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영미 시인(서울) / 여자의 일생 외 19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9. 08:00
김영미 시인(서울) / 여자의 일생

김영미 시인(서울) / 여자의 일생

 

 

하루가 끝났다

손님들은 돌아가고 목욕을 마친 여자가

반질해진 몸으로 욕조를 나오는 동안

 

여자를 한껏 마신 거울

그 앞에서 공들여 다듬어진 여자 얼굴에는

신기한 물질들이 잔뜩 덥혀 있었다

파운데이션, 페이스 파우더, 마스카라, 립스틱

 

기름 성분들의 막들이

층층이 쌓여 살갗에 그려지는 지층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여자의 살갗에 다른 여자가 태어났다

 

흔들리고, 숨 쉬고, 미끄러지고, 꿈틀거리고

그러나 여자에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테고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계절에 살고 있었다

 

 


 

 

김영미 시인(서울) / 기차를 놓친 별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놓친 별은 뜨겁기만 한데

이마에서 늦은 별을 붙들고

사라진 길 위에서

멀어져 가는

열차 불빛 바라보았다

내 귀에 강물이 범람하는 소리

마른 나뭇가지를 울리는 바람소리

나는 침묵을 세어 보았다

 

돌아가는 길은 비가 내렸다

 

-시집 『기린처럼 걷는 저녁』 중

 

 


 

 

김영미 시인(서울) /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눈길이 멀면 명길 짧다’는

할머니 말씀이 피었다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 입으신 할머니

어린 눈에 할미가 하늘만큼 이뻤다

 

낮은 곳에 산 채송화 하늘이 멀었다

 

여름 속을 뛰어든 꽃씨

저 세상으로 든 그 저녁

 

씨 뿌리지 않은 마당에

안티푸라민 냄새가 나를 업었다

 

-『서울신문/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2022.05.20

 

 


 

 

​김영미 시인(서울) / 순수한 타자

 

 

“재분아, 이거 받아라.”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신발을 벗으시며 마루에 앉아 있는 내 손에

금박종이상자 안에 든 카스텔라를 주시면서

 

재분이는 내 이름이 아니다

병으로 일찍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자

내 고모의 이름이다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아버지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고모와 내가 뒤섞인다

 

아버지는 어느 날

어머니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의 결여와 세상의 결여가

내 결여 속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어머니가 된다

 

어느 문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이 한 움큼의 저녁,

그 괄호 안에 들어올 것에 대하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김영미 시인(서울) / 물의 꿈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떠오르는 태양 속 검은 새는

아름답고 성실한

죽음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때 물은 혼자 있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바다에서

잔물결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눈을 적시고 있었다

 

땅과 결합했을 때 물은

불로 타올랐다가 육신 속에서는 피로 불려가

성욕이 충만한, 가혹한

한 모금의 액체로 태어났다

 

달 속의 장미처럼 그대의 꿈은

저녁의 수많은 꿈을

남몰래 지켜주고 있었다

거대한 여신, 달에 이끌리어

 

-2018년 제20회 시와 경계 신인상 작품 중

 

 


 

 

김영미 시인(서울) / 그림자

 

 

전봇대에 걸린 전등이

창가로 간다.

창을 깨우다 달아나고 있는

불빛을 따라갔는지

모퉁이에서 무엇을 지키는지

걸음을 멈춘 가슴

나보다 먼저 걸어간 발자국이

구부러진 길에서

저녁을 빨아먹고 있다.

떨고 있는 두 눈은

해바라기처럼

불 켜진 창문에 기대 생각한다.

불빛의 끝이 저 골목에 있다.

 

그 끝에서

푸른 별들이 놀고 있다.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내 몸에는 별이 산다

 

 

봉선화 필 때

내 몸에는 별이 뜬다.

 

내내 그 빛 아래서

꽃 지는 소리

 

그 소리 속에

수만 년의 강물이 흐르고

 

낮은 곳에 있는 난

볼 수 없는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사위어 가던 그 별

 

봉선화 질 때

내 몸에서 떠난다.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뒤뜰에서

 

 

잡초라 불리는 풀들이 있다.

땅에 길이 있다는 걸

먼저 알아도

아무 데서나 자란다.

농부가 가는 길은

논두렁길

그 호미 끝에서 뽑혀 나오는

잡초

빗소리에 풀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잡초는 그저 풀들끼리

가까워지고 있을 뿐

가는 길은

같은 듯, 같지 않은 듯

흰 나비 한 마리

빛을 두르고 날아온다

.

길을 내며 자라던 풀이

길을 지우고 있다.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아지랑이 피는 땅에서 별이 보여요

 

 

아지랑이 피는 땅에서 별이 보여요.

그 땅에 매달려서 올려다보는 하늘

바람이 오른쪽 눈을 감게 하는데

어느새 꽃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

 

어떻게 별은

물을 적시지 않고 꽃으로 온 걸까요?

 

누가 흔들고 있을까

매일 조금씩 내려오는 하늘

그 속에는 별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별 하나

제비꽃을 잊으려 애쓰다가

늘 저 아래로 내려갑니다

 

꽃을 별이라 부르는 날

이제 안부를 물을 수 없게

더 작아지는 꽃

나는 별 보며 하늘에 잠기고

꽃은 별 속에서 가만히 눈뜨고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이슬방울

 

 

별 하나가 떨어져 있다.

잎사귀 끝에 매달려

부르는 손짓,

눈앞에 두고도

손 내밀지 못한다.

산들산들

흔들리는 꽃잎

또르르

내 얼굴로 흘러내리는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매일 아침

 

 

한 세계가 닫힌다는 건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

 

새와 꽃이 없었다면,

작고 예뻤던 순간들이 없었다면

무너졌을

 

매일 일어나

같은 곳을 향해

묻는 사이

 

이제야 알았다고

기꺼이 얼굴을 내민다.

 

하늘이 아무리 높아도

이어지는 길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문진

 

 

돌 속에 꽃무늬가 보인다.

문을 닫아버린 수행자에게

여독을 풀어달라는 말 남긴

은빛 잠이 누워있다.

매화꽃이 하얗게 날리던

그 강변에서 마주쳤을까

돌멩이 하나에 맴도는 길

바람이 가만있어 주면

내게로 걸어 올 것만 같은

흰 돌에 왕관을 씌운

향기로운 잠

어느 날

어디선가 날아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앉은 꽃잎

기다림을 완성한 돌 하나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눌러 놓았다.

나는

바람이 웅크리고 있는 창턱을

아련히 바라보고 있다.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돌탑

 

 

처음에 소리가 들렸다.

달이

그 위로 은은하게 비춘다.

돌들이 찾는 것은

깊은 구멍 속으로 숨은 달

밤이 되면

넓은 품을 서늘히 펼쳐 놓는

그림자

서로의 몸 위로 올라서기 시작한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우연히

 

 

바람이 불었는데

코스모스가 따라왔다.

꽃잎 한 장

노을에 숨기고

향기가

비에 젖고 있다.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중병

 

 

전봇대에 올라탄 불꽃이

하늘로 치솟는다.

이파리를 떨구면서

올라가는 능소화

 

무엇을 본 것일까.

 

하늘에 닿을 듯한 겹겹의 파문

땅을 거스르는 저 아슬아슬함

 

하늘 너머를 읽었을까.

 

스스로 불씨가 된 꽃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길은 지워져 가는데 내 손목에서

팔딱팔딱 뛰고 있는 맥박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는 한 생,

 

허공을 민다.

 

-시집 『내 몸에는 별이 산다』 2023,

 

 


 

 

김영미 시인(서울) /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

 

버스를 기다리다가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약속이나 한 듯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나뭇잎이 누렇게 떨어지고 있는 늦가을

고양이 울음소리

아버지 구둣발 소리가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다.

목이 골목을 업고 갈 때

등에 진 짐 나누어질 등이 없을 때

나무 아래 풀잎도 몸을 떨며

느릿느릿

뒤돌아보면 어둠으로도 되돌리지 못하는

그 길을

아버지와 함께 지친 발걸음으로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시집 『기린처럼 걷는 저녁』(걷는사람, 2020)

 

 


 

 

김영미 시인(서울) / 재분이 고모

(등단제목-순수한 타자)

​ “재분아, 이거 받아라”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신발을 벗으시며 마루에 앉아 있는 내 손에 금박종이상자 안에 든 카스텔라를 주시면서

 

 “재분이는 내 이름이 아니다.”

 

 재분이는 병으로 일찍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자 내 고모의 이름이다.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아버지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고모와 내가 뒤섞인다.

 

 아버지는 어느 날 어머니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된다.

 

 어느 문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이 한 움큼의 저녁, 나는 입을 다물었다.

 

 


 

 

김영미 시인(서울) / 사막의 검은 새

(등단제목-물의 꿈)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떠오르는 태양 속 검은 새는

아름답고 성실하게

죽음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아이는 혼자 있지 않았다. 날개를 펴고

어둠에 잠긴 바다

아파트 단지에서

부드러운 눈을 적시고 있었다

 

땅과 섞여들었을 때

수돗물은 깃털을 태우며 흘러 다녔고

육신 속에선 피로 불려가

한 모금 액체로 흘러내릴 때

 

싸움이 묶이고 풀리면서 닫힌 집,

탈출을 꿈꾸는 어린 소녀가

사막에서 검은 날개를 편다

 

 


 

 

김영미 시인(서울) / 청구서

(등단제목-검은 꿈)

 

 

 탯줄에 묶여 있는 꿈을 자주 꾼다 그 후부터 그녀는 내게 청구서를 내밀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해야 했다 그런 날 꿈속엔 어머니라는 이름표를 단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딸이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 때 무덤 앞에서 어머니들이 울었다 탯줄을 감은 하늘에 달이 떴다

 

 


 

 

김영미 시인(서울) / 변장과 분장

(등단제목-여자의 일생)

 

 

하루가 거의 끝나간다

손님들은 돌아가고 목욕을 마친 여자가

반질반질해진 몸으로 욕조를 나오는 동안

여자를 한껏 마신 거울

연지 곤지 루즈로

해맑은 그 여자의 얼굴에 신비를 덧발랐다

뿜뿜 막들이 그려졌다

다른 여자가 태어났다

 

신비 속 환상을 돈 주고 사는 남자

판판 따 먹는 바둑판의 흑과 백

벗겨내면 잘 보이는 주름살

흔들리고, 숨 쉬고, 미끄러지고 꿈틀거렸다

 

화장과 변장과 분장을 밥 먹듯 하는

그 여자는 오늘도 배역이 많다.

 

2018년 《시와 경계》 신인상 당선시

 

*(괄호안의 제목)는 등단시 제목이며, 첫 시집 상재시 제목과 내용이 수정되었음.

 

 


 

김영미 시인(서울)

1965년 서울에서 출생. 대전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2011년 『문학세계』, 2018년 『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 『기린처럼 걷는 저녁』 『내 몸에는 별이 산다』. 학술 우수 연구서 『정지용 시와 주체의식』, 교재 『대학인의 의사소통과 협력』, 산문집 『옥천, 물빛 그리움』 등. 현재 대전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