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초선 시인 / 채소를 다듬다가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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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초선 시인 / 채소를 다듬다가
채소를 다듬어본 사람은 알리라 밭에서 갓 캐어 왔다는, 채소를 다듬다 보면 먹을 수 있는 속잎보다 먹을 수 없는 겉잎이 더 많았을 때, 속상했던 기억을...
한 뿌리에서 돋아나 속잎과 겉잎으로 갈라지는 채소, 우리네 삶의 가지에도 진짜와 가짜는 태어나는 법 그래, 어쩌면 꼭 필요한지 몰라 속잎을 보호하기 위한 겉잎으로...
진짜와 가짜, 예부터 귀하고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조상들 그 얼이 지나친 탓일까 세상 어느 장소 어디를 가도
가짜가 진짜를 주름잡고 화려한 조명발 받는 세상 사라져가는 것은 쓸쓸한 진짜들의 뒷모습 잃어버린 진짜들의 설 자리 바람과 햇살이 부족한 이 땅에서 몇 안 되는 속잎마저 말라버린다면 속잎이 없는, 먹을 수 없는 겉잎만으로 자라나는 쓰레기밭을 가꾸는 세상이 될까 그 것 이 두 렵 다
-제24회 시인정신 시낭송회 엔솔로지
강초선 시인 / 구멍
어느 날 그릇의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자리 우연한 구멍 하나 그릇 바깥에서 보는 구멍은 새의 발자국 하나, 바람의 손바닥 하나 앉힐 수 없는 구멍으로 구멍인 그저 작은 구멍이겠지만 그릇의 안쪽에서 보는 구멍은 하늘물길 다 퍼 담을 수 있는 구멍 아닌 구멍인 커다란 구멍이다 그 구멍이 혀 밑에 감추어둔 말의 적막이고 적막의 카페 열린 방이고 그 구멍이 바로 새의 길이다
강초선 시인 / 황금빛 단내
호박전을 굽는다 지글거리는 후라이팬 속으로 툭, 옥상의 호박이 굴러들고 윙윙 벌들을 미치게 하는 황금빛 단내, 벌거벗은 여인을 황금빛으로 그렸던 황금빛 유혹에 미친 구수타프 클림트 '키스'의 연인을 둘러싼 황금빛이 여자의 어깨에서 남자의 발목까지 옥상에서 후라이팬까지 황금빛을 둘러싼 황금빛 안개가 키운 황금빛 덩굴이 치렁치렁 매단 둥굴넙적한, 새끼를 잘 낳을 거 같은 엉덩이 떡 벌어진 호박이 달빛 아래 숭덩, 새벽별 보고 숭덩, 낮달 아래 숭덩, 해거름 땅거미에 숭덩, 숭덩 낳은 새끼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이쁜 내 새끼들이 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된장찌개 맵싸한 식탁 위에서 부글부글, 시원한 냉국수의 고명으로 오색 무지개떡으로 방앗간을 들락날락하는 가난한 흥부에게 복이었던 박 부자인 놀부에게 불행이었던 박 호박이 넝쿨째 뒹굴고 있는 옥상은 지금 클림트의 연인들이 꿈꾸는 황금빛 화려한 꽃밭이다 -시인정신 2011년 겨울호
강초선 시인 / 나목에게 한 여름 무성했던 소문들 비바람에 꺾여진 잎새들 다 떨구어버린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비로소 홀로인 긴 잠의 침묵으로 함묵한 네 입술을 쪼아대던 참새떼 바람조차 감히 근접할 수가 없구나 그랬었구나! 지독한 외로움이 외로움이 아니듯 철저한 홀로는 홀로가 아니지 머잖아 함박눈이 내리겠지 발가벗은 네 머리 어깨 위에도 흰눈은 내려 말간 네 영혼은 하늘을 닮아 가겠지 이제 넌 시작과 끝의 중간에 서 있어 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차가운 네 이성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뜨거운 피의 소리가 들리고 있지 않니 조만간 드러날 네 몸의 이상한 조짐 가려운 겨드랑이를 누구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돼 봄이 오기도전 낭자한 곡성으로 떨어지는 성급한 목련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돼 쉿, 넌 기다려야해 반드시 오고야 말 너의 봄을...
강초선 시인 / 문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연다
문을 열면 앞마당 뜨락이 보이고 후박나무 잎사귀와 골목길 전봇대가 보이고 허공을 차올리는 동네 아이들 싱싱한 종아리가 보이고 문을 열면 문을 열면 큰 도로가 보이고 차선을 따라 질주하는 자동차와 가로수길 낙엽의 연서가 길 건너 간판집 네온싸인에 비치는 육교가 보이고 눈 뜬 장님이 걸어다니는 지하도가 보이고 지하터널 깊숙이 기어드는 전철이 보인다.
문을 열면 늙은 어머니 쌀 씻는 소리 부뚜막에 앉은 등굽은 바람이 보이고 삽짝 밖 개 짖는 소리 군불 식은 아궁이의 산망개 붉은 가시가 보이고 문을 열면 퍼덕이던 날개의 빈 둥지가 보이고 밤꽃 향기 뒷모습 감추던 모자가 보이고 문을 열면 벽 사이 걸어 다니는 어둠의 발뒤꿈치가 보이고 복도 끝에서 웅크린 꺼내보지 못한 기억들, 다락방 쌓인 먼지들의 재채기가 보이고 문을 열면 문을 열면 달밤에 가부좌 털고 앉은 민둥머리 적막이 보이고 적막의 왕소금에 구운 고요가 눈처럼 쌓인 문, 을, 열, 면, 네가 보이고 내가 보이고 빗물에 씻긴 말간 세상이 보인다.
강초선 시인 / 비누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 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강초선 시인 / IMF풍경 3 -노숙자
양지의 꽃들 환한 웃음 창 너머 불빛 퍼져갈 때 풀은 오늘도 혼자 울었다 그 울음 들판을 적실까봐 애기똥풀 놀란 잠 깨울까봐 풀은 속울음 몰래몰래 꺼내 울었다 바람머리 맞은 뽑히지 않는 파편 음지에서 음지로 웅크린 발가락 먹구름 천둥 속에서 울음이 키운 것은 제 몸보다 커진 가슴이었다
강초선 시인 / 몽시신유(夢是神遊)
중국에 훤제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꿈 해몽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임금은 그가 얼마나 꿈풀이를 잘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한 가지 꿈을 지어냈습니다. 임금은 해몽가를 불러 처마의 기왓장 하나가 난조(鸞鳥)라는 새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지어내어 그것을 풀이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해몽가는 후궁들이 문제를 일으켜 잘못 하다가는 생명이 오고 가는 수가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은 그것은 자기가 정말로 꾼 꿈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이므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후궁들이 서로 싸우다 물건을 잘못 던져 한 명이 즉사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임금은 너무나 이상해서 해몽가에게 그 꿈은 자기가 지어낸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해몽가는 꿈이란 바로 몽시신유(夢是神遊)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꿈이라고 하는 것은 몸은 잠자고 있는데 정신이 노는 것이란 말입니다. 잠 잘 때만 꾸는 것이 꿈이 아니라 한 생각을 일으켜서 이것저것 망상을 지어내는 것이 바로 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곧 꿈인 것입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생각을 함부로 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망상으로 뒤덮여 살아가는 상황이 바로 신유입니다. 또한 꿈 속의 자신도 참 모습이 아니며, 꿈을 깼을 때의 모습도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다른 모습을 자아내는 그런 주체가 곧 불성이며, 진아이며, 참 주인공인 것입니다.
흔히 '말이 씨가 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이 바로 몽시신유(夢是神遊)라는 게지요 김유신 장군의 두 여동생, 언니의 꿈을 사서 김춘추와 결혼을 한 이야기도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등이 바로 몽시신유(夢是神遊)가 아닐까요 긍정적인 의미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 건강하다'라는 신유 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기가 강(정신이)한 사람 일수록 현실이 될 가능성은 커다고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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