 부두식당에 들어선다

 

따뜻한 공복이 생선조림을 부른다

지천의 봄꽃이 귀하듯 객주리가 귀한 인연으로 내게 온다

객주리, 어느 물길 타고 여기 와 나하고 만난 것이냐

제주 겨울 무와 감자 함께 졸인 것에 볶은 메주콩이 곁들여진다

 

이목구심耳目口心이 순해진다

공복감과 포만감 사이 객주리 한 마리가 하초를 타고 흐른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조화가 고요한 에너지가 된다

 

사시장춘四時長春,

내 몸이 늘 봄날이다

 

*객주리: 쥐치의 제주 방언.

 

 


 

 

이명수 시인 / 내 자전거사史

 

 

 내 힘으로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넘어진다

 

 2001년 삼천리 자전거를 타고 왕촌旺村 둑길을 달려 갑사甲寺까지 갔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50대 나이에도 청춘이라 여겼다

 

 2011년 제주 고산高山에 농가주택을 마련하며 왕촌의 20만 원 대 삼천리 자전거를 후배 시인에게 넘겨주었다 50대를 넘겨주고 60대 자전거로 갈아탔다 애월, 곽지해변, 한림공원을 거쳐 차귀도 앞 수월봉 노을에 이르는 데는 내 몸이 30킬로 미터를 감내해야 했다

 

 70대에 이르면 50만 원 대 자전거도 쇳덩이처럼 무거워 자전거 안장에 오르기가 겁이 난다 몇 년째 모셔두었다가 마당 풀 뽑아주는 마을 부녀회 총무에게 자전거를 그냥 내주었다 그 값으로 일 년간 마당 풀은 거저 뽑아주었다

 

 누구나 내려가는 데 더 버거운 날이 온다

 2018년 영하 17도에 이르는 혹한 속에 실내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화재의 책 『자전거 타는 CEO』를 천천히 읽었다 일흔셋 나이에 자전거로 대만 국토를 일주하기 시작해 여든 셋 나이에도 즐겨 일주를 거듭하는 세계 최대 자전거 회사 <자이언트>의 류진뱌오 회장, 나는 지금 그보다 10년이 젊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퀴를 굴리며 길을 가는 것이다

 봄이 오면 가벼운 탄소 소재 카본 자전거를 장만해 꽃 피는 성북현 자전거길을 내딛고 싶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할 것이다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때, 마음 시키는 대로, 머리가 시키는 대로, 그도 안 되면 몸이 시키는 대로 먼 길을 가야 한다

 

 세워놓고 보면 그 사이에 쑥꽃이 핀다

 

 -『시와경계』 2018-여름호

 

 


 

 

이명수 시인 / 비가悲歌

 

 

빗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네

풀밭에 밤이 와

풀잎을 덮고 있네

포도원 뜰에도 어둠은 내리고

가지들은 선 채로 어둠을 맞고 있네

 

빗속에서

조각들은 조각들로

어둠에 덮이고 있네

 

잎새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고

나는 서 있네

 

-시선집 <백수광인에게 길을 묻다>에서

 

 


 

 

이명수 시인 /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14

 

 

어리석음을 잉태한 자는

바람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우둔하고

흔들림을 몸으로 느낀 자는

눈물이 멈춰도 떨림의 끝은 없었다.

누가 이승의 술잔을 비우고 떠났을까

지금 시리도록 차가운 사랑을 안고

달빛 속으로 걸어간다.

조심스런 어리석음으로 내 딛는 발걸음

내 가슴을 관통하는 여린 사랑의 눈매로

저 황량한 떨림의 끝을 향해

아아 저승으로 넘나 든 영혼의 빛 줄기

어느 지점에서 빈 술잔으로 뒹굴고

처절하게 무너진 달빛만 껴안는다

참으로 어리석음과 떨림을 함께 풀어

그냥 삼키는 이승의 술잔이여.

 

 


 

 

이명수 시인 / 시간의 온도

 

 

쥐며느리가 돌 틈에서 기어 나온다

돌이 봄이 왔음을 알려 준 것이다

쥐며느리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추우면 검은 돌 속에 들어가 잠을 자면 된다

시간을 잊으면 잊은 만큼 길어진다

 

내가 인사동 거리를 걸을 때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

버스를 타고 시계를 보며 조바심 낼 때

시간은 절대적이다

도시의 시간은

길이와 주기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날이 추워지면 제주 빈집에 간다

빈집의 시간은 멈춰 있다

보일러 타이머를 보며 시간의 온도를 잰다

밖이 추우면 10도의 눈금에서 불이 붙는다

온도를 올려놓고 잠을 잔다

쥐며느리는 돌 틈에서, 나는 돌집에서 잔다

가끔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올레길을 걷는다

발끝이 시간의 온도를 정확히 감지한다

 

쥐며느리들이 마당을 바삐 기어 다닌다

봄이다,

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짐을 꾸린다

쥐며느리의 시간 속에서 나와

도시의 시간 속으로 날아가기 위해

 

 


 

 

이명수 시인 / 귀틀마루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어느 초가집 쪽마루가 내게 와 책상이 된

어떤 연(緣) 있으리라

 

밥을 먹다가 술을 마시다가 책을 보다가

턱을 괴고 앉아 생각을 가로세로 짜 맞추다가

 

책상이 아니라 집이다

백면서생에게 걸맞은 글 집이다

 

나무의 속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생명 압축 파일을 꺼내본다

삶이 죽음에서, 죽음이 삶에서 나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서로 보듬어 안고 맞물려 도는

이 상처의 문장(紋章)들

 

책상을 어루만지다 손끝에 거스러미가 들었다

거스러미 뽑아내고 책상을 뒤집어 들여다본다

아무 칠도 하지 않은 백골(白骨)에

몇 글자 숨어 있다

계신공구(戒愼恐懼)

누군가 주는 계(戒)

이것이 귀틀마루 앉은뱅이책상이 내게 온

본뜻인가

 

귀틀에 귀대고 졸다

문득 비문(秘文)을 듣는다

 

—시집 『바람코지에 두고 간다』(2014)에서

 

 


 

이명수 시인

1945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사대 국어교육과와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5년 월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공한지』 『흔들리는 도시에 밤이 내리고』 『등을 돌리면 그리운 날들』 『왕촌일기』 『울기 좋은 곳을 안다』. 시선집 『백수광인에게 길을 묻다』 등. 현재 현재 한국시인협회 이사, 충남시인협회 회장. 계간 《詩로 여는 세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