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현 시인 / 엽서의 속도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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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시인 / 엽서의 속도
너는 이미 다녀갔는데 다녀가겠다는 엽서가 이제야 당도했다
파사석탑과 아유타국 공주가 합장하고 있는380₩우표가 붙어 있었다
선납 일반통상$50은 바람신의 노여움을 기어이 뚫겠다는 의지의 속도?
다녀간 후 다녀간다는 소식으로 너에게 닿고 싶어졌다
네가 앞질러버릴 너의 다음 엽서의 여정은 시작되었고
네가 다녀간 후 다녀가겠다는 엽서를 나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렉스프레거의‘Big West’는 너의 속도로 읽어야 했다
박정현 시인 / 아무려면 어때요 그냥 쇠주나 한잔해요
삼남이라고요 거긴 지금 눈 천지일 것인데 설원을 뒤에 두고 혹한의 진부령 계곡을 찾으신 이유라도 있는지 날 잡고 보니 눈 내렸던 것일 테죠
여긴 아직 눈 소식도 없고 내걸린 지 보름 남짓한 퉁퉁 언 태들뿐 당신이 생각했던 눈 덮인 고즈넉한 덕장의 풍경은 영 아닐 것이오
보름만 당겼어도 쇠주 내음 풍기는 덕걸이 사내와도 일면식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보름만 늦췄어도 눈에 덮인 30일 태라도 보았을 터인데 애썼던 바가 아쉽게 되었군요
그렇다고 실망할 것까진 없지요 어차피 삶은 깜냥으로 세상을 보거나 그만큼의 바탕에서 상상을 이어가기 때문이지요 보아하니 눈이 가늘어서 무슨 의미를 캐내려는 듯하신데
맞아요 나는 환생을 꿈꾸는15일 태에 지나지 않아요 석 달간을 더 얼었다 녹았다 해야 조건을 충족할 수 있지요 먹태 목태로 그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지요 이왕 진부령을 넘어온 이상 황태로 거듭나고자 늘 갈구하지요
사진이요 그렇지 않아도 홑셔츠 차림의 깡마른 덕장 주가 나타나서 선심 쓰듯 몇 번의 셔터질에 내외간 동반 사진도 몇 컷 건질 것이니 조바심치지 않아도 될 듯하고요 배경에 입 벌리고 하늘을 우러른 언 태들이 바로 환생을 꿈꾸는15일 태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혹시 알아요 풀리지 않는 난제의 밤 쓴 쇠주와 환생한 내가 당신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박정현 시인 / 내 몸 어디선가 빈 대통 내려놓는 소리가 난다
무각사 연못정원 대통물 쏟는 소리 좋아하지만 물 쏟고 받침돌에 내려놓는 소리도 좋아한다
대통에 언제 차오를까 조바심치는 물 쏟아지는 순간을 고대하는 물 쏟아지기 전 이별을 미리 아쉬워하는 물 차자마자 기울어 버리는 허망한 물 돌확에서 합수하여 못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너럭바위에 앉아 하루를 위무하는 묵상을 하다가 종종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어디에 기억되고 있다 불쑥 튀어 나오는지 구름처럼 흘러가는 얼굴들 나는 나를 자각하고 살고 있는 것 아니라 그들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다가
대통물 쏟고 받치는 소리에 화들짝 들숨 날숨으로 돌아온다
몇 번의 대통물 쏟고 받치는 소리 듣고 집으로 향하는 길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걷다가 연못 가까이 한 번 더 들었으면 하는 요량으로 중모리 아니리로 늦추다가
물 쏟고 다시 받치는 “통”소릴 받는다
시나브로 물 차오르는 소리, 물 쏟는 소리 물 쏟고 빈 대통 내려놓는 소리가 내 몸 어디선가 난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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