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경인 시인 / 사람을 모집합니다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3. 08:00
김경인 시인 / 사람을 모집합니다

김경인 시인 / 사람을 모집합니다

 

 

아무렴요, 내년엔는 꼭 사람이 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조금 좁아진 고요 주변을 돌며 운동을 하고

성실하게 배가 고프겠습니다.

 

쏴아, 변기구멍으로 빨려 내려가는 구겨진 얼굴 대신

웃는 얼굴을 뒤집어쓰고

 

성실하게

들숨과 날숨을

차례대로 멈출 것입니다.

 

 


 

 

김경인 시인 / 마흔

 

 

거울 속에는

길고 긴 복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절룩절룩 걸어가는 사람의 뒤통수

(끝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거울 속에는

향나무 그네를 타고 노는

어린 그림자 두 마리

(끝내 얼굴을 가지지 못한)

거울 속에는

꼬물꼬물 죽음의 어여쁜 발가락들

 

함께

흰밥을 먹는 시간

넝쿨 줄기처럼 나를 친친 갈아 오르는 그들과,

밥상에 다정히 둘러앉아

 

 


 

 

김경인 시인 / 미래의 가로수

 

 

어제와 오늘을

똑같은 질량으로 섞어

자주 걷는 길에 뿌려 두었다

 

가까운 사람이 알려주길

아파트 장에 가면 싸고 싱싱한 사랑을 판다고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고

몇 그루 가져다 심으면 제법 그럴듯할 거라고

 

가로수는 언제 무성해지나

어제와 오늘이

비극과 희극 사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말하길

너와 나랑 같이 걷자,

마지막 나무와 걷지 못한 나무 사이에

거울처럼 빛나는 미래가 걸려 있다고

 

가로수가 무성해지면

토르소처럼 모양 좋게 자를 수도 있다고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알게 될 거라고

 

나와 무 사이에

누군가 있다

 

만화경을 돌리듯이 무한하게 번지는 가능성들

 

잘 안 보여,

 

안경을 쓰면

잠이 찾아왔고

벗자 다시 잠이 달아났다

 

 


 

 

김경인 시인 / 수련

 

 

연못 가득 수련 잠들어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잠이라니,

꽃의 이름을 질투하면서

나는 잠 속으로 수련회를 떠난다

옛 친구들과 함께 둥글고 착하게 앉아

우리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진심을 꺼내자.

호주머니 속 자갈이나 돌멩이를

우르르 털어내듯이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종이에 적어 보자.

음, 음,

너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음, 음,

사실은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이미 너는 죽었으니까

죽은 친구에게 이건

무리한 부탁이니까

친구들은 너무 미안해서 웃으면서

한 명씩 잠에서 빠져나간다

꿈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것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저녁 위에 상처를 꾹꾹 눌러 적는다

저녁은 푸른 피를 떨구며 연못을 마저 훑고 지나간다

꿈속의 수련은 언제 끝내야 하나

진흙에 처박혀 하얀 다리는 무럭무럭 자라고

수련은 여러 개의 손으로

어둠을 붙들고 곤히 잠들어 있다

 

 


 

 

김경인 시인 /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

 

 

 오후가 밀려나는 순간 영화는 상영된다. 거리로 밀려온 노을은 나 혼자 관객인 영화관의 문을 두드린다. 영사기가 차르륵 돌기 시작하면, 스크린 위로 피멍 든 여자가 불쑥 솟아오른다. 노을보다 먼저 지는 어머니의 얼굴은 아름다워도 될까. 여자를 잡으러 남자가 뛰어간다. 얼음 살갗인 아버지가, 쓰다듬으면 고드름처럼 깨져버리는 아버지가, 나하고 놀아요 하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지는 아버지가, 너 죽어, 모두 죽자 하고 어린아이처럼 뛰어가고 문을 쾅 닫고 도망가고 아직 어린 언니가 누에고치마냥 문고리에 매달려 흐느끼고 그들이 버린 화분 안에서 우리는 목이 말라요 물 좀 주세요 씨앗 하나 갖고 싶어요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잉잉거린다. 화면 밖의 내가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아이고, 얘들아 어린 나에게 물 한 동이 얼른 떠 주고 도망간 남자와 여자를 찾고 저녁을 차려주고 아직 어린 언니를 찾아 얼굴을 씻기고 울지 마 달래다 내 안의 수문이 터져버리는 순간 젊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쓸려나가고 감자줄기처럼 딸려 온 유년이 잠기고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눈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영화는 종영된다. 사방으로 번진 물길은 내 안의 집을 수몰시킨다. 영화관 밖 보트 위에서 한 아이가 흰 깃발을 흔들고 있다.

 

 


 

 

김경인 시인 / 압화

 

 

좁다랗고 납작한 지붕 아래

여자가 있습니다.

희미해진 얼굴 대신

깨진 창문을 키우는 여자,

나선형 화분에 심긴 눈동자가

검은 씨앗처럼 흰 뿌리를 틔우는 사이,

식탁 위 주전자에 담긴 손은

차를 데우느라 분주합니다.

신발장 깊숙이 숨어든 발은

밤새 계단을 오르내리고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패브릭 소파 틈새에 숨어

공중 뿌리처럼 집을 휘감고 자랍니다.

벽지 틈에서 손가락 마디들이 파란

이파리처럼 자라나는 동안,

좁다랗고 납작한 지붕 위에 해가

커다란 빨간 풍선처럼 떠 있습니다.

둥그렇게 부푼 노을이

창틀 너머로 밀려듭니다.

거울 속 눈은 벽을 따라 거미처럼 흩어지고,

식탁 위 이 빠진 꽃병 속 가라앉은 심장이

넘칠 듯 말 듯 가만히 흔들렸습니다.

신발장 속의 발은

계단을 뛰어내리다 멈추었습니다.

여자는 잘 있습니다,

벽지 아래로 스며들어

가장자리가 말려든 잎사귀처럼

밖에는 지붕을 삼키며

해가 눌러앉고 있습니다,

빨간 풍선처럼 커다란 해가.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5년 1월호 발표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와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있음. 2011년 제1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