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현선 시인 / 바람의 기원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1. 08:00
최현선 시인 / 바람의 기원

최현선 시인 / 바람의 기원

 

 

빨갛게 익은 목,맨드라미를 쥐고 흔들면

촘촘히 접혀있는 바람의 결이 풀려나와요

 

잎 펼쳐보면 얼근얼근 닳아 뚫어진 주름치마

펄럭 일 때마다 꿈꾸고 있던 알록달록 꽃씨들이

부챗살 속에서 펴는 기지개

 

수런거리는 꽃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멀리멀리 꽃씨 떨어트리는 궁리인 것 같아요

 

아기 꽃씨를 떨어뜨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제의祭儀

아기꽃씨 바쁜 걸음걸이를 누가 막겠어요

 

내년 봄에도 빨간 꽃바람을 불게 하려면

손목에 팔랑 거리는 바람개비도 달아주어야죠

 

필요한 건 허기진 바람 수유

 

 


 

 

최현선 시인 / 시간가게

 

 

팔천 원 주고 연록의 시간을 산다

 

커피 주문을 시간 주문으로 읽는

이곳, 시간가게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커피들이

자국의 언어로 시간을 팔고 있다

 

카페창 가부터 은회색등뼈다

누굴 오랫동안 기다리면 저렇게

허연 탈색이 오는가 보다

소비되는 시간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키위의 씨가 까맣다는 것은 불길한 바닥

 

카톡카톡 마내마내 냉중저나하께

 

시간 속에 살면서 시간이 없다는 모순은

내게서 삭제되는 피의자다

 

시계와 문 쪽을 번갈아 보는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연착하고

창틀 위 굳는 촛농은 취소하고 싶은 시간들

 

시간을 팔고 사는 이곳의 풍경은

쓰거나, 시거나, 달다

 

 


 

 

최현선 시인 / 모자의 안과 나의 바깥이 만나면

비밀은 안전합니다

 모자의 안과 나의 바깥은 비밀을 지키기에 안전한 조합입니다

 

 그 사이에 뽁뽁이를 한 겹 두르면 둘 사이의 비밀은 깨질 일이 없습니다

 

 젖자마자 마르는 시간은 외부를 속이려는 절실한 핑계 비밀은 부딪힐수록 불리해져서 둘 사이는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지요

 

 모자의 안은 어둡고 나의 바깥은 쓸쓸해서 약간의 마찰은 어쩔 수 없는 일, 뽁뽁이가 터지면서 둥근 방안에 갇혀있던 비밀이 새어 나와 모자의 안쪽이 어리둥절해지고 나의 부끄러운 바깥이 드러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모자를 들어 올리면 따라오는 기분이 후끈합니다

 

 갈수록 둘 사이의 비밀은 견고해져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안전하게 지켜지는 중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만 분리되는 모자의 안쪽과 나의 바깥

 솔직해서 가벼워진 두 개의 비밀이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는 꿈을 꿉니다

 손가락 사이로 가득 차는 머리카락은 가질 수 없는 고문인가요

 

-선경해시문학회 창간호, 『상상해시작해』

 

 


 

 

최현선 시인 / 연기법

눈 내리는 밤

베란다로 나간 남편은 몰래 담배를 피운다

연기와 연기를 하는 중이다

나의 연기도 물이 올라 못 본 척한다

피우는 남편과 콜록거리는 나 사이

담뱃재 같은 눈발은 지금

가벼워지는 중일까, 가라앉는 중일까

위층 사람이 내려와 거세게 문을 두드린다

연기를 사이에 놓고 나는 어떤 연기를 해야 하나

잘 익은 사과 연기를 할까

새빨간 사과 연기를 할까

머리 위로 뜨거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위층 여자가 돌아간 후

무대에서 내려온 남편의 연기

한 달 정도의 자숙 기간을 견디더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복귀했다

유일한 관객이었던 산세베리아 마저

등을 돌리고 베란다를 떠났다

모두가 외면하는 무대에서

혼자 펼치는 진하고 독한 남편의 연기

몰려드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도 하고 약속도 하면서

나의 하루는 노랗게 타들어가고 있다

 

 


 

 

최현선 시인 / 고독에 물리지 않는 방법을 따라 함

저는 세대원이 없는 세대주입니다

고독에 물리지 않기 위해 젓가락으로 밥알을 하나씩 세며 먹고

손가락 그림자로 모모 양 모모 군으로 불리는 새들도 키웁니다

화분의 잎사귀마다 얌마 임마 같은 이름을 지어 불러 보고 실시

간 업데이트되는 쇼핑몰은 한밤의 데이트가 됩니다

세탁실의 섬유유연제는 피죤 이모다우니라 이름 붙여 이모의

손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편지지의 꽃들에 안부를 묻고 몇 줄의 가난한 아침을 열기 위해

밤새도록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당신과의 일을 떠올리며 파란 매니큐어를 바르고 잠깐 설레 보

기도 합니다

오늘은 애인 무덥에서 2분 울고 세 시간 걸어와 손톱을 물어뜯

으며 소파 밑의 고독을 꺼내 발로 밟았습니다

이제 살 만하냐고요?

 

 


 

 

최현선 시인 / 이 때

 

 

할 말이 많아서

너는

하얀색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구나

 

궁금한 게 많아서

나는

네 모자에 빨대를 꽂고

테두리를 따라 휘휘 젖는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지

예를 들면

너는 목까지 이불을 덮어야 잠이 오고

나는 이불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야 잠을 자고

 

휘젓던 빨대를 들어 올리면

멈칫멈칫 딸려오는 네 입술

카푸치노라면

예쁜 그림이 있어야지

 

네 모자에 우유를 붓고

하얗게 내 입술을 그린다

 

내 입술이 더 예쁘니까

 

입이 무거운 너는

다시 모자 속으로 가라앉는다

 

성질이 급한 내가

굵은 빨대를 꽂고 모자를 마셔버린다

그러고 나면

결과는 늘 이런 식

 

벗겨진 모자의 안쪽은

언제나 어둡고, 쓴맛이고

 

네가 하려던 말이

내 입술에 하얀 털실 뭉치로 묻어서

 

손으로 실의 끝을 잡아당겨 풀어준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최현선 시인

경기도 김포 출생. 2019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펼칠까, 잠의 엄브렐러』. 현재 인천 시인협회 회원, 해시 문학회 동인, 선경문학상 운영위원. 형상시학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