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진자 시인 / 질통꾼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0. 08:00
최진자 시인 / 질통꾼

최진자 시인 / 질통꾼

 

 

제2여객터미널 근처 칠통 마당, 이곳은 하역장

60개가 넘는 정미소가 굉음을 내고 돌고

미두 대두 투기장이었던 부두

도박의 긴장감과 치열한 삶의 현장

 

몸뚱이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노동꾼 목도꾼 허드레꾼 지게꾼이

전국에서 몸 하나를 밑천으로 뛰어든

짐 하나를 차지하려 땀으로 목욕하다

 

콘크리트만 뜯어내도 그때의 흑백사진이 뒹굴어

측은함이 개흙처럼 들러붙고

슬픔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죽느냐 사느냐의 경계가 파도에 쓸리고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잿빛 바다엔 물류가 터지도록 쌓였다

수백 명의 힘을 가진 헤라클레스 같은 선박 크레인

깃대처럼 높은 곳에 질통꾼 대신 갈매기기 휴식을 취한다

 


 

최진자 시인 / 꽃의 의미

 

 

없음 없다 무의미일 때

꽃을 바라보며 이유를 말하자

 

이른 봄에 피는 꽃이고 싶은 건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림이요

 

맨살로 밤새 찬비를 맞고 견딤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요

 

순간의 아름다움일지라도 마다 않는 것은

실패한 이들에게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요

 

비바람의 시련에도 웃음을 놓지 않음은

슬픔 뒤에 기쁨이 옴을 알리기 위함이다

 

꽃이 미소로 모든 이의 시선을 모으는 것은

사람들에게 순간의 휴식을 위한 배려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최진자 시인 / 돌아온 몽돌

 

 

천년을 사랑하고 그리워

미움으로 깎이고 구르고 굴러 학동 해변

파도와 부딪쳐 아름다운 음파소리

 

이제는 눈감아도 괜찮겠지

목욕하고 바닷바람에 몸 말려

염 화장에 뽀얀 얼굴 빛날 때

 

외갓집 왔던 어린 아이린

예쁜 돌멩이 한 쌍을 가슴에 품고

몽돌 소리 귀에 담아 미국으로 갔다

 

거친 파도가 쳐도

은은한 달빛에도

소리가 멎은 적막한 바닷가

 

비행기 타고 태평양 건넜던 검고 하얀 바둑돌

외로웠던 이민생활 아픔의 기억으로

애처로운 마음에 한려해상공원으로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온 몽돌

모래알 될 때까지

파도에 몸을 뒹굴며 다시 노래 부른다

 

 


 

 

최진자 시인 / 신포동에 가면

 

 

연인이 생기거든 신포동에 와 보세요

잠방이에 배었던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더욱 짠 바다

맥아더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에서 마음을 열어 바다를 보세요

 

동창을 만나거든

키네마 담벼락으로 들리던 ‘벤허’의 전차 경주와

동방에서 울리던 ‘대전차군단’의 군화 소리를 찾아보세요

 

바다와 하늘의 문이 있고, 레일이 눈부신 곳

파도 소리 들으려 조곤조곤 얘기하는 곳이고요

옛 그림자 상처 날까 뒤축 들고 걷는 데입니다

 

풍경이 오십 년 전인 것은

부두 노동자들의 힘겨웠던 삶을 간직하고 싶어서입니다

뱃고동 소리 듣거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주세요.

 

이곳은 개항지로 근대유물이 바지락처럼 널려 있는 곳

근대식 공원과 박물관, 기상대, 실내 공연장, 등대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백 개가 넘는 현대의 길목이었다는 걸 아시나요

 

어머니 혈관 같은 골목을 돌아 나와

카페 마고에서 커피 향과 바이올린 선율을 들으면

숨결이라도 남기고 싶을 겁니다

 

 


 

 

최진자 시인 / 월미도

 

 

왜 반달 꼬리였을까

너무 밝아도 어두워도 안 되니까

환하면 물안개꽃 사라지고

깜깜하면 별들이 사라지니까

 

가을 날 바다에 빠진

반쪽 달 찾으러 그 섬에 내려

푸르고 붉은 황옥과 비취색에 취했다가

파도 소리에 놀라 자국을 남겼네

 

인천 상륙 때는 일곱 그루 나무만 남은 섬

달의 표면처럼 얼룩졌던 월미도엔

모노레일이 들어서고

놀이기구 타는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에 물새가 자지러진다

 

 


 

 

최진자 시인 / 물풍금소리 사라지다

 

 

태백 검룡소에서 먼 길을 돌아 송현 배수지로

하늘의 샘이 집안으로 들어온 날

물지게는 광 구석에 걸리고 물초롱은 엎어지고

아녀자는 꿈인가 생시인가 어제와 오늘이 백 년일세

요술 수도꼭지 잠궜다 푸니 진주 같은 물알이 콸콸콸

 

해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

여인들의 하소연들로 시끌벅적

여럿이 물 풀 때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풍금 소리

빨랫 방망이질로 뭉친 마음 풀어내던 곳

배다리와 싸리재 근처 애환의 용동 우물

 

상수도 시설로 북청 물 장수는 아니더라도

물지게로 도움 되던 고학생들 일자리는 사라지고

풍속도 변천하여 물동이 인 여인의 모습 기록사진일 뿐

마중물로 펌프질이 깨우친 주고받는 교훈도 여기까지

노래하는 분수대는 즐거워 춤춘다

 

-시집 『신포동에 가면』, 시와표현, 2018.

 

 


 

최진자 시인

2017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하얀불꽃』, 『신포동에 가면』, 『집으로 오는 그림자』 출간. 현재 서예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