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 시인 / 심전도 검사장에서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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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시인 / 심전도 검사장에서
물오리가 거센 물결에 우아한 자태로 떠있는 것은 수면 아래 물갈퀴가 힘껏 물을 젓고 있기 때문
심전도 검사장에서 얼핏 접한 동계動悸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심장은 몸의 한 복판 베이스캠프에서 불철주야 박동으로 긍정肯定마인드 메시지를 송신하고
쿵 쾅 쿵 쾅 활화산의 들끓는 마그마 이미지로 맥을 촉진하고 있어
고정애 시인 / 교감
구름이 언제 마음의 문을 함부로 열어놓던가 아니야 아니야 도리질치며 봇짐을 지어 산 넘어 바다 건너 넓은 들판 모두 지나 바람타고 이리저리 헤메며 떠돌다가 때다 싶으면 안테나가 재바르게 감을 잡아 일촉즉발 리모컨이 작동한다 좌우로 창을 열어 가슴 속 차곡차곡 지녔던 봇짐 매듭 풀어 아낌없이 쏟아붓고는
언제 그랬더냐 그런 적이 있었더냐 홀가분한 차림으로 자취 없이 가뭇없이 떠나버리고 마는 이의 귀한 선물 이 한바가지 물이여 詩의 은총이여!
고정애 시인 / 일곱가지 현을 위한 아다지오
그 속에는 깆가지 물건들이 가지대로 나뉘어 담겨 있다
담는 일과 꺼내는 일을 다스리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어제는 노여움에 휩쓸렸다 시퍼런 바닷물에 가라앉아 흔들렸다 그제는 기쁨에 들떴고 연분홍 복사빛 생기에 차 있었다 단 하룻만에 아니 매 순간 바뀌며 물드리는 느낌의 빛깔
노여움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 제가끔 서로 다른 일곱 가지 색채가 나뉘어 담긴 상자가 있나보다 마음 속 어디엔가 툭 건드리면 열려서 쏟아지는 느낌이 든 상자들이 수북이 쌓여 있나보다.
고정애 시인 / 대조對照
광복 후1년 쯤 지났을까 여자중학교1학년 교실은 한 참 국어 수업 중.
가시리 가시리 잇고 나난 버리고 가시리 있고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선생님 따라 낭랑한 목소리로 고려가요를 외고 있는데
학교 울 밖에서는 신탁통치 찬성! 신탁통치 찬성!
찬탁하는 선배와 교우들이 수업을 팽개치고 격앙激昻한 어른들 뒤를 따라 깃발 높이 들고 행진을 한다.
고정애 시인 / Delete, Delete
PC에서 제 역할 마친 문서들은 Delete, Delete
전화번호부에서 카톡에서 친구와 이웃,먼 친척들 가물가물하면서 소원해진 이름들 Delete, Delete
티비,티비받침,장식장 의자..... 실속 없이 먼지 앉는 세간들과
마음속 오욕五慾중 호랑심虎狼之心견물생심見物生心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
여분餘分의 항목들은 모두 모두 Delete, Delete
고정애 시인 / 흑백 소묘素描
아버지 우리가 잘못 했어요 그렇게 용서를 빌었어야지
왜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벌을 섰었지
아득한 옛날 우리 자매 어려서 목욕 용품을 두고 온 벌로 문밖에 우두커니 서있어야 했는데
아버지 우리가 잘못 했어요
그렇게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래 앞으로 조심하거라
젊었던 아버지 웃으시면서 두 살 터울 두 딸을 집안으로 쪼르르 들였을 텐데
고정애 시인 / 병상 일기
5월14일 경마경기장 레이스에서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갑자기 발이 꼬여 쓰러지는 경주마처럼
매일을 차질 없이 일정을 소화하다가 아차! 일순에 발을 헛딛고 63키로 체중이 오른쪽으로 부딪치며 쓰러졌다
구급차로 입원. 오른 손목 골절,오른 다리 치골에 금 진단서에는 전치7주라고 적혀 있었다.
계절의 여왕 5월 중순에 해야 할 일 첩첩 쌓여 있는데 보행보조기에 매달린 채 2개월의 괴로운 치료기간!
누구를 원망하랴 나의 오만과 부주의가 원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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