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시인 / 양파를 벗기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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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열 시인 / 양파를 벗기며
양파 속에는 흰나비가 살고 있어 한 꺼풀 한 꺼풀씩 날개를 펼치듯 벗기면 나비가 훤훤 날아오를 것만 같았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나는 허둥대고 껍질을 벗기는 동안 양쪽 날개를 잘못 건드려 바닥 어느 구석으로 떨어진 것은 아닐까 두리번거리고 눈을 비비는 사이 몰래 달아나버린 것은 아닐까 슬며시 어디로 날아간 걸까 텅 빈 그 섭섭함 나에게 슬픔이 생겨났다면 아마 이곳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나비는 분명 이곳에서 깨어나 창밖을 통해 햇빛 속으로 날아갔을 것만 같은데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러지 않았다면 양파를 벗기는 동안 자꾸만 나는 빛 부신 누군가와 헤어진 것처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던 것일까
-시집 『콜라병 속에는 개구리가 산다』,《고요아침》
김근열 시인 / 나만의 지휘자
그녀의 도마는 그녀만 연주할 수 있는 악기다 수많은 현絃과 건반을 가지고 있다
어제는 등 푸른 고등어가 도마 위에서 바리톤처럼 튀어 올랐고 오늘은 싱싱한 미나리가 색소폰처럼 서걱서걱 연주될 때
오,
오금을 저리게 하는 그녀의 음악 그녀는 내 입술을 연주하는 지휘자
도마 위에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음식音食을 빚어내는 그녀는 위대한 연주자 나만의 지휘자 -시집 『고요는 어떤 방인가』(2023, 시산맥사)에서
김근열 시인 / 목련이 피다
밤새도록 시를 쓰다 사유도 없고 묘사도 없는 여러 단어와 문장들을 창밖을 내다보며 가래침 뱉듯 수십 번도 더 뱉어내고 뱉어내었다 떠난 뭉치들이 이웃집 목련나무에 떡하니 걸려있는 것을 아침 출근길에 나는 보고 말았다 어젯밤 밖으로 뭉개어 던져 버린 시어詩語가 내 흰 원고지 뭉치 속에서 피지 못한 은유와 묘사가 목련나무 가지에 꽃봉오리 되어 슬며시 펼쳐지고 있는 것을 시인이 완성하지 못한 비유를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자기만의 환유를 속삭여주고 갔는지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달빛으로 은은한 묘사를 홀리고 갔는지 아니면 대지의 신이 적당한 울림을 들려주었는지 내다 버린 내 단어가 뱉어버린 내 문장이 목련나무에서 詩가 되어 한 잎 한 잎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시집 『고요는 어떤 방인가』에서
김근열 시인 / 뿌리
6 · 25동란 아주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던 그 처절한 상황을 회상하며 전우를 직접 초연硝煙과 묻었다는 반백의 노인 눈시울 따라 찾아온 도솔산 중턱 그 험준한 중턱에 서넛 평 남짓 흙구덩이 파고 더듬으며 며칠째 쭈그리고 앉아 뼈마다가 반쯤 드러난 바닥을 솔질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오랫동안 잠잠하던 마음속 깊은 밑바닥도 출렁이게 하는 희미한 바람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로 누워 있거나 뒤엉켜 드러나는 뼈마디들 곁뿌리 같아 보이는 손가락뼈 마디마디는 그리운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다하지 못한 말없음표 같았습니다 쑥부쟁이 하나 피우지 못했을 마디마디 곁에 놋숟가락 하나 기억의 편린처럼 녹이 붉게 피어 있었습니다 붓끝을 타고 눈으로 몰려드는 붉은 꽃잎에 내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어 갔습니다 반세기 동안 형상도 없이 길을 잃고 어둡고 습한 곳을 헤매고 다녔을 누구의 영혼이었을까 붓질하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총탄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듯 매운바람이 불어댔습니다 서로의 몸 완강히 끌어안은 듯 분리된 뼈 사이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듯 드러난 고요한 턱뼈에는 차마 그 순간은 귀가 먹먹해져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시집 『콜라병 속에는 개구리가 산다』 에서
김근열 시인 / 詩집 속을 걷다
군하리 골목길은 내 몸의 실핏줄과 같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길은 특히 좁아 걷다보면 얼기설기한 길이 꼭 모세혈관 같습니다 이웃집 승민이네 옆길을 지날 때면 텃밭에서 기어 나온 호박넝쿨을 지렁이 밟듯이 질겅질겅 밟기도 합니다 옛 목욕탕 집 장독대를 지나면 경로당 앞 노인들의 푸른 무르팍을 스쳐 가기도합니다 비가 내리면 배수로가 되어버리는 골목 봉숭아꽃과 깻잎이 함께 흔들리는 길목 한 사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에 올라서면 영철이 할머니가 꽃 대신 화분에 고추를 심어놓고 굴뚝 곁에 LPG통을 두고 같이 사는 곳
서연이네 감나무는 늙은 호박을 석양처럼 매달고 있어 저녁 퇴근길은 어스름 골목을 걷고 있지만 실상은 환한 詩집 속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김근열 시인 / 이발
머리를 깎는다 꼭대기 비탈진 검은 대지를 덜덜덜 바리깡으로 트렉터 굴리듯 경작하다보면 오래 묵혔던, 굳어있던 고집들이 흙덩이들이 보들보들 해지며 거울 앞에서 행자옷을 입은 듯 경건해진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사각사각 적멸보궁 계단을 오르듯 조심스럽게 다듬는 가위질 소리 들으면서 우리네 마음도 조금은 달라지고도 싶었을 것이다 내 오늘도 한동안 황무지 너른 밭 한쪽 언저리에 또다시 웃자라난 아집과 시기지심을 넓고 환한 거울속에 들어앉아 싹둑 싹둑 잘라댄다
김근열 시인 / 반짝반짝 구둣발 소리
아버지는 오늘도 별을 건너고 계십니다 밤하늘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아버지 모습,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징검돌을 총총 딛고 가듯 징검별을 건너는 당신의 구둣발은 반짝거려 어디쯤 걷고 계시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이제는 가물거려 조바심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아도 반짝이는 구두만보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단할 때면 군하리 뒷산 풀밭에 벌러덩 누워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반짝이는 아버지구두는 어디쯤 오고 계시는지 별을 세며 기다립니다 깜박 조는 사이 마을 저 멀리 지나쳐 사라지는 별빛을 보면 한없이 소리쳐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어쩔 땐 우리 집 옥상 가까이에 반짝반짝 낮게 걷고 계시면 눈시울이 붉어져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손짓을 보내곤 합니다
걸음걸이를 보면 아무래도 에둘러 오시는 듯 이곳에 당도하시려면 내 평생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먼저 마중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건넌 저 별자리는 되돌아오기 힘든 미로 같은 징검다리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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