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은 시인 / 가끔 궁금해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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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은 시인 / 가끔 궁금해
내 회색 자전거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지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마 나의 내부는 너무 뜨거워 사랑해하면서 한 계단 올라가고 지겨워하면서 한 계단 내려오지 그 계단의 회로는 호일에 감겨있어 막 피어나는 음악 같기도 하고 뜨겁게 식어버린 유리창이기도해 나의 창을 기웃거리는 휑한 슬픔들은,
화사하게 웃고 있어도 눈가엔 물기가 고여 있어 비밀의 배후를 파헤칠 수 있을까 제발 바닥보이지 않기를 기도해줘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를 찾고 있는 너 말이야 폐달을 밟고 달리는 넌 너무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통제 할 수 없는 나의 내부를 휘돌기도 하지 콱 익사시키고 싶었어,
내안의 계단과 내 밖의 계단들 틈새엔 너무 많은 모퉁이들이 있어 쿨 하게 ok 하고도 이내 돌아서기 일쑤지 아-흐 저것들을 그냥
“이봐요! 도대체 네게 무슨 짓을 한거요”
김서은 시인 / 관계 -읽히다
나는 그의 손 안에 있다 오늘도 나는 한 겹씩 벗겨지고 있다 둥글게 휘어지는 어둠을 헤치면서 그렇게 나를 밀고 간다. 그는 잠시 잠깐 나의 후견인을 자청한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내 얼굴을 감싸쥐고 그가 벽 뒤쪽으로 사라진다. 한 올 한 올 껍질들이 풀리는 소리, 발밑으로 수북하게 쌓이는 낙엽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을까 킁킁거리며,
개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집중적 소모의 방식으로 총을 쏘아댄다 그렇지만 우리는 야성의 사냥꾼은 아니다. 그가 쏜 총알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난, 나는 죽지 않았다 하여, 피 흘리지도 않았다 아침이 오고 다시 사막이 되었다 왼손에 잭나이프를 든 남자가 손바닥 위에서 잘 익은 고기를 규칙적으로 썰고 있었다.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 2015 작가세계
김서은 시인 / 바빌로니아, 붉은 정원
보글거리는 혹은 반짝거리며 내리는 눈발 아니 다섯 개의 손가락 끝에서 튕겨 나오는 바빌로니아 붉은 정원 누군가 휘파람을 부네요 건들거리며, 꼬챙이같이 마른 여자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네요 캄캄한 유리창이 흘러내리는 궁전 안으로 사람들이 빨려 드네요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햇빛에 입술들이 구르네요 구름 모자를 쓴 아이들이 달려가고 있군요, 바빌로니아 정원이 장미로 물들었어요. 누군가 휘파람을 부네요 건들거리며, 폭죽이 한송이씩 터지고 있었어요, 100송이 장미가 배달되었어요 1000개의 촛불이 한꺼번에 꺼졌어요. 반짝이는 눈발 사이로 바빌로니아가 사라지고 있었어요 붉은 정원이 마지막 발광을 뿜어내고 있었어요 혓바닥 날름거리는 붉은 정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바빌로니아 붉은 정원, 왕후의 눈썹달 속으로 하얗게 사라져버린,
김서은 시인 / 구름의 서가
이건 구름이다 밤의 페이지 속으로 겹겹이 기록되던 당신의 서가에서 오늘 이곳으로 흘러온 서로의 심장에서 익어가던 감자 한 알 은빛 포크로 찍어 올려 빈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
지금은 감자를 먹어야 할 뜨거운 시간 오래전 당신의 서가에서 파들거 리는 나비 한 마리 나에게 날아오게 한 기억이 있다 구름 문장들이 쏟아 지던 한 시절, 차가운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살벌한 연애담을 솔솔 흘려 볼까 하마터면 얼어붙은 뺨처럼 당신의 슬픔은 나의 눈물이 아니라고 말 할 뻔했었다
스크린 도어처럼 열렸다 닫히는 당신의 서가
먼 미래와 과거가 한꺼번에 몰려오듯, 사소하고 복잡한 은유들로 그득한 거기,
커다랗고 컴컴한 벽을 하염없이 두들기, 창백한 목소리들 흐르는 거기,
지루하던 사랑도 여기에서 다시 시작이야라고 기록한다
김서은 시인 / 그래 일요일
식탁을 차린다. 물색 선그라스를 끼고 식탁을 차린다. 햇빛이 없어도 씩씩하게 자라는 풀밭 둥글게 식탁을 밀고 들어온다. 그 풀밭 위에 나를 눕힌다. 내 몸이 빠져들 때까지 그러나 규칙적인 식사시간이 필요해 오늘 은 일요일 식탁 앞에 예절을 지키는 시간 아무리 수저를 휘저어도 배경 은 비린내 나는 풀밭이다. 오늘도 일요일 머리를 풀고 새들을 따라간다. 물색 선그라스를 섰으므로 피곤하지 않다. 공중을 달리던 내 발바닥도 물 풍선같이 뜨거워졌다 나는 점점 부풀어 오르며 무수한 일요일이 나를 통과한다. 오늘 우리들의 식탁은 불온하다. 꽃무늬 커튼 밀폐된 풀밭에 서 상한 냄새를 풍긴다. 한 잎 한 잎 내 혀를 허물었던 그들의 배후를 계 산하고 있다. 일요일을 넘기면 일요일이 온몸으로 나를 핥으며,
김서은 시인 / 피타고라스에게 편지를 쓰네
햇빛이 핵폭풍처럼 쏟아지던 들판을 에파스행 야간열차는 지나가고 있었지 오늘밤 엔 보름달이 뜰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어 자연을 서술하는 최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그들의 이야기 말이야 지친 여행객들 사이 황금빛 모래 바람이 불었지 난 무스림의 여자가 되고 싶었는지 몰라 흔들리고 있었지 키 작은 촛불들 위로 허스키한 선율이, 오늘밤엔 보름달이 뜰까 알아들을 수 없는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었어 계단 위에서 페르시아 고양이들이 제 꼬리를 밤새 핥고 있었지 피타고라스는 혼자 있는 걸 즐겼다는데 오늘밤엔 보름달이 뜰까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 허기를 자극하곤 했지 길거리 카페 쌉쌀한 차이향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어 문득, 성수대교를 건너 가는 허름한 구름 한 점이 생각났을까? 비가 내렸지 암갈색 머플러를 늘어트린 채 나는 피타고라스에게 편지를 쓰네 안녕, 피타고라스여 그곳은 평안하신가? 오늘밤엔 보름달이 뜰까? 나는 피타고라스에게 편지를 쓰네
*페르마.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 피타고라스, (수는 자연 만물의 서정적 근원이라 주장함)
김서은 시인 / 절벽을 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을 본 적이 있다 갈피 속을 튀어나온 눈알들이 절벽을 보고 있었다 오랜 금서를 훔쳐본 그림자들이 소용돌이치는 수평선이 손발을 흔들고 있었다 빗줄기 위에 햇살, 내 몸 속으로 잠수하는 절벽들이 빗줄기 되어 흐르고 먹색 망토 밖을 아니 절벽의 둔부가 절벽의 맨발이 햇살로 타오르는 밤, 무성한 절벽들이 무수한 절벽을 흐르고 있다 갈피마다 한 장의 절벽이 내게 왔고 내가 허공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한 컷의 배후를 생각하는
나의 기록을 배후라 하면 가능할까? 살아나지 않는 언어들이 절벽의 책장을 쥐고 있었다.
김서은 시인 / 기호에 관한 또 다른 오해
그들은 한패거리죠 한 어깨씩 한다고 할까요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눈자위를 번뜩이며 무엇을 찾는지도, 골목어귀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기도 하고 바람의 끝자락을 붙잡기도 하지요 그들은 마구 뒤 엉켜 있는 듯 보이지만 혼자서도 혼자 놀기에 진수를 보이죠 시도 때도 없이 펀치를 날리면서 잠깐씩 무표정했다가는 단순하게 맞침표를 찍기도 해요 세 번째 문장 끝에서 오랫동안 눈물을 글썽이던 까닭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디까지나 우리는 사적인 관계이니까요
패거리들이 내 손발을 묶어놓으려 했어요 온갖 것들로 널브러진 내안과 밖은 너무 복잡했으니까요 처음이자 맨 나중 인사법을 늘 중얼거리고 있었답니다 한 때는 패거리들과 뒤엉켜 허공에서 허공을 연결하는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 몸이라고 생각 했어요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나 오물거리는 입술을 어디에 숨겨야 하는 걸까요 번번이 그 패거리들을 지겨워했지만 사로잡히길 원한적도 있어요 기우뚱 쏟아지는 말의 꼬리들을 어떻게 붙잡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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