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진하 시인 / 들을 귀 나름이겠지만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2. 08:00
고진하 시인 / 들을 귀 나름이겠지만

고진하 시인 / 들을 귀 나름이겠지만

 

 

산호수나무 꼭대기에서 우짖는 저 쬐그만 새

시발시발시발……

누굴 욕하는 것 같다.

 

짝짓기 철이라 저리 운다는데

짝 찾는 소리치곤 참 고약타.

 

이젠 욕계(欲界)를 떠난 이모부한테

평생 욕바가지로 살던

풍물시장 약초장수 이모 생각도 나지만

 

저 맑은 욕 먹지 않고

어찌 세상이 맑아지며

만물의 귀가 파릇파릇해지겠는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시발시발시발……

 

저 욕 한 사발 꿀꺽 삼키고 오늘 아침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르느니.

 

 


 

 

고진하 시인 / 밥

 

​밥냄새는 구수하다.

​뜸드는 밥솥 곁에서 평생을 사신 어머니, ​

​밥냄새는 구수하다.

​어머니의 눈물이

​어머니의 살을 썩썩 베어 안치고

​밥을 지으시던,

​이제는 늙고 손이 떨려

​밥 짓는 시늉만 하시는,

​밥이 되신 어머니는 구수하다.

​참사람은

​먹는 자가 먹히는 자가 되는 거여

​밥이 되는 거여, 라고

​아직 밥이 되지 못하고

​낱낱의 쌀알로 맴도는 아들에게

​밥 되기를 가르치시는

​나의 어머니, 나의 예수여!

 

 


 

 

고진하 시인 / 꾸지뽕나무의 말씀

 

 

그 꼬리 어디서도

시(詩) 한 잎 발아하는 일은 드물지

그래서

자르고 또 잘라도

거듭 돋아나는

도마뱀 꼬리 같은 생각의 손에

괭이 한 자루 쥐어 주고

봄볕 아른거리는 텃밭으로 내몰았지

너 구슬땀 좀 흘려봐

네 괭이질에 토막토막 잘린 채

꿈틀대는 지렁이들과 입맞춰 봐

네 눈에 보이잖는 땅 속

미생물들과 으밀아밀 통화해 봐

생각의 폭풍이 좀 잦아들 거야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야

텃밭 가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꾸지뽕나무의 말없는 말씀이야

 

 


 

 

고진하 시인 / 피정(避靜) 일기

 

 

지난밤 꿈에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을 보았다.

 

얼음벽돌로 세워진

얼음수도원.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얼음십자가상과

얼음성모상 앞에서

성체 조배를 바치고

찬미가를 불렀다.

 

하얀 콧김과

하얀 입김이 날리며

수도사들의

긴 머리칼과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이 맺히게 했다.

 

저녁미사 시간,

수도사들이 바치는

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

얼음수도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도사들도 사라졌다.

 

잠을 깨고 난 뒤, 온종일

사라져버린 얼음수도원을 묵상했다.

 

무념무상의 설원(雪原)에 들 수 있었다.

 

 


 

 

고진하 시인 / 성스런 바느질

 

 

 비탈진 관동양묘원,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검게 그을은 늙은 아낙네들이 두더지처럼 납죽 엎디어 있다. 겨우 10cm 될까말까 한 어린 자작나무 묘목을 촘촘히 심고 있는 저 갈퀴손들은, 말하자면, 지금뻥 구멍 뚫린 지구를 꿰매고 있는 것이다.흰 머릿수건을 벗어 쏟아지는 구슬땀을 훔치며 바늘 대신 쪽삽으로,한 땀 한 땀지구의 뚫린 구멍을 푸르게푸르게 누비고 있는!

 

 


 

 

고진하 시인 /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윙윙거리는 소리가 좀 이상해

보일러통이 있는 뒤껸으로 돌아가다

보일러통 옆, 진득한 거미줄에 걸려 있는

흰줄표범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더듬이와 몸통은 거미에게 파먹혔는지 보이지 않고

찢긴 날개 끝 희고 붉은 표범가죽 무늬가 선명한

두 날개만 흔들흔들.

 

가여운 생각에

손끝으로 사뿐히 두 날개를 집어올렸더니

거미줄 쳐진 나무 기둥에는

깨알같이 잔뜩 쓸어놓은 노란 알들.

 

갑자기 난 숙연해진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

 

 


 

 

고진하 시인 / 해일

 

 

낡은 비유로 이어지던 네 삶의 지붕을

해일이 덮쳤다

 

오래 채집한 나비들과 가재도구와 묵은 책들을

거친 쇠갈퀴를 지닌 물의 입이

명태살포처럼 씹어놓았다

 

허둥지둥,

젖은 옷가지를 챙겨 식솔들과 함께

푸른 해송들 우거진 냉동공장 너머로 황급히 떠나는

피난 행렬도 더러 눈에 띄지만,

돌연한 재난 앞에 넌 그냥 무릎을 꿇고 만다

 

꽉 막혀 있으나마나 한 하수도 구멍 같은

욕망의 아가리에서

붉덩물로 쏟아지는 결핍의 문장들 위로

말미잘이나 불가사리,

징그러운 실뱀장어처럼 꿈틀꿈틀거리며 둥둥 떠다니는

성난 神의 옆얼굴을 보았기 때문인가

견고한 울타리와 지붕과 낯익은 길들을

흐물흐물 허물어뜨리며

악취가 진동해도 썩지 않는 비애의 모듬살이를

한순간 덮친

중심을 이탈한

저 거친 물의 간섭을

넌, 그의 심판이라 말하진 않지만

 

 


 

 

고진하 시인 /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깨진 항아리 조각 같은

달이

터진 상처에서 비쳐 나오는

붉게 엉킨 피를 물고 지상에 이별을 고하고 있다 짧은

이별 뒤엔 곧 漆桶 속 어둠이

뚜껑을 열어

검은 새들을 풀풀 날리고, 한밤 내

검은 새들이 텅 빈 골짜기를 배회하며

목젖 없는 아이가 질러대는 시끄러운 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지저귐을 토해 낸다 왜 새들은

이 밤 칠통 속 둥지로 돌아와

주둥이를 박고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삐끔히 열린 밤의 들창에서 새어나오는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스런 지저귐,

혹은 누군가

거칠게 코고는 소리 어쩌면 지금

악몽으로 뒤척이는 그들은

긴 코를 땅에 박은 *鼻行類가 되어

꿈마저 저당잡힌 꿈길 위에 무서운 절망의 외발자국을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짜기 도처

악취 풍기는 폐수와 썩지 않는 쓰레기 더미 위로

무성하게 피어난 인공 독버섯이 뒤덮인 땅에

식식거리는 두 마리 황소를 앞세워

분노의 쟁기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들은 지금

품안으로 날아드는 검은 새들과 함께

쑥넝쿨만 우거진 조상들의 무덤 속 죽음의 磁力에

이끌려

숯처럼 깨끗한 죽음을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나는 모른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민음사.1990.3)

 

 


 

고진하 시인

1953년, 강원도 영월군 출생. 김리교 신학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데뷔.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1997년 김달진 문학상 수상. 2003. 강원 작가상 수상. 현재 성암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