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시인(양평) / 석양의 식탁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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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인(양평) / 석양의 식탁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 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 똑 소리 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 아침달, 2019
김영미 시인(양평) / 비눗방울
나는 지금 막 독립한 바람
나의 방에 모서리가 없다
투명한 벽지를 따라
바람이 바람을 실어 나르는 바깥의 시간
디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건너
어느 눈동자에서 나는 가장 아프게 터질 것인가
김영미 시인(양평) /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버스를 놓치고 잠시 길이 끊어지고 그녀는 멈추었다 기대고 섰던 공간 몇 개 사각으로 비껴 선다 순발력있게 탑승해버린 그녀의 목적지가 멀어져가고 있다 길들이 망설이는 사이 도로변 윈도우, 환한 불빛을 들고 달려 나온다 그녀는 금새 진열되고 만다 바튼 발 사이 보도 블록 한 칸이 주목받고 있다 세상의 각도를 실루엣으로 처리한 채 그녀는 천천히 인도로 올라선다 지나가던 바람이 길을 흔들어 그녀를 섞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공모를 시침떼고 이제 그녀는 물러섰다 떠나는 자와 떠나려는 자를 보고 있다. 정류소 노선 목록을 훑으며 가야할 길 위에 놓인 자신의 목록을 읽고 있다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김영미 시인(양평) / 파수(破水) 일찍이 나는 물의 파수꾼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풀장에 다이빙하고 싶어 수박을 던지면 젖살 같은 과육이 흩어졌다 어기면서 지킬 것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은 매번 덜 익은 계절 물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법을 배우며 눈물을 다듬었다 경계할수록 너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김영미 시인(양평) / 일시적인 재배열
1 교차로를 건너고 교회당을 지나면 언덕의 끝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걷기엔 멀지만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다 특정한 시도는 빠르다는 의미를 잊는다 어떤 시인은 스스로 음식을 끊고 가장 사랑하는 안락의자에 앉아 죽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2 주말이면 천변을 따라 걸었다 물오리 앉은 곁으로 물결이 번지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는 일주일의 식사와 늦어지고 있는 소식과 옛날 사람들의 안부를 생각했다 그것은 카페 빌리를 향해 가는 길 한 주간의 노동과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들을 흘러가는 물에 놓치는 것 바깥으로 틀어놓은 마음이 귀를 위태롭게 할 때마다 회유성 물고기들의 이마는 더 단단하게 빛나고 그것은 빌里에 있는 일 원형테이블의 테두리를 천천히 문지르는 일 커피와 레몬 티와 빌紙로 떨어지는 어느 오후를 나는 오래 빌리는 것이었다
3 그것은 천변을 거슬러 자연사박물관이 있는 산자락에 닿는 일 허브동산을 둘러보고 돌 모양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감상하는 일 사과를 돌려 깎는 등산객의 손동작을 구경하는 일 죽은 사람의 이름이 모두 적힌 책이 있다면 저 숲과 같을까 온갖 나무와 풀과 돌을 거쳐 내가 무엇에 도달하는 일 살아있는 세상과 무관한 생애*의 입구다 노란색 승합차 속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줄을 서고 나는 몇 개의 벤치를 빌려본다 가장 안락한 벤치에 누워 양손을 포개본다
4 어떤 시간은 오래 살아 이젠 죽은 시간 속으로 쉽게 끼어들었다
*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중에서
-『딩아돌하』 2018-가을호 <신작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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