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영미 시인(양평) / 석양의 식탁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9. 08:00
김영미 시인(양평) / 석양의 식탁

김영미 시인(양평) / 석양의 식탁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 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 똑 소리 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 아침달, 2019

 

 


 

 

김영미 시인(양평) / 비눗방울

 

 

나는 지금 막 독립한 바람

 

나의 방에 모서리가 없다

 

투명한 벽지를 따라

 

바람이 바람을 실어 나르는 바깥의 시간

 

디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건너

 

어느 눈동자에서 나는 가장 아프게 터질 것인가

 

 


 

 

김영미 시인(양평) /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버스를 놓치고

잠시 길이 끊어지고

그녀는 멈추었다

기대고 섰던 공간 몇 개

사각으로 비껴 선다

순발력있게 탑승해버린

그녀의 목적지가 멀어져가고 있다

길들이 망설이는 사이

도로변 윈도우,

환한 불빛을 들고 달려 나온다

그녀는 금새 진열되고 만다

바튼 발 사이

보도 블록 한 칸이 주목받고 있다

세상의 각도를 실루엣으로 처리한 채

그녀는 천천히 인도로 올라선다

지나가던 바람이 길을 흔들어

그녀를 섞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공모를 시침떼고 이제

그녀는 물러섰다

떠나는 자와

떠나려는 자를 보고 있다.

정류소 노선 목록을 훑으며

가야할 길 위에 놓인

자신의 목록을 읽고 있다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김영미 시인(양평) / 파수(破水)

​일찍이 나는 물의 파수꾼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풀장에 다이빙하고 싶어

수박을 던지면 젖살 같은 과육이 흩어졌다

어기면서 지킬 것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은 매번 덜 익은 계절

물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법을 배우며

눈물을 다듬었다

경계할수록 너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김영미 시인(양평) / 일시적인 재배열

 

 

1

교차로를 건너고 교회당을 지나면

언덕의 끝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걷기엔 멀지만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다

특정한 시도는 빠르다는 의미를 잊는다

어떤 시인은 스스로 음식을 끊고

가장 사랑하는 안락의자에 앉아 죽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2

주말이면 천변을 따라 걸었다

물오리 앉은 곁으로 물결이 번지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는 일주일의 식사와 늦어지고 있는 소식과

옛날 사람들의 안부를 생각했다

그것은 카페 빌리를 향해 가는 길

한 주간의 노동과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들을

흘러가는 물에 놓치는 것

바깥으로 틀어놓은 마음이 귀를 위태롭게 할 때마다

회유성 물고기들의 이마는 더 단단하게 빛나고

그것은 빌里에 있는 일

원형테이블의 테두리를 천천히 문지르는 일

커피와 레몬 티와 빌紙로 떨어지는

어느 오후를 나는

오래 빌리는 것이었다

 

3

그것은 천변을 거슬러 자연사박물관이 있는 산자락에 닿는 일

허브동산을 둘러보고 돌 모양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감상하는 일

사과를 돌려 깎는 등산객의 손동작을 구경하는 일

죽은 사람의 이름이 모두 적힌 책이 있다면 저 숲과 같을까

온갖 나무와 풀과 돌을 거쳐 내가 무엇에 도달하는 일

살아있는 세상과 무관한 생애*의 입구다

노란색 승합차 속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줄을 서고

나는 몇 개의 벤치를 빌려본다

가장 안락한 벤치에 누워 양손을 포개본다

 

4

어떤 시간은 오래 살아

이젠 죽은 시간 속으로 쉽게 끼어들었다

 

*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중에서

 

-『딩아돌하』 2018-가을호 <신작시>에서

 

 


 

김영미 시인(양평)

1975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서울시립대 철학과 졸업. 201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