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민 시인 / 불가능한 슬픔 외 9편
|
여성민 시인 / 불가능한 슬픔 이것이 너의 슬픔이구나 이 딱딱한 것이 가끔 너를 안으 며 생각한다 이것은 플라스틱이다 몸의 안쪽을 열 때마다 딱딱해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플라스틱 하지만 네가 부엉이라고 말해서 나는 운다 피와 부엉이 그런 것은 불가능한 슬픔 종이와 철사 인디언보다 부드러운 것 그런 것을 떠올리면 슬픔은 가능하다 지금은 따뜻한 저녁밥을 생각한다 손으로 밥그릇을 만져보는 일은 부엉이를 더듬는 일 불가능한 감각 상처에 빨간 머큐로크롬을 바르고 너를 안으면 철사와 부엉이가 태어난다 철사로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종이에서 흰 것을 뽑아내는 투석 그러나 너를 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플라스틱이다 다른 몸을 만질 때 슬픔이 가능해지는 불가능한 플라스틱
여성민 시인 / 사과
사과처럼 나를 한 바퀴 돌아온 사람을 사랑하지 한 모금 연기처럼 입안에 과수원이 생깁니다 나는 두 손으로 연기를 씻어 먹네 사과는 입에 들어올 것처럼 손에 박힐 것처럼 사과를 먹은 날부터 사과들이 못 박혔지 신이시여 이 사과를 내게서 옮기소서 과수원을 파내소서 사실은 사과 밖에서 내가 사과에 박혀 있지 늘어져 아름답지 내 안에 못 박힌 사과와 사과에 달린 나를 생각하다 몸안으로 가라앉는 담배연기를 생각하다 사과에도 눈 쌓여야지 못 박힌 예수에게도 눈 내려야 아름답지 사실은 내 시를 읽은 사람이 있나 봐 그래서 내가 아픈가 봐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 비빔국수에 못 박을 사과를 씻다 비빔국수 속으로 걸어 들어간 시인이 있습니다 사과 눈 예수 무너지는데 눈밭 사과밭 무너지는 속을 걸어간 아름다운 날 있으니 울지 마 시는 눈깔처럼 쓸게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여성민 시인 / 백진희를 봤다 ─ 짧은 날개의 역습
운전석 뒷자리에 네가 있었어 어린 염소들이 배경화면을 뜯어 먹고 있는 버스 안이었는데 뒷모습이었어 백진희다 이름을 부를 뻔도 하였는데 단말기 앞에 네가 있었어 전망 좋은 앞자리에 있었어 미래의 아이들은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 서로를 예방하고 있었는데 너는 햇살 좋은 뒷자리에 있었어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뒷모습이 보일까 물을 뻔도 하였는데 버스가 자꾸 예쁜 다리들을 태웠어 나는 창밖을 보다가 결혼을 하다가 하였는데 면사포처럼 거리가 너덜너덜 했어 안장을 얹은 버스는 옥상으로 올라가 전망 좋은 방이 되었어 토마토도 키우고 번지 점프도 하며 버스 안에서 살아요 고민도 하였는데 버스 안에서 너는 버스 정거장처럼 앉아 있었어 내 앞에서 졸다가 변기 레버를 내리다가 하였어 내 무릎에 앉아 내 귀를 내렸어 귀를 내릴 때마다 귀를 닮은 나비들이 태어나 창밖으로 날았어 나는 눈부신 전망을 보며 눈을 부수고 있었는데 너는 한쪽 날개로 나는 나비들을 전망하고 있었어 나비들이 돌아오는 역습의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어
《문장웹진 4월호》
여성민 시인 / 나의 아름다운 개 단순한 이유로 이 집은 아름답습니다 나의 한 손은 양귀비입니다 신에게 감사를 5월에 피가 많은 사람이니까요 6월에 나를 스쳐갔다면 당신은 양귀비 밭을 지나간 것입니다 내게서 묻어 간 향기가 남아 당신이 연애도 하고 노래를 불러주고 선생님 기타에서 그리스도가 보이는군요 기타에 손을 박 듯 연애하는군요 그러니 당신도 감사를 계절은 상관없어요 몸에서 진 적 없고 스러지지 않고 당신이 유채꽃을 보기 위해 다른 도시를 배회할 때 나는 탁자에 앉아 내 손에 집중합니다 아무도 없는 집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손은 나를 홀립니다 나무에 밴 성자의 피처럼 탁자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이것으로 무엇을 하나 들킬까 봐 탁자에 양귀비를 두고 나옵니다 알아요 우리 믿음이 부족한 것 예배당에서 두 손을 모은 것 나는 그럴 수 없어요 모을 수 없어요 나의 한 손은 만화입니다 부피 없고 온도 없는 손 내밀면 친절한 당신은 따뜻한 펜 터치네 말하겠지만 선과 선 사이로 배경처럼 당신이 보이고 선을 물어다 새가 집 짓고 쓸쓸해진 당신이 내 손을 잡고 달리면 나는 머리가 길어지는 뱀 피도 없고 피부도 없는 손은 형상이 천 가지로 변하죠 기도하다 선이 엉키죠 스케치 선 하나 그리고 신은 어떤 저녁을 생각했을까 간략하고 캄캄해서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따스한 바람이 들락거리고 회전하는 총알이 지나가고 굵거나 가벼운 펜 터치로 선 안쪽에 비를 뿌려요 선이 끊겨 비는 당신에게로 내리죠 봄비에 젖어 당신이 나를 사랑하죠 그래요 나는 5월에 피 많은 사람 한 손은 양귀비입니다 그리워져서 사람들이 잠든 창문에 내가 손자국을 남깁니다 밤의 유리창 저편으로 수확의 계절이 펼쳐집니다 길고 어두운 양귀비 밭처럼 4월엔 피를 빼고 사랑을 했지 실리콘처럼 실리콘처럼 그러나 사랑합니다 새벽 미명까지 나를 세 번 부인하는 사람과의 포옹 들킬까 봐 집으로 돌아와 뱀에게 양귀비를 먹입니다 그리고 나는 봐요 피가 많아지고 다리가 많아져서 우리 집 개가 되는 나의 아름다운 뱀을 단순한 이유로 개는 과즙을 갖습니다 신에게 감사를!
여성민 시인 / 비밀 이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내 몸의 뼈가 피리였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이국적인 습관을 갖기 위해 밤에는 뜨거운 불을 삼키고 구멍마다 불이 들어오면 빛이 새어나오는 몸을 이끌어 밤의 정원으로 갑니다 정원은 기이한 소리로 가득해지고 세상에 없는 슬픈 소리를 냈다는 중국 피리에 대해 생각하죠 숲에 혼자 서 있죠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의 윤곽들이 떠올라요 얼굴은 모두 축축해요 흐르지 않고 코발트로 있어요 내 발은 허파보다 부드러워요 피리의 구멍처럼 코발트 얼굴은 늘어나고 아름답고 따뜻한 코발트를 하나씩 밟아 나는 정원을 가로지릅니다 누군가의 얼굴에 푹푹 빠졌던 발에는 향기가 남아요 달콤한 코발트 코발트에 발이 물들며 모르는 죽음에게 가요 정원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모든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내 얼굴에서 코발트가 끓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만 말해요 비밀은 이토록 보잘 것이 없고 이리 와서 피리처럼 누워요 코발트를 휘젓고 우리 함께 진실과 살인을 준비해요 ─시집 『에로틱한 찰리 』 2015 문학동네
여성민 시인 / 진술로 가득한 방 우선 기린에 관해 말해보자 너와 나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있다 어쩌면 격렬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기린은 물리학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얼마만큼의 힘이 가해져야 숟가락을 탁자에 박을 수 있을까 일단 숟가락을 탁자에 박으면 기린은 완성된다 기린은 키가 크고 긴 다리로 걸으며 창문을 들여다본다 기린이 걸으면 기린 형상의 벽돌들이 천천히 걷는 것 같다 나는 기린과 예쁘게 쌓아놓은 벽돌을 구별할 수가 없다 속을 잘 파내서 한 마리 기린으로 굴뚝과 벽난로를 만들어보자 굴뚝 끝에는 푸른 별들이 있고 우린 기린을 부숴 방을 만들 수 있어서 좋다 방에는 푸른 별과 찢긴 기린들이 가득하고 너와 나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있다 탁자와 숟가락을 랩으로 싸서 기린의 피부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그러니까 이 방에서 진공으로 압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숟가락을 들고 탁자에 앉아 있다 최후에는 기린의 자세로 일어서기 위해서
여성민 시인 / 인간의 밤
우리들의 신에게 저녁은 종이처럼 붙어 있겠지 시간 밖에 존재하니까
물에 불은 종이를 떼어내느라 애를 먹는 날 있겠지만
내 저녁은 구운 고등어 한 마리의 가죽이어서 오늘은 고등어 가죽을 올려다보며 별을 헤었다
푸른 밤하늘만 벗겨내기는 어렵다 고등어를 남김없이 먹는 이유 신은 어떤 고등어를 구워서 저녁하늘이 붉은지 우리가 어떤 시인의 가죽을 뒤적거려 밤하늘에 청색이 튀는지
시인들아 고등어처럼 죽지는 마라 신의 석쇠에서 고등어처럼 구워지지 마라 가죽을 벗어놓고 죽어라 시인의 가죽을 끌어다 덮어 밤이니
소고기 한 번 사먹지 못한 생이 그렇게 아름다웠지 고등어 가죽만 남은 하늘을 뒤적거려도
이윽고 빛이 없었던 것처럼
내가 죽으면 씻어내지 마라 푸른 가죽 그대로 신이 별 헤는 밤
-월간 『문학사상』 2023년 12월호 발표
여성민 시인 / 인간의 집
집에 상자가 가득했다 어떤 상자를 먼저 풀어야 할까 너는 말했다 상자가 천장까지 쌓여 여러 집에서 자는 잠 같다 타인에게 날아가는 버릇 때문에 인간은 누워서 잠잔다지 아름다운 잠이 쌓여 집은 슬퍼지는데 후추가 든 상자를 찾지 못 해 너는 쓸쓸해했다 괜찮아 네 눈에서 검은 것이 날아와 내 쪽으로 밤이 온다 안을 부드럽게 파내고 한 사람을 가득 채우는 이 밤은 마음일까 물질일까 마음이라면 내 마음에 빛이 부족해서 평생 쓴 마음을 모아야 후추 한 병 이불상자를 풀 수 없어서 너는 비닐을 깔았다 비닐을 덮고 사랑하면 천사인 걸 알게 돼 한쪽으로 상자를 밀고 그렇게 했는데 비닐에 싸인 인간은 천사보다 베이컨 같다 마음을 밖에 두른 존재처럼 천사의 마음인지 인간의 마음인지 모를 물질이 부스럭거려 눈감고 인간을 생각했다 수분 많고 관절이 있는 상자를 노동조합처럼 인간이 숨은 상자를 그러나 상자에는 천사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마지막 밤이었고 인간도 천사도 잊었지만 곰표 백설표 꽃소금 따위 단어들이 나의 밝은 세계로 남아있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고 아름답구나 아름다워서
사랑해 하고 맨 처음 말한 인간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해 무섭고 밝은 단어를 파내고
인간이 인간 안에 들어가 누워 부스럭거리며 첫 밤을 보낸 집은
사람이라는 후추 한 병 다 비울 때까지 눈에서 검은 것 날려 창밖에 자카란다 꽃나무와 장미와 라일락이 불타며 피어나던
인간의 집은 어디에
-월간 『현대문학』 2023년 7월호 발표
여성민 시인 / 나의 아름다운 프랑켄슈타인
시인을 빨리 말하면 신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몸에서 가볍고 부드러운 구름으로 나를 덜어냈다
세계는 어머니보다 얇아서 시집 한 권 같았다
흘러 다니며 묻은 건 수증기와 먼지 다정한 세계다 시의 세계에서는 노동도 병도 다정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집을 쌓아놓은 것보다 복잡했고
열여섯에 신을 덜은 노동자가 되었다 사랑의 노동에는 서정도 거룩함도 없어서 스물이 되기 전에 성실한 이별의 조합원이 된다
이별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을 찾아다녔는지
정치의 문장은 사랑하기 전에 끝나고 철학의 문장은 이별한 후에 시작한다 그 사이에 서른 번의 이별이 있었다 여전히 이별한다 사랑을 위해 수집한 문장과 이별을 위해 덧붙인 문장으로 나는 신학자와 물리학자와 철학자와 정치가가 되지만
신학자와 물리학자는 사랑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한다 사랑의 물질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와 물질의 이별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설명은 다르다 비는 샐러드처럼 온다고 쓴 시인과 샐러드처럼 비를 뿌리는 구름은 같다
시인은 사랑을 설명하지 못한다 신이 몸에 구름을 넣었다
백 억 개의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모양도 없고 일정한 구조 없는 프랑켄슈타인이어서 신의 사랑이여 시인의 이별이여 하다가
아름다운 프랑켄슈타인이여 하고 말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봄호 발표
여성민 시인 / 나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사랑이 끝난다 퇴근해야지, 저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
약간의 빛처럼, 이라고 쓴다 빛이 남은 곳에 앉아
빛은 어떤 노동자일까 아침에 일하러 가고 저녁에 약해지는
나의 약한 노동자여 하고 빛이 줄어든 쪽으로 돌아앉은 것이다 잘 자요 빛의 아내여 노동자의 아내에게도 담요를 흘러내린 머리카락 올려주다가 사랑을 쓸어 올리는 사람 있을 것이라고 사랑으로 약해진 사람들 이별의 수비수들 언덕에 모여 하늘이 핏빛이라면 빛이 언덕을 빨아올리는 것이라면
빛은 피의 노동자이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가는 사람 있을 것이다 캄캄한 집에 누워 부드러운 것 찾아먹는 사람 있을 것이다
힘을 빼고 턱의 힘으로만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어서 이별은 부드러운 노동
그리하여 어둠 속에서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부드러운 노동자여 하고 불러 본 것이다
피의 노동자도 되고 약간 연한 노동자도 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연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국가는 나의 부드러움을 구속할 것이다
-계간 『상상인』 2024년 봄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