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유순예 시인 / 回生 프로그램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2. 08:00
유순예 시인 / 回生 프로그램

유순예 시인 / 回生 프로그램

 

 

하루종일 장대비 퍼 붇고 있다, 저 비에

나랑 끼니를 나눠 먹는 비둘기 가족이

병실 창틀에 종일토록 앉아 있다

어제는 밥알을 쪼는 새끼비둘기에게서

십 수년 전 숟가락질을 배우며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줍던 아들녀석을 보았다

입원 일이 늘어갈수록

여기 저기 흩어놓은 밥알을 줍는 것이

물리치료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나

흘리지 말고 먹어야지,

내가 내게 야단을 치느라

오늘은 저들 가족에게 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젖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아는 체 하는 저 가족

저녁밥을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불편한 상체를 일으키며 숙이며 밥알을 내어준다

여덟 아홉 열, 물리치료 하듯

열 하나 열둘 열 셋, 움직이는 사이

번쩍 들려있는 내 저린 한 쪽 팔을 본다

빗속의 또 다른 비둘기 가족을 부르고 있었다

 

 


 

 

유순예 시인 / 속삭거려도 다 알아

 

 

오즘 어르신도 잘 잤고

똥 어르신도 잘 잤는데요

배회 그 어르신은

밤새 오락가락하셨어요

 

노인 요양 시설 야간 근무자와 주간 근무자의

인수인계 대화를 귀담아들은

어르신, 병상에 누워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신다

아흔여섯 살인 당신이

마흔 살이라고 우기는

어르신, 굳어가는 혀로

떠듬떠듬 말씀하신다

 

소, 속삭, 거, 려, 도, 다, 알아

 

―시집 『속삭거려도 다 알아』 푸른사상, 2021

 

 


 

 

유순예 시인 / 우리 집 바깥양반

 

 

 첫날밤 치른 지 수 년째 티격태격하는 우리 집 바깥양반을 소개합니다

 

 바깥 여자들 품에 안기어 음주가무를 즐기던 우리 집 바깥양반, 얼마 전부터 마음을 고쳤나 봅니다. 옆에 착 달라붙어 없는 애교를 부립니다. 연시 한 바구니 사 들고 와서 입에 넣어주질 않나, 잠든 나를 깨워 사슴을 그려 달라 보채질 않나, 비빔국수를 만들어 달라 조르질 않나, 저러다 또 발동 걸리면, 바깥세상을 읊조리고 다닐 테지만, 타고난 역마살이야 바깥 여자들이 반겨줄 테지만, 달아나기 전에 확 잡아둬야겠습니다. 바깥을 더 좋아하는 우리 집 양반, 무릎 깨진 놈, 머리칼 뜯긴 놈. ・집나간 새끼들 불러 모아 쓰다듬어주기도 하는

 칭얼댈수록 맛깔스러운 시를 바깥양반으로 섬기길 잘했습니다.

 

 유순예표 시옷이나 몇 벌 더 지어 입혀야겠습니다

 

 


 

 

유순예 시인 / 화용(化蛹)*

 

 

완전 탈바꿈을 시도하신 아버지는 누에였다

 

흙의 잎사귀를 따다가 다솔식구를 먹이셨다

'천둥 번개의 장난질에 오늘도 심심치 않았다'

흙이 쓴 일기를 읽어주던

아버지, 언제부턴가 배앓이를 하셨다

어떤 일자무식이 들이닥쳐

당신 멱살을 잡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는

그날이 화근일 것이다

저 살자고 이혼을 선택한 딸년 덕분이다

그날 그 날벼락이

아버지 내장에 악성종양을 싸지른 것이다

삭여버리려 용을 썼겠지만

온몸에 불길이 번진 것이다

주삿바늘이 불러들인 먹구름을 팔다리에 휘감고

몸을 바싹 말리셨다

남은 양분

막잠 든 누에처럼 고개를 치켜세운 악성종양에 퍼주고

고치 속에 몸을 꽁꽁 가두셨다

 

완전 탈바꿈에 성공하신 아버지는 그렇게 번데기가 되셨다

 

* 누에가 번데기가 됨.

 

 


 

 

유순예 시인 / 치매꽃 1

 

 

너도 나처럼 늙어봐라

 

이제 좀 살 만하니까

말하는 법도

옷 입는 법도

잊어버리고

부뚜막에 쪼그려 앉아 감자밥 짓던

먼 기억들마저 가물가물하다

울었거나 웃었거나

아들이 아버지로 보이고

거울 속의 내가 죽은 어머니로 보이고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린

기억들은 꽃으로 변했으니

시들 때까지

마를 때까지

지금처럼 오락가락 살기로 했다

 

너도 나처럼 피어봐라

 

 


 

 

유순예 시인 / 뿌리면 거두리 산마을

 

 

주소 변경을 왜 이렇게 자주 했어요

 

월셋집 반지하 창문으로 도둑이 다녀갔어요

햇살 없는 안방으로 곰팡이가 스며들었어요

보증금을 올려달랬어요

허물고 재건축 공사한다고 나가달랬어요

 

호적초본의 질문에 위의 사실대로 대답을 못 했어요

 

도회지 생활 삼십여 년 동안

매년 한 번꼴로 이사 다닌 처지였어요

신랄하게 쏘아보던 태풍이 이참에는

나를 아예 고향 산골짝으로 날려 보냈어요

 

전라북도 진안군 뿌리면 거두리 산마을

산골짝에 안주하신 나의 뿌리와

그 발치에 터 잡은 나의 줄기들이

뿌리면서 거둘 만한 집 한 채 장만했어요

 

이젠 주소 변경이라는 번잡한 놈

얼씬도 못 하겠지요

 

-시집 『속삭거려도 다 알아』 (푸른사상, 2021.) 중에서

 


 

 

유순예 시인 / 횡설수설

 

 

요상한 말을 타고

오시네요, 당신

말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조르시네요. 당신

말 닮은 애송이를 구해달라고

억지를 쓰네요, 당신

신바람이 울고 갈 만한

시를 쓰고 싶다고

우기시네요, 당신

쉼표 하나를 넣었다가 뺐다고

사족을 다시네요, 당신

행과 연을 뒤엎다가

신열을 앓았다고

없는 시어머니 흉을 보다

뒤가 구렸다고

없는 말을 만드시네요, 당신

 

 


 

 

유순예 시인 / 뿌리면 거두리 산마을

 

 

주소 변경을 왜 이렇게 자주 했어요

 

월셋집 반지하 창문으로 도둑이 다녀갔어요

햇살 없는 안방으로 곰팡이가 스며들었어요

보증금을 올려달랬어요

허물고 재건축 공사한다고 나가달랬어요

 

호적초본의 질문에 위의 사실대로 대답을 못 했어요

 

도회지 생활 삼십여 년 동안

매년 한 번꼴로 이사 다닌 처지였어요

신랄하게 쏘아보던 태풍이 이참에는

나를 아예 고향 산골짝으로 날려 보냈어요

 

전라북도 진안군 뿌리면 거두리 산마을

산골짝에 안주하신 나의 뿌리와

그 발치에 터 잡은 나의 줄기들이

뿌리면서 거둘 만한 집 한 채 장만했어요

 

이젠 주소 변경이라는 번잡한 놈

얼씬도 못 하겠지요

 

 


 

유순예 시인

1965년 전북 진안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7년 <시선> 등단. 시집 『나비, 다녀가시다』 『호박꽃 엄마』.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 계간 <시하늘> 편집, 운영위원. 부산시인협회 회원. '주변인과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