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 시인 / 가을 강물 소리는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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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시인 / 가을 강물 소리는
이제는 나도 철이 드나 봅니다,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는 치맛귀를 붙잡고 이대로 그만 가라앉거라, 가라앉거라 타일러 쌓고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일어나 모처럼 핏줄도 돌아보게 합니다 함께 살다 흩어지면 사촌이 되고 다시 가다 길을 잃어 남남이 되는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지금은 내왕이 끊긴 일가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고 가면 바다가 벼랑처럼 있어 거기 함께 떨어져 만난다고 하지만 죽어서 가는 천당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가을 강물을 보면 문득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즐펀히 너브러진 물줄기가 심장으로 고여서 땀으로 눈물로 이슬 맺는 은혜 가을 강가에 서서 나는 모처럼, 과묵한 해 그림자 갈대 그늘을 따라가면서 잠겨 들면서 내 목숨 좁은 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향아 시인 / 꽃다발을 말리면서
누가 내게 이와 같은 슬픔까지 알게 하는가 꽃이 피는 아픔도 예사가 아니거늘 저 순일한 목숨의 송이 송이 붉은 울음을 꺾어다가 하필이면 내 손에서 시들게 하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꽃은 매달려서 절정을 모으고 영원히 사는 길을 맨발로 걸어서 이렇게 순하게 못 박히나니 다만 죽어서야 온전히 내게로 돌아오는 꽃이여 너를 안아 올리기에는 내 손이 너무 검게 너무 흉하게 여위었구나
황홀한 순간의 갈채는 지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빈혈의 꽃과 무심한 벽과 굳게 다문 우리들의 천 마디 말뿐 죽어가는 꽃을 거꾸로 매다노라면 물구나무서서 솟구치는 내 피의 열기, 내 피의 노여움, 네 피의 통곡, 꽃을 말린다 입술을 깨물고 검게 탄 내 피를 허공에 바랜다
이향아 시인 / 그 애
청댓가지 붙잡고 몸을 떨던 그 애 네거리 모퉁이 술가겟집 딸 귀먹은 그 아비 고래고래 악을 써 청댓가지 잡으면 콧소리도 슬프던 늪처럼 잡아끄는 이상한 향내 젖가슴 일찍 벙글어 비밀도 많고 홑 잠방이 바람나게 달음질치면 눈앞 아찔하게 출렁대던 가슴 청댓가지 붙잡고 점을 치던 그 애 술가겟집 홀아비 외동딸이던 넓으나 넓은 세상 철모르던 클레멘타인
이향아 시인 / 버릇된 가난
나도 모르게 버릇이 되었나 보다 요즘은 남의 외투를 걸친 듯 더러 서툰 일이 생기고 뒤꿈치가 벗겨질 듯 미끄러운 신발 거리는 타관처럼 낯선 얼굴로 넘친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가 마음 편하기로는 가난만한 것이 없는데 거기 질이 나서 모자람 없이 살았거늘 이제 새삼 무얼 바꾸랴 아무리 일러줘도 부자들은 모르는 아랫목 이불 깔린 구들장 같은 발뻗고 기대기 은근하고 수더분한 그러다가 금세 눈앞이 젖어드는 그보다 좋은 세상 어디 있으랴만 나도 모르게 가난을 벗으려고 했나 보다
이향아 시인 / 어디서 누가 실로폰을 두드리는가
옛날에 놓쳐 보낸 풍선 하나 있었지 그 후로 가끔가끔 우러르면 하늘에 꿈처럼 돌아와 떠 있기도 했었지
오늘은 참말로 돌아왔나 보다 맑은 바람 실비단 목도리처럼 걸려 있는 살구나무 흰 가지에 그때처럼 푸르게 아련히 떠서 죽어라고 저 하늘에 손짓하고 있나 보다 이 세상에 없는 누굴 찾고 있나 보다 어디서 누가 실로폰을 두드리는가 딩동동 동동딩 서투른 음계 소리 내며 흐르는 개울물 물이랑에 그립다고, 그립다고 이름을 쓰나 보다
찰랑찰랑 영근 우리말 닿소리로 흘러가나 보다 바다로 가나 보다
안개비 사이 하나둘 가등이 켜지고 젖빛으로 풀리고 싶은 고즈넉한 봄날 저녁 나는 공연한 일에 가슴이 뛴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깊었는지 나는 참, 아이처럼 가슴이 몹시 뛴다
이향아 시인 / 흐름
우리는 다시 갈라섰다 노둣돌에 닿아도 앵도는 물길처럼 우리는 갈라서서 회로를 달리했다 지푸라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걸핏하면 등을 돌려 아득해진다 꽃들은 떠나온 씨방으로 돌아가려고 낮은 땅 흙바닥에 잎을 떨구고 바닷물도 머언 별을 연모하여 들썩거리지만 갈라서는 건 분수껏 흐르기 위함 분수껏 흐르다가 아주 합치기 위함이다 거꾸로 치솟아 척 짓지 말기 검푸른 울혈은 다스려 복종하기 순행이 시원치 않을 때마다 하나가 죽어서라도 하나를 살려내야 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무쳐야 하는 흐름 앞으로 걷는 일도 쉽지가 않다 흐르다 갈라서고 갈라섰다 다시 흐르기 세상만사가 만만치 않다
이향아 시인 /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나는 이내 항복한다 왜 그러냐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물론 나 바쁘다고 대들지도 않는다 절대로,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거절하기가 허락하는 일보다 열 배 백 배 어렵다 내가 난장의 터진 길바닥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일순에 순종하는 것은 앞차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을 때, 접근 금지의 외마디 소리를 그의 뒤통수를 뚫고 오는 빨간 두 눈을 나는 명령처럼 받는다 돌아다보면 내게도 줄줄이 복종하는 사람들 순하게 나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 달리다가 오죽하면 브레이크를 밟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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