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전연옥 시인 / 시인, 그리고 쉬인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2. 08:00
전연옥 시인 / 시인, 그리고 쉬인

전연옥 시인 / 시인, 그리고 쉬인

 

 

시를 쓰면 누가 밥 먹여주느냐고

내 어머니 농담은 너무 정확해서 탈이다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일까

벽에 걸린 노모의 치마를 들춰보다가

시인의 체통은 서정시처럼 비탄에 젖게 되지만

밥 먹기 위해 시를 쓰는 일보다

어쩌다 끼니를 잇게 해주는 한 편의 시가

나에게는 고행처럼 즐거운 일임을

 

그런데 만만한게 시인이고 시인가

시도 때도 없이 한 편의 시 같고

시인이 무슨 화류계 깨끼저고리처럼

이 남자 수퉁 맞은 팔에도

저 여자 동그란 어깨에도 걸쳐지고 있으니

시인의 오지랖은 만주 벌판처럼 황량해야 하며

시인 지망생의 소갈딱지는

밴댕이 콧구멍만하게 열릴락 말락

언제까지 시를 첨지받겠느냐고

내 어머니의 진담은 또 이어질 것이다

 

-시집 <불란서 영화처럼> 문학동네, 2021년

 

 


 

 

전연옥 시인 / 고백

 

 

콩 심은데

때때로

팥이 난다

상상력이 고상한 어머니가

어떤 놈의 씨냐고

도매금에 신분을 부려놓지만

알고 보면, 나도

배달민족의

비천한 후레자식인 것을

 

 


 

 

전연옥 시인 / 내 사랑도 한 편의 詩가 되어

 

 

우수 경칩이 다 지나가 버렸는가

내가 그대의 쟌느 뒤발*이 되고파 안달을 부리면

그 애절하고 가혹한 시절에

산봉우리 같은 우산으로 발소리를 가리고

세상 가득한 바람으로 지나가 버렸는가

안개처럼 내 시야를 주우고 사라졌는가

 

그렇게 되어도 당위성을 지닌

우리 사랑의 대차대조표는 늘 심드렁하여

살찐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부려 놓을 수 없었겠지만

화사하지 못해 서로의 운명을 엿보고

드러난 미래의 자태 앞에서 사악해질 수 있으니

 

그때, 우리가 서둘러 즐겼던 참백한 시간들과

가증하기만 했던 행복의 퍼즐게임들은

나의 불행이 그대에게는 행복이 되어서일까

그 사랑의 깊이로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쟌느 뒤발: 보들레르의 애인, 혹은 혼혈의 참녀였다고 함.

 

 


 

 

전연옥 시인 / 안개

 

 

 '그는 사랑을 잃었네.

사랑을잃고 봉분 하나를 그는 얻었다 하네

익명의 소문들이 그의 생애를 지우는 동안

슬픔이 창궐한 전등불 아래서

사람들은 경악의 얼굴로술을 마셨네

아름다운 기억들이 술잔에 가득 넘쳤네

그가 기른 가축들이 긴나무 다리를 건너와

시린 별빛 아래서 이별을 고하는 동안

어떤 편안한 잠이 그의 곁에 와 누웠네

아무도 그의 사랑 찾아주지 못했네

 

그가 잃은 사랑 눈먼 자의 슬픔으로 떠돌 때

사람들은 새끼처럼 꼬여 칼잠을 자고

꿈속 어느 갈피 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네

그가 찍은 삶의 구두점이 동행 없는 모습으로 거리를 헤매고

안개가 그의 그림자를 지우고 있었네

아무도 그의 사랑이 되어주지 못했네'

 

 


 

 

전연옥 시인 / 내 나이 스물하고 아홉에(II)

 

 

 나는 스물하고 아홉살 미친 듯이 이곳까지 달려왔다네 아구탕에 쓴 소주깨나 빨며 주현미보다 한발 앞서 뽕짝 메들리에 일가견을 이루고 장학금 받아 은행에 맡겨 두었다가 아버지가 이 저주받을 세상 버리셨을 때 저승길, 노잣돈에 보태쓰시라고 큰맘 먹고 만 원 꺼내 드렸다네 칠남매 중 유일하게 시인이 되고 그 유명세를 개처럼 끌고 다니다가 KBS에서 헐값의 품삯을 받고 사는 여의도 레벤 호프집에서 전기 고문 당한 족발로 돼지 꼬리만한 자존심 짓밟히고 산다네 달라스로 가자는 2차의 감미로운 유혹에 귀밑까지 입을 째기도 한다네 귀가길 수원행 전철 속에서 문득 서러워져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내 잘못만은 아니지 않느냐고 두드리면 보조키마저 잠그는 하느님에게 홧김에 오장육부를 긁어 보지만 나는 스물하고 아홉살 졸지에 이곳까지 달려왔다가 나는 이미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네 머뭇머뭇 시들기 시작했다네

 

-시집 불란서 영화처럼(민음사, 1990)中

 

 


 

 

전연옥 시인 / 제비붓꽃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가서 살거나

애인을 따라 섬에 가서 살거나

이대로 서로의 경계선이 되어

석삼년 애간장을 태워도 오지 않을

엽신을 기다리며 살아갈거나

기다림 하나만으로 일생의 안부를 묻고

내것이 아닌 침잠의 슬픈 얼레도 풀다가

맨발 아래 차가운 물소리와 함께

한평생 고질병에 이를 갈며 살아갈거나

아아 내일이 되어도 아지 못할

이 징그러운 소망의 잔뿌리들이여

이제 나는 홀로 자유로워야 하겠네

 

 


 

 

전연옥 시인 / 물 위의 집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비오는 날 그녀는 샹송을 부르지요

독약처럼 감미롭고 나른하게

 

불어를 모르는 나는

Chanson을 찬손이라고 발음하지만

무지란 때때로 상대방을 총명하게 만드므로

그녀는 어느덧 구라파식 왜가리가 되어

미주알 고주알 구라를 치며

아기자기하게 목젖을 떨지요

 

비오는 날 나는 샹송을 듣지요.

알아들을 리 없는 그녀의 노래는

차디찬 찬손이 되어 애면글면 하지만

나는 시린 어깨를 떨며

볼썽사납게 울지요.

아무 곳에서나 막 울어버리지요

나는 그게 흠이에요

 

 


 

전연옥 시인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멸치'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불란서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