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시인 / 대왕문어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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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시인 / 대왕문어
바위에 붙으면 바위 색으로 멍게들 틈에서는 멍게 색으로 별로 쓸 일도 없는 위장술로 핏줄로 전해진 이유를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바다 바깥에는 산 채로 너를 토막내 먹는 족속이 산다는 것을.
어부들이 양식업 파산의 주범으로 너를 꼽고 삼 년간 네 종족을 뭍으로 끌어올렸다는구나.
광어가 있으면 광어를 먹고 오징어 알이 있으면 오징어 알을 먹는 너는 불한당도 무법자도 아니다. 너를 산채로 토막내 먹는 족속들이 대왕이라는 칭호를 네게 붙였다만 그들은 네 신하가 아니었다.
어부들은 바다 바닥까지 내려와 너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바위틈 속에 숨기라도 하면 산 물고기를 꿴 꼬챙이로 너를 유인한다. 물고기만 살짝 떼가는 너를 두고 영악하다고 어부들은 말하더라만 먹물까지 쏘며 도망가는 너를 어디 그들이 놓치기나 했다더냐.
보트 위로 잡아 올려진 너는 바다 속에서 볼 때보다 쭈그러들어 사진까지 한 방 찍히고 나면 장난감처럼 보인다. 진짜 대왕문어라면 보트 정도는 먹어치워야지 마지막 순간까지 고작 갑판 색으로 위장이나 하는 네가 바다 생물을 다 먹어치울 수나 있겠느냐.
조영석 시인 / 꿈
처음에 그것은 젖니도 채 안 빠진 입속의 붉은 혀였다
삼촌이 달려들어 반달을 만들어주마고 덥석 물더니 어머니 아버지 형 사촌까지 한입만 한입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물어뜯었다
그것이 손톱처럼 작아졌을 때 나는 뒤늦게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영영 벙어리가 되었다
조영석 시인 / 선명한 유령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형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조영석 시인 / 살얼음
몇 년째 물을 품고 있는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던 물의 거죽이 주름진 채 굳는다. 이말이 없는 거대한 아가리에 발을 얹는 곳마다 거미줄이 퍼져나간다. 얼음 속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이 흐른다. 흐르면서 얼음 바깥을 염탐한다. 가벼운 먹이는 그대로 놓아주고 한 번에 먹어치울 큰 놈을 조용히 기다린다. 저수지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살얼음은 물의 덫, 해마다 한 명씩은 꼭 끌고 들어가고야 마는 네발짐승은 절대 걸리지 않는, 마을 아이들은 살얼음이 기승을 부리는 때 결코 저수지에 가지 않는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 얼음은 조금씩 두꺼워지며 아이들을 부른다. 밤마다 굶주림에 쿨럭이는 물소리가 마을을 휘감는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쓴 채 잠을 설치고 어른들은 밤새 물을 밝혀 얼음의 아가리를 살핀다. 살얼음은 그러나, 기어코 한 번은 먹이를 끌고 들어간다. 제 분을 못 이겨 속으로부터 꽝꽝 얼어붙기 전에. 살얼음을 깨고 썩지 않는 시체를 건져 올리는 날이면, 저수지에는 종일 진눈깨비가 날리고, 사람들은 돼지머리를 놓고 울음 없는 위령제를 지낸다. 해마다 한 번씩은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조영석 시인 / 깡통을 위하여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나는 살아 있다. 거리를 힘차게 굴러다니며 토해 놓는 만큼의 세상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
줄어드는 뼛속으로 오염된 언어들이 넘나들지만, 결코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문율. 내 목소리는 나팔소리보다 요란하고 아이의 싱싱한 울음보다 선명하다.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춥고 윙윙거리는 냉장고 속에 잘 진열된다.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때론 상한 냄새에 진저리치며 심한 두통을 앓기도 한다. 어느 한 순간, 문이 열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나를 감싸 쥔다.
나는 선택된 기쁨으로 고통을 기다린다. 그는 내 모자를 딱, 하고 천천히 벗긴 후 내 살을 자기의 살 속으로 들어 붓는다.
눈물 같은 거품을 게워내며 내 살은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어떤 힘에 의하여 신나게 공중을 날아간다. 나는 다시 찌그러지는 연습을 시도한다.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영석 시인 / 짝
혼자된 지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모처럼 찾은 집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너도 이제 새사람을 만나야지 내가 대꾸를 않고 있자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남자 혼자 살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렇게 살다가 덜컥 아프면 어쩌냐 난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살다가 내가 덜컥 아프면 나한테 온 그 새사람은 어쩌느냐고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자기 자식 생각만 하느냐고
조영석 시인 / 부부
고요한 밤 무거운 밤 당신의 머리 무게를 재는 나의 팔이 잠들지 못하는 밤 고된 하루의 노동이 꽁꽁 얼어 있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 파르르 떨리는 당신의 목이 안쓰러워 생침을 삼키는 당신의 침묵에 내 혀는 그동안 배운 모든 말을 잃어버리고 살며시 당신 이마에 손을 얹을 뿐 내 핏속으로 점점 침몰하는 당신의 머릿속 비린 하루를 느끼며 나도 그대의 머릿속에서 멀고먼 아침까지 숨을 참는다 고요한 밤 무거운 밤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두 사람의 줄기찬 불면(不眠)
조영석 시인 / 복덕방 노인
유리창은 거대한 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등지고 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녹슨 풍향계처럼 삐걱거리며 그의 목뼈만 조금씩 틀어졌다 찾아오는 구매자나 매매자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먼 우주의 한 지점을 가리킨 채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꾸려 떠났다 비둘기들이 날아와 그의 눈을 파먹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입을 벌려 검은 연기를 뿜어올렸다 연기의 꼬리가 끊어지면 고장난 엔진 소리를 내며 단칸방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방이 나오는 족족 비둘기들이 물고 날아갔다 상가를 배회하던 개들은 비둘기들이 놓친 방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다투었다 한번 벌어지자 그의 입은 계속해서 방을 낳았다 지도 위에서 붉은 집들이 뚝딱거리며 세워졌다 그의 팔과 다리가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건물주가 찾아왔을 때 유리창 앞에는 젖은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부들이 해머를 휘두르자 복덕방은 허물어졌다 벽돌더미 사이로 노인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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