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 시인 / 버드나무 선창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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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시인 / 버드나무 선창
창문을 열면 바다만이 맹렬했다 오직 바다만이 간절했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아이들은 줄지어 선창을 달려가고 유리창마다 달라붙은 눅눅한 어항의 불빛들 휴일을 함께 지낸 사내들을 보내며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둘러 화장을 고쳤다 막막한 봄밤 소리치면 툭, 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수평선 숨죽여 뱃고동이 울고 달뜬 숨소리를 내뱉으며 버드나무들은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서러운 몸을 씻었다 무엇일까 우리를 밤새 깨어 있게 만드는 비린 냄새의 그것들은 무엇일까, 창문을 닫고 누우면 커다란 눈을 가진 심해어들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나의 뜨거운 얼굴을 향해 꼬리치며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바다에 괴롭고 삶에 괴로운 서글픈 눈매의 까까머리 청년이었다
최갑수 시인 / 석양리(石陽里)
비빌 데 없는 내 젊은 날의 구름들을 불러다 왁자지껄 모래밭에 앉히고 하늘 한켠에서 일박이일(一泊二日)로 민막하는 초저녁 달에게 근대화슈퍼 가는귀먹은 할머니한테 가서 진로소주 몇 병 받아오게 하고 깍두기도 한 종지 얻어오게 하고 그런 날 저녁 외롭고 가난한 나의 어느 날 저녁 남해 한 귀퉁이 섬마을에서 바람이 나를 데리러 왔다가는 해당화가 피었대, 엽서만 전해 주고 그냥 돌아간 후 마을회관 옥상에 놓인 풍향계는 격렬하게 어스름 쪽을 가르키고 어디까지 왔나 밤하늘은 금세 온갖 외로움들로 글썽거리고
최갑수 시인 / 가포(歌浦)에서 보낸 며칠
한동안 가포에 있는 낡은 집에 가 있었다 늙은 내외만이 한 쌍의 말간 사기 그릇처럼 바람에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 바닷가 외딴집 바다 소리와 함께 그럭저럭 할일 없이 보고 싶은 이 없이 참을 만했던 며칠 저녁이면 바람이 창문에 걸린 유리구슬 주렴 사이로 빨강 노랑 초록의 노을 몇 줌을 슬며시 뿌려주고 가기도 했다 손톱만한 내 작은 방에는 구름처럼 가벼운 추억 몇 편이 일렁이며 떠 있기도 했다 그 집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내 가슴속 아슴하게 오색 물무늬가 지던 그러한 며칠 동안 나는 사랑이라든가 사랑이 주는 괴로움이라든가 하는 마음의 허둥댐에 대하여 평온했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그런 허둥댐의 덧없음에 대하여 다 돌아간 저녁의 해변처럼 심심해지면, 평상에 모로 누워 아슴아슴 귀를 팠다 오랫동안 곰곰이 내 지나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을 생각했다 가끔 아주 가끔 아픈 듯이 별들이 반짝였고 그때마다 감나무 잎사귀들은 바다와 함께 적막했다
최갑수 시인 / 해안
예인선은 둥근 빛을 흔들고 누군가 동백잎에 물들어 깊은 병을 가질 때 여관집 늦은 가을비는 창가에 온다 밀물 드는 소리에 취객은 마음을 빼앗기고 여자들은 등을 달고 바다처럼 조용히 부풀어오를 때
최갑수 시인 / 오후만 있던 수요일
수요일 오후 내내 바람이 불었다 네쪽으로 내어놓은 창문에는 세월처럼 빠르게 구름만이 흘러서 가고 이따금씩 행려병자의 먼 눈빛처럼 햇빛이 잠시 창들에 머물렀다 나는 네가 떠난 후 늘 그러하였듯이 너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일과 더불어 나의 안부를 전하는 일을 긴 긴 낮잠으로 대신했다 구름은 무슨 정처없음으로 닿을 곳도 없이 흘러서 흘러서만 가는가 그리고 햇빛은 무슨 애처로움으로 오후를 서성대다 저녁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가 잠에서 깨면 창 밖은 어두운 겨울 들판 네가 떠나간 겨울 들판 차가운 적막과 적막 그 깊은 사이에는 내 외로움의 높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쑥 쑥 소리도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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