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람 시인 / 질문의 동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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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람 시인 / 질문의 동네
이 동네에 살면서 질문을 먼저 배웠는지 대답을 먼저 연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대답이란 꽃피는 방식이고 질문이란 임박한 즈음 같은 것이라 꽃의 앞뒤는 햇볕만 알고 있을 것이다 동네에는 쪼그려앉는 사람이 있고 그는 아이들의 질문을 모아다 곤충채집 판에 실핀으로 꽂아 놓길 즐긴다 또 동네에는 불구의 옷장을 수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추렴으로 모은 뼈로 사람 하나를 만들어 놓고 대답을 내놓아라, 다그친다 한밤엔 소용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꽃, 질문은 두서없고 대답은 더듬더듬 칠흑의 사설을 읽는다 질문놀이를 하겠다고 해 놓고 종용하는 놀이를 겸한다 이를테면 확인하는 가구 수들과 의문에 묶어 둔 개들의 수가 같거나 한 일들 모르는 것을 틀리는 일들이란 법칙이 만들어진 이후의 일들일 테니 꽃을 질문하고 돌팔매를 맞는 일쯤 허다하다 장님이 던진 돌이 눈 뜬 우연에 가서 맞는 일 같은
박해람 시인 / 근황
머리맡을 정하지 못해 잠이 옮겨 다닌다 내가 옮겨 다닌 집들은 향向을 사상쯤으로 알고 있었다 동쪽 울타리 밑으로 은일자*가 따라다녔고 향념에선 파초라든가 비파 같은 갱지들이 피고 졌다 그것들을 따다 한낮엔 밝은 종이로 쓰고 밤엔 검은 종이쯤으로 치부했다. 한 채의 집이 얼마나 많은 주변과 소쇄를 몰고 다니는지에 대해 외간의 책들로는 배우지 못했다. 수상受賞의 제목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숲을 놀란 초식들이 달려갔다. 그런 날은 뿔이 두근두근 뛰었다 십리 밖에 취하는 신발을 벗어두고 그 옛날 아버지의 취한 옷소매를 그리워했다 한 번 아들로 태어난 사실은 바뀌지 않고 어쩌다 아버지가 된 사실도 저잣거리를 지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위로를 추렴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시인으로 철없는 결구를 짓고 사람으로 뻔뻔한 치욕을 편들었다 이만하면 죽기 딱 좋은 과오라는 생각이 든다 흰 꽃이 익으면 함께 부슬부슬 봄날의 궂은 날씨로 반죽한 국수를 먹으로 가자고 했고 어쩌다 맨 정신의 친구에게 술 취한 당호를 부탁하고 허언처럼 들고나는 문을 세웠다 무료의 손끝을 모아 정원을 꾸미는 날들이 쏠쏠하다 마른고추를 거둬들이는데 소나기가 묻어 있다 그럭저럭 머리말을 너무 많이 읽는다
* 도연명陶淵明
박해람 시인 /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고양이의 집필은 비스듬하게 모로 누운 방식, 꼬리를 봄볕에 찍어 쓰면 거만한 자음들이 아지랑이처럼 곤두서던 봄. 꽃들의 획수를 편집하거나 고양이 꼬리의 오타를 수정하는 일에 고용됐었지. 철자법 없어도 나뭇잎들이 돋아나고 혼자 놀고 있는 묘(猫)의 꼬리는 몸통을 자주 속였지. 아마도 서로가 외연(外延)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 비스듬히 누워서 번역체 햇볕을 데리고 놀던 꼬리 파지마다 글자들이 웅크려 있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책의 분량을 정했지.
볼펜을 열면 스프링 대신 고양이 꼬리가 감겨 있었지.가끔 잉크가 나오지 않는 꼬리도 있었거든.
털 있는 것들은 다 붓 같다. 뒹구는 곳마다 가려운 흔적이 떨어져 있는 파지 눈을 가로로 혹은 세로로 뜨는 족적(足跡)을 새기고 담장 밑 봄은 천천히 굳어 갔지.
심심한 수염, 혼자 놀고 있는 꼬리의 집필.
비릿한 줄 간격을 쓰고 까끌까끌한 필체까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수염의 자서전. 햇볕은 난간을 지나가고 검은색에 흰 털이 듬성듬성 박힌 봄, 또래가 없이 꼬리를 끌고 다니는 스프링의 몸통. 거만한 간격의 줄거리가 낱장으로 울어 대던 봄밤.
채마밭이 달린 마당이 백이십 페이지 분량으로 묶이고 떨어진 꽃들을 주워 마침표로 사용했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책은 난간이라는 제목.
박해람 시인 / 악필(惡筆)
초서(草書)는 여름에 푸르러 겨울에는 죽고 만다. 초목 하나를 휘감아 그늘을 다 털어내고서야 그 결박이 보인다. 소리가 바람을 결박하고 잎은 가장 위엣것부터 불러들이니 창호(窓戶)의 외진 구멍들에게는 근동의 물소리만 벗으로 바쁘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어느덧 초목을 지나 낙엽에 이르렀다. 지난밤에는 가장 성긴 치아가 빠져 거친 낮 밤을 우물거리지도 못해 간신히 귀로 마신 차 한 잔이 조식으로 들어앉은 배 속 어찰(御札)은 어느 진창을 지나왔는지 다정은 다 빠지고 독설만 얽혀 있다.
근래에는 소문조차 찾아오지 못하게 탱자나무 울타리는 막아 버렸다 답장 없는 간찰(簡札)처럼 계절은 성급했다 무릎을 꿇고 들어야 하는 악필의 문장이 도착했다
각설하고 통증에는 그 어떤 구름도 없어 악필처럼 휘어지는 몸이 예의를 버리는 시간 몇 모금 악필이 첨가된 초오(草烏)탕은 몸 하나를 결박 하는 중인지 풀어 주는 중인지 영영.
박해람 시인 / 누가 내 한기를 위해 다독을 덮어 줄 것인지
세숫물을 받아 놓고 머리를 긁으면 어떤 기억은 꼭 저 혼자 떨어진다. 녹지도 않는 것이 늘 덜거럭거리던 것이 꼭 소금쟁이처럼 물 위에 떠서 잡히지도 않는다. 가라앉지도 못하고 잡히지도 않는 가려운 가벼움 누군가 훅 하고 불면 흩어지는 한 마리 흔적
마른 것들만 허공을 나는 젖어서 평생 어떤 날들의 덮개만 될 것들이 있다 극과 극이 살고 있는 사이좋은 부위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그 한몸 다른 남자와 자고 온 애인의 몸에 붙어 있는 안쓰러워 보이던 마른 것들
사막을 여행하고 돌아온 계절 유난히 떨어지는 것들이 많다 누구는 한낮의 온도만 믿고 내 곁을 떠나갔지만 사막의 이불 같은 이 밤의 한기를 견디는 것은 그와 나나 같다 바람이 그 손바닥으로 사막을 쓰다듬듯 나를 다독였던 손바닥들이 이젠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시절
누가 내 건조를 위해 허공을 빌려줄 것인지.
박해람 시인 / 여름밤위원회
웅덩이에는 날파리가 왱왱댄다 물결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소녀의 얼굴이 몇 살인지는 나도 몰라 꽃씨가 흘러나오는 소녀의 얼굴, 왜 태양을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찡그린 꽃씨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언젠가 뒷면에 침을 발라 붙인 달이 아직도 편지봉투에 떠 있다
여름밤위원장의 팔에 달무리가 채워져 있고 땋은 머리를 풀자 여러 개의 밤길이 사라진다
가장 큰 날개는 가장 작은 날개를 먹을 수 없지 부엉이와 날파리는 외계 확성기는 가까운 말
거수를 하는 꽃들의 한 뼘 한밤의 풀밭에 얼굴을 터는 소녀들의 파종기 주근깨라 불리는 검은 별들
돌을 던지면 머물던 장소들이 사라진다는 귓솟말, 방심한 곳에 쪼르리고 앉아 달무리를 올려다보면 부르르 떨리는 웅덩이들, 가상의 뼈를 활짝 여는 하품
여름밤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여름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계절이고 박수는 가장 오래된 의견이다 몇몇 번지는 의견은 제외되었다
* 헤르타 뮐러
박해람 시인 /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 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形量)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 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안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낼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 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당은 천적 사이였을까 여럿이 죽고 태어나는 동안 이름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랐다. 사람의 발자국은 잡초들의 천적, 마당은 사람의 말투를 잊으려 우거졌다. 살이 부러진 소나기가 어쩡쩡하게 버려졌으며 투명을 비워낸 술병들은 파랗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짖지 않은 대문은 귀가 퇴화되었다. 왜 마당들은 이름이 없을까.
가끔 관리인이 오면 마루 밑 신발 속에선 열쇠가 생긴다. 그때 마당은 우거진 털로 사람 주위를 반갑게 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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