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심수향 시인 / 저문 갈숲에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1. 08:00
심수향 시인 / 저문 갈숲에서

심수향 시인 / 저문 갈숲에서

 

 

11월 마지막 날이 갈잎소리로 저문다

가야 할 길이 반 마장 더 남았는데*

혼자 부르며 오던 소리는 동이 났다

신명 잃어 멈추어선 내게 갈숲이 소근거린다

소릴 잡아, 소리를 놓칠 때 길을 잃는 거야

갈잎들이 제 소리를 내 손에 쥐어준다

 

갈숲에 어스름이 느릿느릿 머뭇거리는 사이

뻘게 한 마리 구멍 집으로 쏙 들어간 뒤 문을 닫는다  

이슬이 차디찬 물방울 집 한 채 지으려

갈대꽃잎 끝에 앉아 간곡히 청한다

수굿해진 갈꽃을 보고 하늘이 천천히 문을 닫는다

 

눈앞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빠르게 사라지고 길이 더 빠르게 사라졌다

몸이 벌레처럼 자꾸 안으로 말려든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싶을 때 문득

어둠을 열고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 뻘게 생각이 난다

 

누가 내 어깨를 서늘히 짚는다

고개를 들자 다시 몸이 펴지고 귀가 열린다

나팔꽃만큼 열린 귀로 멈춘 노래가 정갈히 쏟아져 들어온다

어둡다고 소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늘하고 깊은 소리 길에는 휘움한 윤이 돋아난다  

열려야 할 것이 눈만이 아니다, 이 밤 가야할 길

반 마장이 닷 마장이 되어도 걱정 없다.

 

*민영 시인의 시 ‘봄들에서’빌려 씀.

 

 


 

 

심수향 시인 / 등식等式

 

 

1

 지중해에서 에게해로 흘러드는 뒷골목, 돌계단 밟고 오는 행렬의 고양이와 낡은 뒷방에서 물담배 한 모금 빨다나온 창부 같은 고양이를 보았지. 늘어진 뱃살 출렁이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고양이와 잘 데워진 돌담 위 네로처럼 누운 고양이까지 뭍 여자가 아른대는 수백 마리 고양이,

 

2

 삼천오백 년 전, 청동 고양이 비스테트를 빚은 장인 역시 어쩌면 제 속의 여자를 빚어냈을지 모를 일, 햇살 환한 신전 높이 모셔두고 비밀의 여자로 빙그레 올려다보았을지 모르지, 런던 한 박물관에서 깊이 끌렸던 바스테트의 동그랗게 빛나던 코걸이, 나는 몇 번이나 내 코끝 만지작거렸는지

 

3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검은 고양이 눈에 설핏 번지던 우울

 고개 떨구고 걷는 고양이 뒤를 따라

 고양이와 여자와 여신 사이 등식

 썼다 지웠다 지웠다 썼다

 비파 꽃처럼 안개에 젖어

 컴컴한 바다 쪽으로 내려갔었지

 내가 잠시 여자로 돌아왔을 때.

 

—시집 『살짝 스쳐가는 잠깐』(시학, 2018)

 

 


 

 

심수향 시인 / 염치

 

 

꽉 여문 호박 따러 갔다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네

조금 더 익으면 죽 한 솥 끓이고 싶었던 꿈

솥째 날아가 버렸네

도무지 그 실실했던 호박이

잘 받아먹던 밥사발 엎은 이유

농사짓는 친구에게 전화 넣었더니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덜어주려

밥술 놓은 거라 일러주네

숟가락 놓는 일은 포기라고

밥상머리서 눈물범벅 삼켰던

아버지의 밥상 희미하게 떠오르네

새파란 머리 쳐들고 벋어가는 줄기 뒤에서

슬며시 밥술 놓았을 둥근 호박

누렇게 뜬 알로카시아 넓은 잎

진학을 포기하고 돌아선 숙이

그들이 내려놓은 밥술 호박밭에 빛나네

튼실한 숟가락 내려놓지도 못하고

나 오래 오래 서 있기만 했네

 

『두레문학』2015. 상반기 제17호

 

 


 

 

심수향 시인 / 나이

 

 

사람의 수명이 독수리보다 길다는 걸

믿었기에 나는 나이 40개를 쪼아 먹었네*

내가 독수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

다시 20개를 더 부수어 먹었네

내가 먹은 나이의 껍질은 내 부리에 쪼아져

바스러진 세월이 되었네

날카로운 것은 날카로운 만큼 상傷하는 법

어느 틈에 내 부리 깨지고 뽑혀져 버렸네

욕심처럼 나는 새 부리가 돋길 기다렸네

새 것은 오지 않고

습관으로 쪼아 먹으려 돌아다녔네

쉽사리 쪼아지지도 않고

혀만 남은 입속으로 미끈 밀려들어오는 나이

말랑말랑한 슬픔 같은 것이

달콤해지는 나이

나이란 쪼아 먹을 먹이가 아니었네

혀끝으로 핥아도 흠이 가고

소리 없이 몰래 먹어도 안타까워지는 것인데

날카로운 것이 모두 닳고 뽑힌 후에야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맨살로 먹는 나이

깊숙이 숨겨두고 야금야금 아껴 먹는 나이.

 

 


 

 

심수향 시인 / 양미리가 있는 풍경

 

 

그 여자 짚 두름으로 묶인 양미리 빼내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컴컴하게 늙어 물컹물컹한 제 뱃살 만져보며

바다보다 더 깊이 절망했는지 모른다

어설픈 짚 가닥에 엮인 생이 여기 또 있다니

쉽게 늙어버린 자신을 태우듯

양미리 굽은 등을 불판 위에 던졌을 것이다

 

양미리가 익어가는 동안

양미리, 아픔 꼭꼭 참는 작은 여자 같아서

양미리, 부르다 보면 쉬운 여자 같아서

양미리, 쉬워서 늘 슬픈 여자 같아서

여자는 양미리처럼, 푸른 바다를 향해

>>>>>> 모습의 기호로 누워 버렸을 것이다

 

여자가 저녁 찬으로 양미리 몇 마리 굽는 동안

여자는 조개탄에서 새어나오는

달콤한 죽음의 냄새 분명 맡았을 것이다

그 순간일 것이다, 여자는 생을 친친 묶은 두름을 풀고

양미리와 함께 바다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아니 벌써 푸른 바다에 첨벙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검게 타 숯이 된 양미리와

자신이 돌아간 곳을 기호로 남긴 몸을

사람 사는 지옥에 남기고

 

 


 

 

심수향 시인 / 사월

 

 

장생포에 갔었네

고래는 먼 길 나가고

바다 저 혼자 놀고 있었네

높새 비집고 나온 여린 손이

만의 옆구리를 간질이고

휘어진 저 편을 보고 있는 장생포

가슴의 불 쏟으며 저녁이 오고

아린 속살 끌어안던 파도가

봉뎅이 * 정통 맞은 징처럼

한 판 세상을 뒤엎고 말았으니

식어가는 거리로 불 퍼내던 장생포

봉인 풀린 기억 틈으로

상팽이들* 떼로 몰려와 혈관 속

배꽃처럼 터지는

사월, 다시 장생포로 가야겠네

 

*봉뎅이- 징채가 닿는 부분

*상괭이- 쇠돌고랫과에 속하는 여섯 종류 중 하나

 

-동인시집 『봄시. 3집』 2014년

 

 


 

 

심수향 시인 / 십일월, 詩ㅂ一月

 

 

아파트 뒤뜰 큰 나무 아래

ㅂ자로 생긴 자루 하나씩 놓여 있다

 

그 속에 그득한 형형색색 마른 잎사귀는

나무가 오래 궁금해 하던

크고 작은 물음표이며 답이다

 

시를 찾는 내 마음 아래

ㅂ자 자루 하나 놓는다

 

그 속에 몸을 찾지 못한 시의 물음이

저희끼리 부대껴 바스락거린다

 

십일월은 詩ㅂ一月

시의 자루를 탈탈 털어 보는 달

 

시들어 마른 후에야 듣게 되는

내 영혼의 소리 듣는 달

버려야 시가 되는 소리 듣는 달이다.

 

 


 

심수향 시인

1949년 울산 출생. 2003년 <시사사> 신인상.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울산 학성여중, 동여중, 중앙여중에서 근무. 시집 <중심> <살짝 스쳐가는 잠깐>. 한국시협. 숙명문인회. 펜마을울산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