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영 시인 / 안개는 어떻게 악어를 만들었나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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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영 시인 / 안개는 어떻게 악어를 만들었나
한참을 걷다 안개의 늪지에 다다랐다
늪 위에서 좌판을 벌려 놓고 양파를 팔던 노파 갈퀴 같은 손으로 불쑥 나를 잡았다 그녀의 손등에는 악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안개에 갇힌 나는 휘파람을 불었으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살에 닿은 습기가 노파와 나 사이에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고 깊은 고랑을 이루었다
수면 위에서 악어는 제 그림자를 물어뜯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악어는 보이지 않았고 내게 내밀던 손에서 악어 냄새가 났다
신발을 잃어버린 나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노파의 질긴 목소리가 뒤꿈치를 물고 놓지 않을 것 같아서 늪이 더 아득하게 내려앉았다
푹 꺼진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계간 『열린시학』 2025년 여름호 발표
강기영 시인 / 거품
월요일마다 수제 생맥주를 마시는 당신 아홉 잔을 마시고 여덟 잔이라 우겨요
머릿속이 엉킨 채로 며칠을 보냈어요
맥주를 마셨지만 마시지 않은 한 잔 속에 당신은 자주 빨려 들어가지요 거품 가득 떠오른 얼굴을 단숨에 들이키지만 입안에 남아있는 당신의 말들 입안 가득 말들이 떠다녀요
만질 수 없는 얼굴을 술잔에 감춘 당신은 늘 같은 말을 하지요 바나나 검은 반점 같은 독소가 당신의 말인지도 몰라요
일 년 동안 반복된 열두 줄의 문장은 선명하게 살아 꿈틀거리고 문장 속 낱말들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요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당신은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찌르고 더이상 받아줄 마음이 없는 나는 붉은 입으로 치킨 날개를 뜯을 뿐이죠
서로의 잔에만 빠져있는 우리 서랍 속 찌꺼기 같은 감정을 쏟아내요 늘어난 빈 잔만큼 둘 사이의 간격은 멀어져요
목소리는 거품처럼 창백해요 -계간 『시와 사람』 가을호발표
강기영 시인 / 핑계 없는, 어떤 무덤은 후손보다도 늦게 죽는다
매일 지나치면서도 확인이 필요한 길 무덤은 이정표가 되었다 묘비도 없이 하물며 핑계도 없을 것 같은 저 무덤만큼 확실한 이정표가 또 있을까
어둠 속에서 곤히 잠든 무덤들은 질문이 없는 궁금증처럼 보인다거나 어느 날 불쑥 솟아오른 묘지는 어디론가 날아가려는 모자 같다거나 미스터리 써클처럼, 분명한 일들이 불분명 속으로 사라진 증거들 같다
아주 오래전의 죽음이 우리들의 뒤를 바짝 쫓아오듯 제멋대로인 미래의 길이가 견인해가는 매일매일의 핑계들과 감긴 밧줄이 가득 들어있을 것 같은 무덤, 모든 표시에는 이유와 핑계가 있겠지만 죽음은 저 혼자 미궁 속으로 사라지기도 해서 저렇게 둥근 모양을 하는 것일 뿐
문패가 없는 둥근 집, 북향의 툇마루도 없는 집
정량처럼 궁금함을 채우고 살던 일생이 아무런 의문이 없는 곳까지 와서 뭉쳐져 있다 이유와 의문 중 어느 쪽으로든 길을 내주고 지나쳐 가는 소리를 묵묵히 듣는다 여러 갈래가 모였다 다시 여러 갈래가 되는 것을 본다
세상의 무덤들, 저의 핑계를 몽땅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 북천(北天)으로 조금씩 날아간다 -계간 『시와 사람』 가을호발표
강기영 시인 / 보관의 날짜들
여름보다는 아무래도 늦가을쯤이 좋겠지
여름 날씨는 들떠서 틈이 많고 빗소리와 자꾸 캐묻는 질문들이 많이 섞였지 습도가 높은 날짜들 속엔 입이 여럿 달리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바글거리니까 그에 반해 늦가을 날짜들은 조금 날카롭고 자주 실금이 가지만 문밖을 나가는 날짜들이 그만큼 적어서 적당하겠지
문을 꽁꽁 닫아놓고 스스로 보관을 자처하겠지
바람은 자꾸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물소리는 낮아지고 바람은 조금 키가 자라겠지만 그런 물소리 속에는 차가워진 돌멩이들의 푸른 이끼에도 단풍이 들겠지 물은 참 많은 것을 보관하고 있지 물살을 넘기는 지느러미들과 돌에 붙어 돌을 갉아먹는 물벌레 종류들 누가 강물 흐르는 소리를 셀 수 있겠어?
물 밖의 치즈와 소금 채소들과 비린내들의 염장법엔 보관되고 있는 날짜들이 참 많지
맹물에 엄마 손을 담가 놓기만 해도 맛있는 찌개가 될 것 같은데 해가 질 무렵 미지근해진 해를 녹여 먹는 서쪽 강과 서걱거리는 소리가 가득 찬 갈대들 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보관 용기들 같고 각종 숫자 표기법들과 날짜들 속엔 부피도 없는 과거와 미래들
오랜 적금을 깨고 올려다본 반달
-계간 『인간과 사회』 2024년 겨울호 발표
강기영 시인 / 봄을 물었는데 어느새 가을이라고 대답하네요
오늘은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손등에 나비가 앉았어요. 잠깐 졸다 깬 잠이 새긴 문신 같아요. 노인이 된다는 것은 잠도 혼잣말도 때와 장소가 사라지는 것일까요. 봄을 물었는데 어느새 가을이라고 대답하네요. 버섯의 종류에는 돌과 나무와 지루한 장마 끝이 깃들어 있지만 이 손은 언제 돌과 나무와 장마를 들렀다 온 것일까요.
털실을 꺼내 느린 스웨터를 짜요. 얼마나 여러 번 풀었다 떴다를 반복한 걸까요. 구불구불 끊어진 곳곳을 이어 놓은 듯 군데군데 흉터와 매듭이 야무져요. 간혹 빠뜨린 코는 햇살 한 줄 끌어와 이으면 되고 깜빡 졸다가 오늘을 잃어도 실뭉치 끝을 잡고 있어서 괜찮아요.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잡으려다 대바늘을 손에서 떨어뜨렸지만 짜고 있는 중일까요, 풀어지고 있는 중일까요.
햇빛이 사라진 자리 산그늘이 발밑까지 다가와 있네요. 막, 무릎이 사라지고 있어요.
-계간 『인간과 사회』 2024년 겨울호 발표
강기영 시인 / 즐거운 등
우리 동네 수선집 아저씨는 늘 등 뒤에다 라디오를 틀어 놓는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 다 등 뒤에다 놓아두고 눈앞에 놓인 실밥을 뜯는다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돋보기안경 알에 우묵하게 고이듯 온갖 일들 다 알고 있다
줄이고 늘리고 뜯고 다시 깁는 일이 구부린 등의 힘에서 벌어진다 고도로 집중하는 저 각도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보이지 않는 등 뒤를 믿는 자세다 라디오 사연들은 마치 아저씨의 등에 업힌 듯, 때로는 업힌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 다독이듯 흘러나온다
등 뒤로 지나가는 시간은 늘 지금이고 손때 묻은 재봉틀의 노루발이 느릿느릿 걸어도 어느 날엔 실밥이 터져 정오가 줄줄 새는 태양이 찾아오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엔 지루한 장마가 찾아와 잿빛 구름 수선을 의뢰하기도 한다
즐거운 등 뒤, 고개를 들 때, 오목하게 고였던 초점들이 근시의 근처까지 흩어진다
멀리 시력이 사라진 것처럼 실과 바늘이 추던 춤을 멈추고 누워 있다
등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굴종屈從과 공경이 번갈아 쓰이지만 나지막이 내려놓은 아저씨 등은 한 집안을 일으키는 일로 쓰였다
등을 펴고 등을 끄는 일로 하루의 무게를 꿰매는 즐거운 등이다
2024년 《한국 NGO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강기영 시인 / 꽃 피는 허리
은조분 할머니 분꽃 화분을 옮기다 삐끗, 힘의 모퉁이 하나 허리에 들었다 아니다, 욱신거리는 분꽃 화분 하나 온전하게 허리에 놓였다
꽃을 옮기는 일이 계절뿐인 줄 알았더니 모자라는 힘으로 꽃을 옮기려 했던 일 수십 방의 침을 맞고도 여전히 화무십일홍이다 송송 맺힌 핏방울들은 모두 조금씩 어긋나 있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구부정한 죽은 피를 뽑아내고 난 뒤에야 새벽 미사 보러 간다 계절은 어느덧 꽃 지는 화분마다 뻐근했던 여름이 을씨년스럽다 배 아파 피워낸 여름과 봄 그리고 한겨울을 합치면 2남 3녀지만 삐끗, 놓친 초여름 한 철 잊을만하면 허리께에서 운다
보이지 않는 아이를 허리춤에 감추고 파스를 부치면 칭얼거리듯 욱신거린다
통증이 옮겨붙은 파스는 통통하게 살이 쪄 있고 분꽃 화분은 굽은 그늘을 까맣게 맺지만 허리에 핀 꽃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활짝 핀 조화처럼 시들지 않는다 은조분 할머니 꽃핀 허리에서 삐끗삐끗 꽃이 또 진다
-2023년 제19회 사계 김장생 신인문학상 수상시
강기영 시인 / 겨울에서 힘을 빼면
겨울에서 힘을 빼면 가을로 갑니다.
온도는 부력이 있어서 점점 높이 떠오르려고 하지만 태양의 꼭지를 풀거나 바늘구멍을 내면 점차 가라앉고 맙니다.
겨울에서 힘을 빼고 며칠 가을에 다녀왔습니다. 케이블카가 구름의 협정 속을 왕복합니다.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속에는 사과나무들과 메타세콰이아들이 서로 교대를 합니다.
사실 나무는 저마다의 시속이 있습니다. 온도는 두께를 발명했고 두께는 실내와 실외를 조언합니다.
안간힘에서 느슨한 힘으로 며칠 다녀왔습니다. 잠시 피의 속도를 꺼두고 식물의 속도로 다녀왔습니다. 숙소의 문은 예의가 없지만 침대들은 또 시니컬해서 가을의 말투로 묻고 여름의 억양을 기대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 익숙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힘을 뺀 겨울이 헛바퀴를 돌았고 겨울의 공회전엔 가을의 무늬가 다 닳아 있었습니다.
겨울의 파랑은 그 속은 붉게 익었을 것이라고 의심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자꾸만 두 쪽으로 갈라집니까. 동그랗게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뾰족한 끝을 모으고 있습니까.
힘을 뺀 겨울이 눈사람의 속도로 서 있습니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4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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