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순위 시인 / 나의 부재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8. 08:00
허순위 시인 / 나의 부재

허순위 시인 / 나의 부재

 

 

 퇴근 후 험한 발바닥을 더운 물로 씻고 7년 자췻방에 업드려 울었더니 등에서 먼지뭉치가 따라 울었다 새털구름을 따라서 포플러나 무를 따라서 죽 걸어왔더니 편지뭉치 같고 먼지뭉치 같이 마음이 뭉쳐 사랑이 빈 자리 무섭구나야 잿 속을 뒤져도 아무 것도 아무 것 도 없는 가엾은.

 

 


 

 

허순위 시인 / 백년시장 2

 

 

바하의 칸타타 듣다가 시장에 간다.

말라붙은 표고버섯이 때맞춰 떨어진 욕망 같아

과일전 옆, 꽃집 옆, 신발가게 옆

건어물집 지나면 노점의 천막들 펄럭거리는

여긴 얼핏 주저앉으면 자리가 될 듯

더러는 사람도 언젠가는 시장이 되지 않으랴?

컬컬한 목소리 그늘을 머리 이고 웃어본다. 콩콩콩콩

청춘의 죄는 시장에 내다 팔리려나 보다.

늘 가설무대 같던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행복을 빌며 나는 클레멘타인으로 방생되는데

왜 죽은 물고기 닮았는가

 

그는 바하 곁에서 기도라도 하겠지만

온갖 잡동사니 딸려드는 현철의 노래가 내 삶을, 더 원하는, 지금,

 

 


 

 

허순위 시인 / 백년시장 3

 

 

지며 무섭게 붉어가는 해를 본

하루 저녁은

신장시장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좌판에 놓인 희고 둥근 무우덩이랑

배추 몇 포기

싱싱하게도 단단해 보여 사들고

집에 와 칼로, 베어보니 바람들고 한창, 흥,

벌써 썩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도

찬송가도 낡았다.

 

눈물만은 눈물 속에 잘 담아 두어야겠다.

 

 


 

 

허순위 시인 / 수술

 

 

안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다시 또

밖이 안으로 집어넣어지는 동안

마스크를 쓰고 가운을 입은 몇몇이 흘낏 엿보았다.

뱃속으로 시든 나뭇잎들같이 쏟아져 나온 검붉은 내장들

산소마스크를 덮어쓴 채 캄캄한 동굴 속에서

그는 싸우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다.

마취 때문에, 그러나 어떤 선한, 메스를 갖다대면

시간이 순간처럼 응집되리만큼, 강렬한

통증 없는 감각만이 그의 기억에 불꽃으로 맺혀 있다.

어떤 부정과 어떤 긍정이, 혹은 그 안의 어떤 누가

사물이 되고 시퍼런 메스가 되어

그의 축축하고 쓸쓸한 배를 주욱, 가른다 해도

삶은 한번 출렁일 뿐, 유유한 물결로 흘러갈 것이다.

어제와 오늘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지?

수술이 끝난 후 약과 간호로 그는 재조립되고 있다.

자기의 삶조차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표정으로

내가, 왜, 여길……오, 그렇지, 터진 맹장? 혹은

어떤 검은 종양이? 하면서

누군가 설명해 주기까진 결코 알 수 없는 과정을 끼고 누워

어느새 몸에 생겨난 감각 무딘 부분을 더듬으며,

얼어붙은 죽음을 삶 속에 끌어다 붙였다.

 

 


 

 

허순위 시인 / 달팽이

 

 

상추 천 원어치에 딸려 온 달팽이

하루 종일 아이들의 유리병 주둥이를 돈다

둘러앉은 눈 여섯 개가 신기한 양 구경하는

유리시장 속 눅눅한 생명이다

사과 껍질도 찢어진 풀잎쪽도 없어

쉴 자리도 일자리도 없는 달팽이

유리 주둥이 그 빙판길을,

뼈없는 하류의 몸이 고난대로 제 몸을 만든다

 

 


 

 

허순위 시인 / 붉은 포도를 머리에 인 여자들

 

 

 그러고도 고즈넉하고 조용한 더욱 밤이 되었을 때 남천에는 동두렷이 달이 떠 오르고 달 속에서 수 천 줄기 버드나무 실가지들이 뻗어져내려 오는데 그것은 노란 실비 같았는데 실가지를 타고 내리던 두꺼비떼는 간데없고 버드나무 가지들 곰실곰실 흙을 밀고 올라 온 포도나무 연한 덩굴에 감겨 아직은 어두운 공기를 헤치고 사람들 사이로 점점 흘러가는 포도밭 물살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달의 터진 중심으로부터 희고 긴 손가락이 빠져 나와서 포도나무 잎사귀 찬 허공에 대고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고 글씨를 쓸 때 무덤에서 들판에서 바다에서 촛불에서 여자들은 시든 수세미 같은 자궁을 머리에 이고 차례로 일어나서 포도덩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인 자궁들은 또 어느새 바알간 포도송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포도밭을 붉게 붉게 한 알씩 물들여가는 동안이 삶이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비 갠 뒤 불안한 물웅덩이에 비친 달은 또 어느새 희고 긴 손가락에 찔린만큼 이즈러져 가고 여자들을 따라 나는 포도밭에 서 있었습니다 햇볕이 여자들의 머리에서 붉은 송이를 따 가며 그 자리마다 검붉은 햇볕의 후손들을 한 웅큼씩 수북히 담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사이, 천지가 물살, 물살로 출렁거리며 또 빛살의 파도가 요동치는 흐름 속에서 빛바다는 영원이라는 말을 토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허순위 시인 / 숨

 

 

저 얼음은 캄캄한 돌의 눈물일까요

무엇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공포의 하얀 한숨이 새고요

딱딱한 냉동실벽에 천장에

으스스스 붙어있네요

만약 투명한 저 결정의 속에

뭐, 혹시 갇힌 게 있다면

가령 투명한 백합이나 새가 있다면

얼음은 물의 상처일까요

고등어를 얼리는 건

고등어를 보존하기 위해서라지만

그저 얼음이란 지독한 존재의 슬픔 같네요

얼음을 떼내어서, 들어올려서

양지쪽에 김같이 내다말리고 싶네요

 

 


 

 

허순위 시인 / 너의 자유는 부채처럼 내 옆구리에서

 

 

그것은 집·밥·옷처럼

눈물과 sex처럼

네가 내 가슴에 넣어준 큰

나뭇잎사귀처럼

절대희망처럼

꽃처럼

한숨처럼

불타는 나의 옆구리에서

활짝 펼쳐진

성 금요일 저녁으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는 망명길처럼

 

 


 

허순위 시인

1955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대 지구과학과 수료. 대한신학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4년 <현대시학>에 '산백일홍'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90년 무크지 <90년대 시>로 등단. 첫시집 <말라가는 희망> <포도인 아이> <소금집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