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후명 시인 / 바람이 부는 걸 보니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2. 08:00
윤후명 시인 / 바람이 부는 걸 보니

윤후명 시인 /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나무들이 사랑할 때가 되었나 보다.

시간은 밤마다 절망하더라도

나는 속지 않는다.

언제나 너를 향하여 두눈을 홉뜨고

죽어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밤마다의 절망이 사랑의

때를 알려주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나무들이 사랑할 때가 되었나 보다

사랑할 시기는

어느 곁에 지나가 버리므로

우리는 바로 지금

떠날 채비를 차려야 한다.

 

 


 

 

윤후명 시인 / 동치미

 

 

예전에는 무가 아니라 무우라 했으니

늦가을이면 무 아닌 무우를 독에 쟁인다

정갈히 물 붓고

마늘 생강 파에 배도 넣는다

 

살얼음을 덮고 익으며

자수정 빛 갓물 보일까말까 우러나는 동치미

오래 잊었던 모습 되살아나는 듯

하늘가에 떠오르는 얼굴 누구라고 말 못 할 얼굴

 

무우, 무우우, 저녁 소처럼 울고 있는 모습

동치미는 어머니의 눈물처럼

마지막 떠나간 발자국에 괸 빗물을 담고 익는다

 

헤어짐이 맑아질 때까지 겨울 하늘보다 맑아질 때까지

생 生이 슬픔을 불러 앉혀 타이르듯

멀리 있는 나를 부른다

 

 


 

 

윤후명 시인 / 양치기 백석(白石)시인

 

 

강릉 구정면에서

백석 시인의 당나귀를 탄다

당나귀는 그의 시에서처럼 응앙응앙 울고

나는 남대천 물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 예전 피난살이 하느라고 나 어머니와 함께 엎드려 있던 땅

저기에 백석 시인의 시가 있는 것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삼수갑산으로 쫓겨가

양치기가 된 그를 따라 압록과 두만 두 물길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따르자면 당나귀를 타고

양들을 뒤따르면 되리라

이것이 구정면의 내 운명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러야 한다

오늘도 남대천은 멀리멀리 흐르는데

나는 응앙응앙 좇아가고 있다

 

 


 

 

윤후명 시인 /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너를 잊어버려야 하리 오늘도

칠흑 같은 밤이 되면

사라진 길을 길삼아

너 돌아오는 발자욱 소리의

모습 한결 낭랑하고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

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

산 자 필(必)히 죽고

만난 자 정(定)히 헤어지는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너는

어쩌자고 어쩌짜고

온몸에 그리운 뱀비늘로 돋아

발자욱 소리의 모습

내 목을 죄느냐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느냐, 이 몹쓸 그립은 것아,

 

-시집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민음사, 1992)

 

 


 

 

윤후명 시인 / 윤동주 시인의 방

 

 

시인의 방에는 엉겅퀴가 꽃핀다

대학의 기숙사 방에서 서촌의 하숙방까지

아니 자하문 고개의 문학관까지

나는 엉겅퀴 꽃송이를 그린다

온몬에 가시가 돋은 시인의 삶이다

그래서 그가 머문 방에 새겨놓은

나의 꽃

어둑어둑 하루가 저물 때

나는 홀로 그 방에 서 있었다

마음이 무엇인지 들추면

시가 꽃핀다고

나는 홀로 말하고 듣는다

그가 간 길을 걷는 한 걸음마다

엉겅퀴를 마음에 심을 때

나는 그림자를 꽃피우는 시인이 된다

 

 


 

윤후명(尹厚明) 시인

1946년 강원도 강릉 출생. 본명 : 윤상규(尹尙奎).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 197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출간.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어 소설가와 시인의 길을 병행하면서 단편 『높새의 집』 『갈매기』 『누란시집』을 발표. 시집 『名弓』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먼지 같은 사랑』 『쇠물닭의 책』 『비단길 편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