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철훈 시인 / 시인 죽이기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8. 08:00
정철훈 시인 / 시인 죽이기

정철훈 시인 / 시인 죽이기

 

 

내 애인은 시인이다

요즘 들어 아내는 부쩍

나를 의심하는 눈치다

뻑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밤샘 폭음의 아스라한 흔적 뒤에는

늘 애인이 있기 마련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애인을 버리지 않으면 갈라설 수밖에 없다

마지막 경고다

아내가 내 목에 비수를 들이밀 때

나는 애인을 부정한다

그런 게 어디 있겠느냐

내 주제에 애인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애인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그러면 아내는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한다

애인 따위는 잊으라

난 평범한 남편을 원할 뿐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지만

내가 애인을 사랑하기에

원고지 칸칸을 메우듯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내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단 하나

애인을 사랑할수록

아내를 철저히 속여야 한다

내가 애인을 사랑할수록

내게 애인은 없다

어젯밤도 애인의 귓볼을 물고 뜯으며

길고도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아내와는 갈라설 수 없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건대

내가 살 길은 시를 죽이는 쪽이다

나를 죽이는 쪽이다

 

 


 

 

정철훈 시인 / 근로자의 날

 

 

오늘은 살짝 맛이 가도 좋을 것이다

바람에 뽕끼가 실려 오는 것이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무릎 털이 보일 만큼

바지 한쪽을 잘라내

반바지 차림으로 생이 기울어지는 한때를 갖고 싶은 것이다

허수아비로, 허수아비로 서 있고 싶은 것이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

도심이 텅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근로는 자족한다

인간이 지워지고 없는 근로

 

그러면 공원 화단의 철쭉에 붙어 있던 개미가

발을 타고 기어오를 때

그 다족생물의 움직임이 간지러워

허수아비는 한 번씩 꿈틀대는 것이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망각

가끔 나비가 앉았다 가는 망각

벌어질 입술 첨 방울이 떨어지는 망각

 

허수아비의 직립으로 보면

세상은 살짝 기울어져 있다

허수아비의 의지를 분석할 수 없듯

나는 허수아비로 기울어진 때

인간의 들끓음을 짓누른다

 

 


 

 

정철훈 시인 /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러시아식 이름에 부칭(父稱)이란 게 있다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계질서로 드러내는 작명법

이른바 오뜨쩨스뜨바

나라는 존재가 아버지가 뿌린 한 종지 정액에서 시작되었다는 부계사회의 권위가 이름 위에 얹혀 있다

 

그 작명법의 유래를 나는 모른다

모른다 했거늘 누런 황색 거죽을 입은 내 이름의 작명법 역시 러시아식 부계질서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 보기에 러시아는 겉으로만 부계사회일 뿐 속알맹이는 모계의 품안에서 자유로웠다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갔으므로

국토의 정맥이라 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주역은 여자들이었다

영하 50도 속에서 철도를 고정시키기 위해 침목에 망치질하는 어머니들의 옛 사진을 본 적 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철도를 건설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태어났으니

여자들에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그저 씨 뿌리는 기계였던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가는 남편을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새댁은

동네 여성 강자(强者)에게 뺨을 맞았다

 

남자 같은 건 버려라

남자는 쓰레기다

남자는 미완성이다

남자의 아랫도리에 달린 종은 눈속임이다

남자는 그럴듯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인생은 여자들의 음습하게 갈라진 틈새에서 싹트는 범

여자들이 철도를 건설하면 그건 남자를 건설하는 것이다

 

새댁은 눈물을 훔치며 강자를 따라나선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이들은 감자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의 귀가 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했다

 

한 존재의 작명법에 대한 러시아적 모순은 지상의 보편으로 자리잡았고 황색 거죽의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두렵다는 거다

내가 남자라는 게

내가 누구의 아버지라는 게

 

이름은 모순된 문명이다

내가 이름을 버려야 할 이유가 모성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버지도 부칭도 아니다

나는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내가 누구의 자식인 동시에 누구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어색하다

 

하나이면서 둘인 이 정체성은 두 줄기 철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

암컷과 수컷의 기능이 무수한 차별을 양산하는 구조

나는 그 구조 속에서 태어났기에 그 구조를 부정하는 것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부칭에 섞여 있는 모순에 반응하는 것

나는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쓴다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정철훈 시인 / 선거에 대하여

 

 

누런 아교풀이 그들의 얼굴 밑에서

벽을 타고 흐르다 굳어 있다

얼굴과 기호들은 떨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는 종이의 질과

오프셋 인쇄기술의 개가일까

초등학교의 낮은 담벼락을 따라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금붕어 봉지를 들고

지나간다 붕어는 느리게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확대경 같은 비닐에 큰 입을 대고 뻐끔거린다

금붕어는 산소가 모자라 빨갛다

남자의 기호는 비닐일까 굼붕어일까 漁頭일까

남자의 얼굴도 산소가 없다

침을 뱉는다 담벼락 밑으로 흐르다 만 누런 아교풀과

그 아래 들러붙은 침은 느낌이다

남자는 기호 1번에서 기호 7번 밑을 느리게 걷는다

붕어처럼 기호로 작동되는 정치벽보처럼

그의 이름과 기호는 비닐 안의 정치처럼

산소가 없다

일곱 장의 벽보들은 한결같이 눈이 없다

누군가 그들의 눈을 짖어버렸다

벽보는 얼굴이 아니라 하얀 백상자임이 밝혀졌다

이젠 기호만이 온전할 뿐이다

1에서 7까지 그들은 모두 아마추어처럼 웃는다

남자가 선택한 기호의 역대 전적이

그의 민주주의와 그의 산소량을 결정한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의 금붕어가 질식하고 있다

이번에도 1에서 7까지가 그의 산소량을 담보한다

합동연설회 연단에 올라온 일곱 난쟁이들의 성대도

산소 부족으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정철훈 시인 / 모독

 

 

54년 말띠 사내의 얼굴 살이 내리고 있다

며칠 안 본 사이 눈은 퀭하고 피부는 축 처져 있다

IMF 위기 때 환율 폭탄을 맞아 사업은 망하고

아파트를 급매로 내놓은 지 십여 년

 

요즘 강남에선 강북을 북한이라고 부른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사내

재정부장관의 사진을 칼로 그어버리고 싶다는 사내

국가의 그늘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제1열에서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달려온 사내

윤기 자르르한 경주마에서 하루아침에 수레도 끌지 못하는 비루먹은 신세

밤마다 치가 떨려 아침이면 아구가 뻐근하다는 사내

가을은 가을이어서 막걸리집 앞 노랑은행잎이 아름답지 않냐고 했더니

썩은 오줌 냄새만 나는 헛것이라고 독기를 뿜어대는 사내

 

지난 대선 때 찍은 투표용지를 돈이라도 주고 되찾아오고 싶다며 울분을 삭히느라 살이 내리고 있다.

뼈가 녹고 형체 없는 마음도 녹아내린다는 사내의 말에 티끌만큼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며칠 전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완도 어디쯤 가두리 양식장 잡부밖에 써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키가 한 뼘이나 줄어든 사내 행나무 위로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루하게 흘러가는 4분의 4박자 애국가를 바꿔서라도 이 슬픈 사내를 춤추게 할 곡조는 없는가

걸을 때마다 말굽 모양의 증오를 찍어대는 사내의 울분을 삭힐 노래는 없는가

 

이용악의 하늘은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렀다는데

애초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어쩌고 하는 애국가의 첫 소절에서부터 무슨 전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시비를 걸 어보고 싶은 날이다

 

 


 

 

정철훈 시인 / 까자끼 자장가를 들으며

 

 

자장가는 왜 이리 슬플까

그건 꿈에서 왔기 때문이지

이루지 못한 꿈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전생에서 오는 것

세상이란 슬픈 곳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지

태어나기 전부터 알기 때문이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태반에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

바늘이 운명의 표면을 긁을 때 나는 소리

하늘의 별도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소멸한다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아기의 귀에 수면의 묘약을 흘려보내며 말하지

세상 같은 거 잊으라 잊으라

지구는 회전하고

세상의 모든 자장가는 그 회전축을 따라 돌고 있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정철훈 시인 / 외면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종이상자로 관을 만들고 헝겊 쪼가리를 깔아준 건 딸이었다

 자정 즈음 차를 몰고 나가 찾아낸 공터는 얼어 있었고 인근 공사장에서 곡괭이를 가져온 건 아들이었다

 

 언 땅이 두 자 남짓 차가운 품을 내어주었을 때 나는 내가 묻힐 구덩이를 본 것처럼 몸서리가 쳐졌다

 

 개털이 날린다느니, 개털이 허파에 박힌다느니, 늘 불만 가득한 나는 누구의 진심에도 가 닿지 못했다 내가 외면했던 것들이 그리 워진다

 

 아오키는 사리지고 없는 나라에 가서도 컹컹 짓고 있을 것이다

 인간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컹컹 짖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세상의 모든 개털이 날릴 것만 같다

 

 


 

 

정철훈 시인 /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죽은 병사들이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러시아 가요 「주라블리」의 가사는 진부하다

죽은 자는 죽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

주라블리의 하얀 날개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선에서 불똥이 튈 때 어머니는 군화를 신듯 두꺼운 양말을 조여신고 일어선다

어머니의 일생은 이미 패배한 것이어서 자식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앉지도 눕지도 않을 것이다

 

흔히 죽은 자의 영혼은 날아오른다고 하지만 문제는 대지에 남은 육신이다

뼈와 살과 흥건한 핏물.....

자작나무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뿌리로 휘감으며 자란다

 

자작나무 숲에 들어가보면 안다

잘박이는 낙엽을 밟는 순간 물컹하게 풍기는 피비린내

하늘은 어둡고 자작나무 껍질은 은박지처럼 반짝이는데 거기 맺혀 있는 건 어머니의 눈물

 

체첸에 파병된 아들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어머니회원들이 모스끄바에서 그로즈니까지 도보시위를 벌일 때 그들의 손에는 흰 깃발 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자작나무 밑에 시체가 썩고 있다고

 

가슴의 붉은 리본은 아들의 전사통지

산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어머니들의 걸음은 이미 총알 빗발치는 전장을 밟는다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머니의 얼굴엔 수염이 자란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 것이다

적군은 앳된 얼굴의 체첸 전사가 아니라 그 병사의 어머니며 어머니의 심장이다

 

언 땅으로 눈발은 흩날리는데 거기 반쯤 묻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고 내뻗친 시신의 손목

어머니들은 얼어붙은 손목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라블리들이 떼지어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저 진부한 노래가

왜 어머니의 심장 속에서 흘러나오는지를

 

 


 

정철훈 시인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국민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러시아 외무성 외교과학원에서 역사학 박사 수료.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수필집 및 전기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소련은 살아 있다』 『김알렉산드라 평전』 『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