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숙 시인 / 허수아비의 꿈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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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숙 시인 / 허수아비의 꿈
슬픔을 먹고 사는 나는 허수아비
풀여치 울음소리 살아나는 들판에
언제나 꿈을 품었고 허기진 기다림 속에
이름 모를 풀꽃들 살아온 시간만큼 소리 없이 피어나는 날
나는 초라한 이별을 준비하여 초점 없는 눈가엔 눈물이 말라있다
박연숙 시인 / 꽃마리
우유로 금방 씻은 백옥같은 얼굴로 초록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너 ‘올랭피아’ 몸짓이냐 첫사랑의 아픔이냐 못다한 사랑의 벙어리 웃음이냐 그리움으로 하얀 점만 찍어놓고 어찌할 것이냐 꽃마리 다시 한 번 불러본다 가슴 깊이 묻어야 하는 너의 이름을 어찌해야 하느냐. -시집 <흐르는 물은 시간의 게스트하우스다>
박연숙 시인 / 검은 머리 아이에게서 빠다냄새가 난다
#1990년 10월
내 이름은 봉지, 봉지예요. 아무도 나를,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난 있죠. 사방이 미끌거려요. 나의 탯줄은 물컹거리는 어둠과 연결되어 있어요. 비닐봉지 안은 따뜻하고 편안했어요. 지의류 포자처럼 우연히 착상된 나는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그렇게 웅크리고 있어요. 폐기되어 있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못했어요. 나를 찾아주세요. 내 이름은 봉지예요.
#2005년 12월
안녕,하세요, 여,긴 제네바,에요 시간의 골목 안으로 메마른 바람. 내가 태어난?검은 비닐봉지들이 바스락거림. 허겁지겁 나를 낳고 사라진 엄마, 부레옥잠처럼 부유하다가 빠다크래커로 부서지곤 했을까.?나를 경유해간 시간에서는 언제나 빠다 냄새가 나서인데. 나,나는 오늘도 홀트의 검색창으로 부지런히 나의 어머니를 검색해 보지요. 정체모를 어둠이 자꾸만 내부로 기어듬. 생리통처럼 불안한 바람이 불어 히에로클리프, 어떤 소리도 낯선 문장들. 이해되지 않는 모국어처럼 흘러 다님. 창백하게 포장된 나를 찾아주세요. 나의 한국이름은 봉지예요.
박연숙 시인 / 불의 봉인
1. 화상은 부끄러움 기억을 잡다가 놓쳐버린 부젓가락 어린 날, 상처는 홍역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무릎께에 남아 내가 자라는 동안 함께 자라고 걸어 다녔다 나는 불에 봉인되어 있었다
2. 덕수궁 정문엔 화상의 봉인을 푸는 남자가 있다 주술사처럼 검고 흰 목소리를 쿨렁거리며 결이 고운 나무의 나이테 위에 인두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 불의 글씨는 나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며 짙고 옅은 그을음으로 나무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오래된 약속의 표지였던 나무의 전생은 깊은 어둠을 지닌 채 해서체로 꿈틀거렸다 인두가 지나가지 않은 곳은 여백일 뿐, 화상으로 기록하는 그의 생애 전부가 경전이 되고 있었다
3. 오랫동안 나의 정면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나의 화상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가장 뜨거웠던 한 순간, 그 밖은 여백이었다
박연숙 시인 / 채식주의자들이 있는 식탁풍경
방금 깎아놓은 해가 뜨고, 식탁 가장자리 갈변한 계집애들이 얼룩을 지워. 붉은 색은 식욕을 돋운다는 난센스, 사과껍질과 나란한 햇볕도 신데, 바닥에선 누구나 평등해지잖아. 식도에 묻은 과즙은 잘 닦이지 않고, 날라리 사과 알은 굴러다니다 어긋나지. 비집고 든 고요의 멀어진 머리와 꼬리가 서로를 물어뜯기도 해, 나는 입이 짧고 아직 오지 않은 기억을 씹으며 어금니를 손질하고 가끔 사족을 잘라
절룩이는 계집애들이 달아나곤 해, 뒷문 레이스커튼이 흔들리지
너를 설명하는 식도는 충분히 친절하고 숨 막힐 텐데, 검불 묻은 사과를 접시에 올려, 머리· 심장· 주먹· 눈동자· 젖가슴, 내가 먹어버린 한 쪽의 사과에 저녁이 먼저 도착하지, 이윽고 군침, 포크는 시인이므로 혀는 이미 두 갈래, 붉고 완벽한 새 사과의 기억을 디스플레이 해놓고 우리는 굶주리지, 머리와 꼬리가 없는 난센스를 반복하면서
박연숙 시인 / 엄마의 정원
1. 수술중인 엄마 몸속까지 눈발이 날리는지, 희끗희끗 머리칼 엉클어진 속으로 송이 눈 쌓이고 수술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오는 눈사람, 엄마
2. 엄마는 속 빈 것들을 잘 길렀지 찬장 속에서 어깨를 대어 주어야만 기어 올라가는. 그러나 내부에서 눈송이처럼 깃털처럼 날리는 또 올려다보면 잎새들 웃음 틈틈이 새파랗게, 갸우뚱하면, 모서리가 기울어가는 찬장 손잡이를 당기면 어깨죽지 위로 이 빠진 접시가 굴러 떨어졌지 가령, 새장속의 새들, 우리 주둥이만 뾰족해서 날아간 뒤에는 또 뒤돌아보지 않는, 귀가 틀어진 찬장처럼 텅 빈 새장 식어가는 한 줌 깃털,
3. 엄마의 발꿈치 균열에서 햇빛이 삐져나온다 파아- 파아- 갈라질 때마다 날아오르는 새떼들 우묵하게 움켜쥔 내 손바닥 안, 탁 터진다, 고요
박연숙 시인 / 보리이삭
고향의 들녘 푸른 보리 이삭들 아침부터 소근,소근 재잘대면
새벽이슬 짊어진 잎은 힘겨워 고개 숙이고 햇살 남은 방울에 말을 걸다 조용히 잠이 든다
늦은 봄 언덕을 느릿,느릿 넘어갈 때 장난기 많은 바람이 연초록 들녘을 지나 아랫마을 구경 가자고 은근슬쩍 보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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