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채이 시인 / 그렇습니다 기린입니다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0. 08:00
채이 시인 / 그렇습니다 기린입니다*

채이 시인 / 그렇습니다 기린입니다*

​​

기린, 하려다

내가 기린에 대해 아는 게 뭐지?

싶었다

햇빛이 불고 호수의 머리칼이 휘날린다

공원의 나무들만 공유하는 일화처럼

꽃이 졌다는 이유로 가버리는 사람과

꽃이 졌다는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생긴다

그러고 보면

호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커다란 술잔 같다

장미터널에서 나온 사람들이

우리의 그림자를 떠밀었다

가시에 찔려도 그들은 시끄럽고

아이들은 늘 모여 있다

모여 있지 않은 아이는

어른보다 빨리 눈에 띈다

전에 여기 죽림(竹林) 있었던 거 기억해?

죽림? 모르겠는데.

카톡을 하느라 너의 손은 수다스럽다

기린이라고 했어도 너의 손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서정국 화가의 작품이었어 철로 만든 대숲

정말? 그런 게 있었어?

일회용 커피에 털어 넣은 햇빛이나

점점이 사라지는 자전거 따위를

골똘히 바라보며

나는 다른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건 지극히 부드러워 지나간 줄도

모르는 슬픔 같다

세 마리 다섯 마리 또 세 마리 두 마리

호수 속을 헤엄치는 비단잉어들의 시차처럼

더 잘 보기 위해 한 사람이 필요한 아이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 아이가 필요한 사람이

모일 것이다

모인다

너무 오래 변하지 않는 것들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호수가 천천히 문을 닫기 시작했다

숨을 쉬고 발을 움직였다

아까보다 목이 조금 자란

그림자인 나는

​​

* 박민규의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변용.

​―계간 《詩하늘》(2025, 가을호)

 


 

<2025년 상상인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시>

채이 시인 / 그린, 란드

 

 

커피를 놓으면

그린란드 식탁이 된다

 

금방 명확해지지 않는 도형처럼

 

대륙이어서 너는 무언가 안정된 느낌

넓은 섬이어서 나는 무언가 잘못된 느낌

 

얼음의 나라인데

왜 푸른 초원이라고 부를까

 

그곳의 어법을 다는 모르지만

 

밥물은 항상 손등을 넘어가고

커피를 쏟으면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지켜보기 쉬워서

 

우린 평등하다

 

어떤 모양이었더라? 더 깊게 생각하면

그린란드가 미세하게 붕괴되기도 한다

팔꿈치를 오래 괴었던 쪽일 것이다

 

그곳의 겨울엔 낮이 없대

그럼 풀들은 어떻게 봄을 알까?

 

같은 곳을 보는 자세가 슬프면

조금씩 다르게 듣게 된다

 

커피물이 팔꿈치에 닿는다

약간 뜨겁고 많이 축축하다

눈에서 흘러내린 것처럼

 

너무 오래 걷다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잊은 적도 있고

잔상을 따라 걷다가 여행자가 되어버린 적도 있다

 

빛이든 어둠이든

어딘가 고장 난 데가 있어야 자연스럽다

 

나는 그린란드를 세우고

너는 그린란드를 버리며

 

우린 말 없는 나라에 도착한다

 

 


 

 

채이 시인 / 적설積雪

 

 

발음에 눈이 내린다

 

먼 곳의 소문을 위해 등을 구부리는 저녁

가난한 나무에서 허공보다 느린 춤이 새어 나온다

 

한 사람을 닮은 침대가 있다

모두 아는데 나만 모르는 삐걱삐걱 소리가 가엾다

 

길거리 복권 집

행운을 퇴고하는 긴 노래가 서 있다

가게를 나서는 사내가 손에 쥔 희망 한 장을 유심히 쳐다본다

자신이 실패한 횟수가 적혀 있는 것처럼

 

매번 같은 자세로 쓰러졌다

 

슬픔이 처음부터 설계된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구두 밑창이 항상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은

의심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의 층계가 기다랗다

골목은 계속 이어지고 눈은 쌓이고 계속 쌓이는 눈들

벽 같은 밤을 끌어안으며 어떤 말을 백 번 해 볼까

고르다 돌아눕는다

 

나는 침묵을 배운 적이 없었다

침묵이라 쓰며 침묵을 배우는 동안

 

여전히 도착하지 않는 하얀 말이 있다

 

 


 

 

채이 시인 / 비욘드 사일런스

 

 

세이렌은 암초가 많은 곳에 산대요

어부를 유혹하지 못하면 꼬리부터 물거품이 된대요

정말 그렇다 해도 슬프지는 않아요

장래 희망도 아닌데

 

애인의 마지막 자인 ‘세’로 시작하는 단어, 많고 많지만

세이렌은 스타벅스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며

삼행시는 흐지부지 끝나곤 했죠

 

창밖으론 공장단지가 낙엽처럼 엎드려 있고

 

겨울이 오기 전

아파트는 닥트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래요

애인에게도 새로운 습관이 생겼어요

내 몸을 헤엄칠 때면 볕이 센 해안 도로나

추운 나라의 고원을 중얼거렸죠

생각하면 모두 지붕 없는 곳이었어요

 

그곳에도

버려진 목장갑에 쓰인 이름을 보며

누구였지, 갸웃거리는 일이 있을까요?

 

기억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이름으로 삼행시 짓기

 

이곳에서 내가 발견한 놀이라고

노래할 수 있다면 불러줄 텐데

나의 획은 따끔따끔하니까

 

애인의 입속을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이국의 흙냄새와 나뭇잎에 젖습니다

억양에서 물이 새고 있군요

때론 찻잔이나 접시가 깨지는

파동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붕이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듣지 않는 것보다 묻지 않는 것에서

비참을 들키는 게 우리의 약점입니다만

세상은 한순간도 고요한 적 없이

내가 아닌 곳으로 흐릅니다

 

엘리제*가 야근을 독려합니다

애인은 벌써 하나의 암초를 골라

꼬리지느러미를 말리고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달팽이가 빠져나간 말이 금세 건조해집니다

 

*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채이 시인 / ㅁ

 

 

 ㅁ이 풀어졌다 평소의 필체일 뿐인데

 새 영수증에 면옥이라고 바르게 표기한다

 

 각자 이해했던 앞모습도 검정 서로 오해했던 뒷모습도 검정

 손잡은 각들은 모두 다르고 전부 닮아 차라리 환하다

 

 ㅁ의 구조를 잘 알고 있지만 바깥의 물이랑은 힘이 세다

 창문부터 밝은 색상의 지붕과 담을 두른 단층집들,

 건너뛰지 않으면 함몰될 것 같은 순간까지

 ㅁ이 사천 바다에 부드럽게 일그러진다

 하얗게 부서진다는 건 저렇구나

 수골실에서 본 당신의 빛깔처럼

 

 어쩐지 화장장이 있는 동네는 인사법이 따로 있을 것 같다

 이곳에 도착한 햇빛과 바람은 한 가지 방법으로 울기 때문이다

 

 그림자들이 그림자를 거두며 정오를 계속 늘이고

 잦아드는 수저 소리, ㅁ은 얼마나 둥그스름해져야 ㅁ이 아닐까

 

 거룩의 체온은 의외로 차가워 손을 잡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라는 건 혼자 죄짓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라 기도처럼 되어버린다고

 

 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어딘가로 또르르 굴러갈 것만 같은 선의 끝에서

 내일 다시 만나, 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의 망막은 죽은 후에도 마지막 상을 어렴풋이 머금는다는데

 

 두렵나요? 내 눈을 통해 보는 당신의 배웅이

 비어버린 안이 어느새 바깥이 된다

 검정들이 씻겨갈수록 당신은 점점 어두워진다

 그건 긴 세계를 알지 못해 언제든 닫을 수 있는 문을 가진다는 것,

 걱정 말아요 나는 자주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두 팔을 모은 채 엎드릴 거니까

 혼자는 드물고 둘은 흔한

 

 각들이 허리를 일으켜 선영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굳게 닫힌 ㅁ 속에서 당신의 뼈는 아직 따듯하다

 

 


 

 

채이 시인 / 마다가스카르 클럽

Madagascar Club

 

 

햇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했어

베란다에서 시들어가던 대파가 생각나서는 아니야

 

어깨는 별것 아닌 일에도 와르르 무너지니까

빛으로 자주 주물러줘야 해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정말 딱 한 번 죽고 싶었다는 항목에서

한 칸 밀려 체크했다는 걸 알았어

 

잘되길 빌어주지 마

내가 잘못된 사람 같잖아

 

일기를 쓰면 날 위해 웃어준 적 없는 이름이 꼭 등장하고

철 지난 옷을 내놓을 때마다 그걸 입고 만나지 못한 이들을

둘둘 말아 버리는 느낌이야

그것이 원하지 않은 세계와 탈 없이 지내는

나의 원근법

 

집집마다 베란다는 있고요

오늘의 식재료는 싱싱합니까?

때론 나 같은 뉴스가 떨어지기도 하던데

껴안는 습관으로 예방이 된다고요?

 

안정제를 삼켜야겠어

알록달록은 항상 세 가지로 나뉘지

좋다, 나쁘다, 침묵

 

대파를 버렸는데도

손에서 오래 대파 냄새가 나

 

시든다는 건

날짜 셀 일 없는 것들의 힘일까 아무 일 없는 것들의 힘일까

마다가스카르에선 기상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던데

 

딱 한 번,

웃는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이가 죽기를 바라며

열 손가락 밖의 이름들을 세었어

안의 이름들이 너무 어두워서

 

 


 

채이 시인

경남 하동 출생. 2025년 《상상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되어 시문단에 등단. 2012년 문장 웹진 공모전 산문부문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