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명 시인 / 바람이 부는 걸 보니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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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 시인 /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나무들이 사랑할 때가 되었나 보다. 시간은 밤마다 절망하더라도 나는 속지 않는다. 언제나 너를 향하여 두눈을 홉뜨고 죽어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밤마다의 절망이 사랑의 때를 알려주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나무들이 사랑할 때가 되었나 보다 사랑할 시기는 어느 곁에 지나가 버리므로 우리는 바로 지금 떠날 채비를 차려야 한다.
윤후명 시인 / 동치미
예전에는 무가 아니라 무우라 했으니 늦가을이면 무 아닌 무우를 독에 쟁인다 정갈히 물 붓고 마늘 생강 파에 배도 넣는다
살얼음을 덮고 익으며 자수정 빛 갓물 보일까말까 우러나는 동치미 오래 잊었던 모습 되살아나는 듯 하늘가에 떠오르는 얼굴 누구라고 말 못 할 얼굴
무우, 무우우, 저녁 소처럼 울고 있는 모습 동치미는 어머니의 눈물처럼 마지막 떠나간 발자국에 괸 빗물을 담고 익는다
헤어짐이 맑아질 때까지 겨울 하늘보다 맑아질 때까지 생 生이 슬픔을 불러 앉혀 타이르듯 멀리 있는 나를 부른다
윤후명 시인 / 양치기 백석(白石)시인
강릉 구정면에서 백석 시인의 당나귀를 탄다 당나귀는 그의 시에서처럼 응앙응앙 울고 나는 남대천 물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 예전 피난살이 하느라고 나 어머니와 함께 엎드려 있던 땅 저기에 백석 시인의 시가 있는 것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삼수갑산으로 쫓겨가 양치기가 된 그를 따라 압록과 두만 두 물길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따르자면 당나귀를 타고 양들을 뒤따르면 되리라 이것이 구정면의 내 운명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러야 한다 오늘도 남대천은 멀리멀리 흐르는데 나는 응앙응앙 좇아가고 있다
윤후명 시인 /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너를 잊어버려야 하리 오늘도 칠흑 같은 밤이 되면 사라진 길을 길삼아 너 돌아오는 발자욱 소리의 모습 한결 낭랑하고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 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 산 자 필(必)히 죽고 만난 자 정(定)히 헤어지는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너는 어쩌자고 어쩌짜고 온몸에 그리운 뱀비늘로 돋아 발자욱 소리의 모습 내 목을 죄느냐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느냐, 이 몹쓸 그립은 것아,
-시집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민음사, 1992)
윤후명 시인 / 윤동주 시인의 방
시인의 방에는 엉겅퀴가 꽃핀다 대학의 기숙사 방에서 서촌의 하숙방까지 아니 자하문 고개의 문학관까지 나는 엉겅퀴 꽃송이를 그린다 온몬에 가시가 돋은 시인의 삶이다 그래서 그가 머문 방에 새겨놓은 나의 꽃 어둑어둑 하루가 저물 때 나는 홀로 그 방에 서 있었다 마음이 무엇인지 들추면 시가 꽃핀다고 나는 홀로 말하고 듣는다 그가 간 길을 걷는 한 걸음마다 엉겅퀴를 마음에 심을 때 나는 그림자를 꽃피우는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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