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기 시인 / 틈에 대하여 외 6편
|
양진기 시인 / 틈에 대하여
작은 틈도 내면 안 된다고, 틈을 보이면 비집고 들어온다고, 빈틈없이 야무져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었지.
하지만 틈이 없으면 금이 가지. 틈이 없는 모든 것들은 갈라져 금이 가. 타일과 타일 사이, 도로와 도로의 간격, 경계와 경계의 마디, 정색과 엄숙의 순간, 틈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어.
틈이 없다면, 돌 틈 사이로 지절대는 물의 수다를 들을 수 없고, 창문 틈으로 쏟아져 온몸을 핥는 햇살도 없어. 콘크리트 틈에서 돋아난 푸른 생명도 볼 수 없어. 밀어蜜語가 들어갈 틈이 없으니 연애의 시작도 없지.
허술한 틈이 있어야 새들도 둥지를 짓지. 사랑도 기웃거리지. 틈을 보여줘, 다가갈 수 있도록.
양진기 시인 / 나팔꽃
세탁소에서 교복 밑단을 늘려 만든 나팔바지 입고 펄럭이던 친구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지 담뱃진에 절어 찐득해진 친구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다녔지 군대 가서 기상나팔, 취침나팔을 불었다는데 어느 날 지뢰를 밟아 산산이 부서졌네
나팔을 꼭 쥐고 아무렇게나 흙에 묻혀 캄캄한 땅속에서 나팔을 분다 가만히 땅바닥에 귀를 대면 구슬픈 취침나팔 소리가 들린다
태양이 땅속까지 스며든 여름날 그는 푸른 팔을 공중으로 뻗어 나팔을 분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어 불자 붉은 나팔, 보랏빛 나팔 소리가 피어난다 나팔 속에 환한 전등을 켜고 어두웠던 땅속의 음표들을 공중으로 날린다
해가 중천에 뜨고 지상에서 허락된 시간이 지나자 그는 나팔 속에 들어가 웅크려 잠든다
양진기 시인 / 한남동 산15번지
꼭대기의 교회 첨탑이 하늘의 말씀을 수신한다 북적대던 도깨비시장은 인적이 끊겼다 버려진 좌판은 먼지가 더께를 이루고 파라솔에 덧댄 비닐들이 펄럭인다
계단 아래 골목 그 아래 계단 쪼그려 앉아 별놈 별낮* 둥근 딱지를 뒤집으며 세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방구를 외치며 술래를 피해 달음질치던 꼬마들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계간 '애지' 여름호에서
양진기 시인 / 신전의 몰락
허공에 머리를 조아린다. 편파적으로 공평무사한 허공을 섬기며 살점이 찢어지고 가족은 흩어지고 종족은 몰사한다. 깨진 기와로 벅벅 긁는다. 사소하게 격노한 허공은 두두두 외적을 몰고 와 아침저녁으로 영역을 에워싸 초토화시킨 다. 바그다드, 팔레스타인, 카슈미르, 다마스쿠스에서 아기 의 팔다리가 흩어진다. 소녀의 가랑이 찢겨진다. 없는 허공 을 어디에나 있다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 검은 입속에 서 축복과 저주의 말이 튀어나온다. 절도와 간음과 살육이 번성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통한 자는 끝까지 애통하다. 세치 혀가 주름진 뇌에 달라 붙어 환상이 허공을 가공한다. 근엄한 검은 옷들이 수금을 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반역을 한다. 프로레슬링 이 번성하던 시대도 끝장났다. 첨탑도 금이 갔다. 끝났다.
양진기 시인 / 원 나잇 스탠드
사랑은 테크닉이야. 테크노 음악에 맞춰 관절을 꺾는 기술, 싸이키 조명 아래 싸이키, 에로스를 의심하면 안 돼. 테크노 다음은 블루스지. 블루스 연주자는 등에서 허리로, 엉덩이로 미끄러지는 물렁한 건반을 연주하고 있어. 알면서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코끼리 아저씨가 눈 먼 여자를 안고 스텝을 밟고 있어.
연주를 멈추면 끝나는 사랑, 한 옥타브씩 높여주지 않으면 느슨해지는 사랑, 스텝이 꼬여 비틀겨리는 사랑, 눈이 부셔 캄캄해지는 사랑, 동이 트면 어두워지는 사랑, 자고 나면 사라지는 사랑, 사랑이 끝나면 무엇이 오나.
날개를 말린 후 일제히 날아올라 군무를 추는 하루살이 떼.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내일은 오지 않아. 음악이 끝나면 하루치의 생은 증발하지. 네 짝은 어디 있니, 자정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블루스를. 전력을 다하여 혼인비행에 골몰하는 하루살이 떼.
양진기 시인 / 족가足家
횟집이 망한 자리 족발집 개업했다. 족가 개업축하 화분이 도열해 손님을 맞는다 돈나무에 매달린 리본 하나 돈 세다 잠드소서, 족가 돈豚으로 돈 벌어 돈 세다 죽으라구 악담이 드높게 펄럭이는 세상. 족가 댕강 잘린 발들의 무덤 허기진 발들이 걸어 들어와 돈의 발을 주문하는 곳 돼지 정강이뼈를 핥으며 오늘 밤 돼지꿈이나 꾸어볼까 목숨과 돈을 바꾸는 세상, 족가
-시집 <신전의 몰락>에서
양진기 시인 / 빗살무늬 그리기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빗살무늬를 그린다 바람 불어 사선으로 내리는 너를 새겨 넣는다 빗살무늬를 자꾸 그리다보면 비에 젖어 걸어가는 한 남자가 보이고 긴 머리채를 사선으로 빗질하는 여인도 보인다 슬픈 사연이 모락모락 돋아 오른다
신석기의 비를 아직도 내가 맞는다 비가 내릴 때마다 먹을 것을 걱정하고 움집으로 스며든 빗물에 웅크려 떨고 있는 내가 보인다 흠뻑 젖은 마음으로 불면의 밤을 뒤척이는 사내가 새겨져 있다
빗속을 차르르 차르르 구르는 자전거를 타고 빗살을 동그랗게 말아 시간을 구른다 어느 순간 바람이 고개를 돌리자 오른쪽에서 그어대던 빗살이 왼쪽으로 체위를 바꾼다 슬픔의 방향이 새롭게 새겨진다
빗줄기를 타고 피었다 지는 꽃의 최후를 빗살에 새겨 넣는다 한 생애를 빗살 안에 봉인한다
-시집 <신전의 몰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