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희 시인 / 어린 순례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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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희 시인 / 어린 순례
거대한 고목나무 사원(寺院) 겨울 드는 모습에 마음 시리네 앞날 가늠하니 신발 속에 모래가 돋네 축축한 등줄기로 오르는 좁은 길 보이네 막힌 길 뚫어주어 편히 드나들던 길인데 푹푹 빠지는 모래벌판이네 바람도 울컥하는지 모래언덕의 결을 바꾸네 오래도록 고향의 고목나무 둥치에 기대고 싶은데 크르렁, 새어 나오는 바람경을 읽네
김택희 시인 / 겨울꽃
무릎까지 쌓인 눈을 넘는다 송신탑을 건너오는 고향의 폭설을 바라보며 최면처럼 당초문을 따라간다
굽어든 골목마다 부시다 한 자쯤 내린 눈이 마을의 지붕을 만들고 키를 낮춰 바닥에 가라앉혔다 소음마저 하얗게 매몰되고 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진 눈 속에 묻힌 시골집 뜰 마른 감나무 같은 노구의 휘어진 등 그림자 유리창에 내비친다
어른거리는 풍경이 푸른 우물길이 되는 곳 내 안의 떫은 맛 몇 번을 우려내어 말랑하게 키워주던 숨결 하얗게 오른다
김택희 시인 / 배롱나무꽃에 들다
화엄사 경내 배롱나무 흐드러진 꽃잎들 먼 데까지 불 밝힌다
밤에는 석등 낮에는 앞산이 눈부시던 이유
초록은 보름달로 푸르러 가던 시간 바람 기다리지 않고 온몸으로 맞는 삼복염천 길
실핏줄 터뜨려 지은 꽃길 마주하고도 혼자 걷는 삶 백년만의 폭염이 몸을 떤다
올 여름 오래 삭힌 목백일홍 피점 돋는다
-시집 <바람의 눈썹> / 문학수첩
김택희 시인 / 전갈
경계에서 모두 큰 아가리에 키스를 했다 모서리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난 겁이 없는 계절 묵묵히 애리조나사막으로 향했다 귀가 살짝 들린 카우보이모자 너울진 사막 붉은 산에 오르는 노을을 담아 조감도를 그렸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알고 있던 조각들, 목말랐다 달빛에 넘어지는 날에는 평원의 모래가 물로 보였다 쪼그린 잠에 열꽃이 돋고 내장이 마른다 황야에 나와 나를 쫓는 내 그림자뿐 혼잣말이 휑하니 귓가를 스친다 비상약은 동이 났다 꼬리의 독을 약으로 써야 한다
오늘밤도 커서를 마주한다 도드라진 당신의 까만 눈동자에 시선을 박는다 환락 같은 전갈(傳喝)이 오기를
김택희 시인 / 5시에 쓰는 배봉산 초록일지 꽃창포와 떡갈나무가 함께 걷는 일 년의 언덕 꿩의다리 꽃이 까치발을 든다 넓은 손바닥을 내보이는 쪽동백이며 팥배나무도 서로 어깨를 겯는 왕성한 산길 빛이 팔을 내뻗는다 텀블러가 흔들린다 올 여름엔 초대형 엘니뇨가 온다는데...
산이 건네주는 초록 앞에서 새삼 경건해진다 이 천연한 색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유월은 계절 결속토낭공법의 실체 겨울나무가 3월을 지지대 삼아 4월과 5월을 결속 판으로 연결하여 나아가는 단단한 계절이다
풀숲에 뱀딸기의 붉은 돌기 부풀었다 젖무덤 같은 산언덕 아래 산그늘이 꽃뱀처럼 길을 내고 뱀의 혀 사이를 지나는 바람 바람의 유두는 곡선을 그리며 산길을 오른다 급한 숨을 내쉬던 바람이 갈림길에서 걸음을 늦추면 갈비뼈를 스치는 하와의 미소
풀과 나무들이 나무와 새들이 새들은 또 바람과 어우러져 나를 키운다 우리를 키운다
김택희 시인 / 페르시안
완벽한 편애 제자리에서 내려다볼 뿐 소리 내지 않지 바람이 구멍을 뚫는다 나무들은 납작 엎드려 있다 야옹 웃자란 이름으로 눈 가득 차오른 해안선을 지키고 있다 한사리 밤 파도의 지느러미가 튄다 물빛 달빛 뒤섞여 퍼덕퍼덕 산란을 하지 달빛 아래 선하게 걸어가는 밤 방울소리 지운 등 뒤의 응시 울음 머금은 고양이가 한껏 당기는 푸르도록 꽉 찬 달밤이다 한쪽 눈은 낮에 두고 온 -계간 『문예바다』 (2019년 겨울호-공모시)
김택희 시인 / 얼룩 고양이의 계절
엄습한 동장군에 검은 털 부풀렸지 도시의 미아처럼 헤맸네
추위보다 무서운 건 길을 잃는 것 눈에 불 밝혀 둘러보아도 부나방 같은 눈발 속으로 길이 묻혔다
적막의 벼랑을 걷고 또 걷는다 눈발 너머 붉은 동백 피고 있겠지 발자국 지우며 쌓이는 소복한 눈발 돌아보니 멀리 지나온 길 눈밭 가운데 홀로 서 있다
나는 얼룩 고양이 등에도 머리에도 하얀 반점 돋은 함박눈이 어둠 재촉하는 바람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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