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랑 시인 / 딸기와 고슴도치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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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랑 시인 / 딸기와 고슴도치 맛있다 첨벙첨벙 베어 먹는 딸기는 예쁘다 난 빨강을 좋아하는데 쨍한 하늘 딸기가 아프다 마음은 왜 털 뭉치가 아니어서 목소리가 뾰족해 딸기를 먹으면 달콤해지는 말투 딸기가 없으면 기분이 꼭 포크 같아 창문을 열면 내 잃어버린 접시들이 두둥실 떠다니는데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며 끄덕끄덕 장작난로 타오르는 심장을 두들기며 낮잠을 잔다 딸기는 친절하고 딸기는 상냥하고 난 또 왜 먹다 버린 가시투성이 얼굴만 벅벅 긁어대는지 당나귀가 아닌데 힝힝 울기 싫은데 여기는 냉동실인가 북극인가 혼잣말의 계절에 거대생선처럼 누워 가시를 톡톡 꽃게들이 귓속에서 우당탕 넘어진다 참새들은 콧속으로 우르르 날아들고 안녕! 내 몸을 떠난 공기 방울들 정말 이젠 별짓을 다 해봐도 딸기는 착하다 쉴 새 없이 뒤섞이는 구름 발자국들이 모두 돌아간 저녁에도 멍들지 않도록 잘 보살펴야 하는데 친구는 싫고 풍선껌을 씹으면 뚱뚱한 기분이 든다 ㅡ『모:든시』 (2020, 봄호)
박세랑 시인 / 쁘띠 심장마비
어머! 터질 것 같아요 젖어 부푸는 어둠을 만져 보세요 키 큰 남자들이 신나게 테니스를 치고 나는 눈곱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뜬눈으로 날아다녀요 내 몸을 후– 불면 터져 나오는 피리소리 호리병은 만지다가도 던져서 깨트리고 싶어요 비틀린 구멍에서 튀어 오른 빨간 금붕어 아물지 않은 입속에서 가시덤불 같은 아이들이 자라고 주인 없는 인형을 내다팔고 싶은데 손톱으로 생채기를 벅벅 긁어대다 모두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곳 스프링 박힌 구두를 신고 침대를 펜스 삼아 날아다녀요 이 남자 저 남자랑 뛰어놀다 치렁치렁 늘어난 발목이 시큰거려요 나는 왜 새빨간 먹이처럼 태어나서요 누가 씹고 뜯어도 심심하기만 한 걸까요 금붕어는 짓무르고 얼룩지고 뛰지 않는 심장을 발로 뻥뻥 차면서 남자들이 축구를 해요 풀숲에 떨어진 공은요 기어이 튀어 올라 도로로 뛰어들어요 질주하는 승합차들은 도무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깨진 접시 조각이 우글거리는 내 얼굴 왼쪽이랑 오른쪽이랑 흉터 모양이 달라서 한쪽으로만 킬킬 웃다가 어긋난 벼랑이 돼요
박세랑 시인 /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난 웃는 입이 없으니까 조용히 흘러내리지 사람들이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 더 아프려고 밥도 꼬박꼬박 먹고 알약도 먹어 물처럼 얼었다 녹았다 반복되는 하루 친구라도 만들어야 할까? 우동 먹다 고민을 하네 무서운 별명이라도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약 먹고 졸린 의자처럼 찌그덕삐그덕 걷고 있는데 사람들은 화가 나면 의자부터 집어던지네 난 뾰족하게 웃는 모서리가 돼야지 살아본 적 없는 내 미래를 누가 부러뜨렸니! 약국 가서 망가진 얼굴이나 치장해야지 뒤뚱뒤뚱 잘못 걸어야지 난 은밀한 데가 조금씩 커지고 있어 몸은 축축해 곰팡이가 넘치는 벽이 되려고 해 사람들이 깨트리기도 전에 계란 프라이처럼 하루가 누렇게 흘러내리고 탱탱하게 익어가는 구름들아 안녕 누가 좀 만져주면 좋겠지만 뚱하게 걷다보면 장대비가 내리고 집에 뛰어들어가도 계속 비를 맞는다 터진 수도관을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난 자꾸 흘러 넘치는데 바닥을 닦아낼 손이 안 보이는데 갈 데가 없어 혼자 미끄럼틀을 타면 곁을 지나가던 어깨들이 뭉툭 잘려나가지 떨어진 난,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겠지만
박세랑 시인 / 아름다운 과거
짓밟힌 잔디처럼 누워 있던 목소리가 이곳저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여름의 잡초처럼 녹색으로 물들던 상처들 점점 번져가다 파도가 된다 덮쳐오는 슬픔과 밀려드는 과거 사이에서 파도는 한 자락씩 푸른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홀로 서 있던 빨간 등대가 늑대들에게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면 우거진 여름 안에서 구불구불 날아드는 늑대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이 보름달처럼 높이 떠오르고 우울이 거대한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온다 계속해서 덮쳐오는 해일과 파도 속에서 이야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네 숨겨오던 불온한 상처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지 잠잠히 듣고 있던 당신의 동공 속에서 슬픔이 망각의 비로 흘러내린다 잔디와 파도와 늑대가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간다
-시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문학동네, 2021)
박세랑 시인 / 빗자루
미용실에 가면 전지가위 입에 물고 있는 언니를 조심하자
눈이 퀭한 나무막대처럼 빠진 이를 드러내며 난 거울 앞에 앉았다
악몽은 전염되는 거 몰랐어?
밤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눈앞에서 흔들어대고 언니는 가위를 휘두르는데
뒤엉켜서 뚝뚝 끊어지는 발음으로 사람들한테 말도 걸고 밥도 먹고 여기저기 어울리려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 쭈욱 미끄러지면서 악몽을 밟았는데 착한 애가 사람을 짜증나게 해 혼자인 게 무서워서 난 아무한테나 잘해준 건데 종이 인형처럼 가지고 놀다 축축하게 젖으면 아무 데나 버려지고...... 지나가던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덜덜 떨어대며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대는데 배고파서 이 사람 저 사람 걸쳐놓고 만나다가 바나나는 잔뜩 멍들어야 맛있는 거 알지 만남은 자주 범죄로 이어지고 바닥이랑 천장은 왜 이렇게 가깝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깨져서 반짝이는데 인정사정 안 봐주고 깨부수는 사람들은 똑같은 안경을 맞춰 썼는데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고통이 말해질 때도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겠지! 약 먹고 아파서 비틀비틀 쫓기다가
언니 내 머리는요?
평! 펑!
펑!
악몽은 빗자루가 되어 공중으로 붕 날아오른다
나는 왜 뒤통수를 아무한테나 맡길까...... 웃고 떠들고 몰려다니다보면 뒤통수는 왜 남아나질 않는 걸까 문은 계속해서 열려 있는데 누군가를 믿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거울 속에서
우뚝 솟아오른 담벼락을 본다
무너지고 싶어 간신히 등을 비틀어대면, 언니는 중화제를 뿌린다 전염되면 소매 끝에 악몽을 대롱대롱 매달게 될까 봐
- 월간 <현대시> 2019년 11월호
박세랑 시인 / 알리바이
나는 부뚜막에 먼저 오른 새침데기 고양이
다정한 입술로 우아하게 뜯어먹는 고등어는 맛있다
나한테 여섯 번이나 차인 남자애가 팬티를 뒤집어 입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발목을 자꾸만 배달시켜도 오른쪽보다 한 치수 작은 왼쪽을 더 좋아한 거 아니었니? 내 가슴이 짝짝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도
입이 삐뚤어진 반장 계집애가 너 어젯밤 울고 있는 내 남친 만났지? 전화기 사이로 튀어나와 사시사철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도 선생님이 출석부에 없는 내 이름 위로 좍좍 두 줄 그어도
가위로 앞머리를 자른다는 게 내 눈썹 내 면접시험 내 합격 수기까지 몽땅 베어 먹은 미용실 아줌마는 어때? 앞이 훤하지? 더 잘 보이지?
불행은 사소하고 언제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롱 래시 실크毛 가짜 속눈썹 같지만
접시 위에 늘어뜨린 나의 고등어는 아름다워
지퍼가 고장 난 옆집 오빠 얼굴을 몇 개비 피워대다 속치마를 태워 먹은 소녀들의 세계는 아찔해
얌전한 고양이는 실은 바닥을 나뒹구는 얼음 냄새가 무서워 부뚜막에서 내려갈 줄을 몰라
눈을 깜빡깜빡, 가냘픈 포즈로 처음 만난 고등어처럼 네 입술 물어뜯는데
치렁치렁 비린내가 머리카락을 땋고 있는 오늘은 화창한 소녀의 날씨
박세랑 시인 / 프랑켄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맛을 좀 아니? 나사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 불안이 피부 위로 돋아났어 그림자를 주워 입고 노을을 구경하는데 나는 왜 멀쩡한 걸까? 무서운 말도 장난처럼 찍찍 내뱉을 줄 아는데 의사는 맨날 망가질 거래 조롱하는 입술처럼 젖꼭지가 점점 더 삐뚤어질 거며 나에 관한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면 뒤집힌 물고기처럼 밤낮으로 불안에 시달릴 거래 혀를 쑥 내밀고 가로수에 매달려 지나가는 사람이나 깜짝 놀래키고 싶은데! 날개를 쫙 펼치고 찢어진 흉터처럼 날아다녀야지 시퍼런 가위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전부 오려내야지 목말라서 헐떡이는 사람을 목매고 싶게 만들어야지 켜놓은 가스불처럼 온 집안을 잿더미로 뒤덮어야지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도 삐뚤어지고 버텨야 할 중력이 내 인생을 흙탕물에 풍덩! 빠뜨리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나를 봉인하러 가야지 누가 베어간 콧대를 이어서 붙여야지 입은 왜 달린 건데? 거대한 감옥에 뚫려 있는 쪼글쪼글한 구멍이 무슨 소용인 건데? 갇혀 있던 소문만 새어나와 사방을 더럽히는데 수술대에 오르면 의사들은 링거 색이랑 오줌 색이랑 똑같다고 킬킬거리고 깨어나면 사람처럼 우스운 것들은 절대로 안 믿어야지! 겨울밤이 어두워져 사람이 사람을 닮아가는 줄도 모르고 번호표가 길어지는 병원 앞에서 회복해서 또 사는 게 무섭지도 않니? 알약은 어디서 녹고 있을까 눈을 떴는데도 난 아직 깨어날 줄 모르고 시체 냄새 나는 향수나 칙칙 뿌리고 놀러 가야지 아무하고나 사랑할 땐 흥청망청 뒤로 해야지 표정이 안 보이는 자세가 훨씬 아프고 재밌으니까 나보다 더 망가진 애들만 보면 심심하게 뒤가 간지러워서 너덜너덜한 웃음이나 뒤집어쓰고 다 같이 모여서 수다나 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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