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인구 시인 / 치명적이거나, 매혹적인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3. 08:00
김인구 시인 / 치명적이거나, 매혹적인

김인구 시인 / 치명적이거나, 매혹적인

 

 

당신은 내게 달콤한 아미그달린

떨쳐내도 달라붙는 도꼬마리 씨앗처럼

내 안에서 풀씨의 번식을 도모하는 진원지

 

바람을 날려 바람의 집을 만드는 거푸집처럼

들어앉아 담을 엮기도, 벽을 쌓기도 하는

성근 배열의 변주곡으로

나를 연주하지

 

당신은 때론 주렁대며 달리는 달콤함을 포기하기도 하지

짙푸른 녹색을 탈취한 태양의 푸른 음모설처럼

갈라진 대지의 폐부를 감싸지 못하는 갈증으로

내 안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의 틀 간단하게 깨부수기도 하지

쌓은 벽과 담을 한순간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는 괴력을 지니기도 하지

 

당신이 내게 던진 하얀 거짓말

하르락 하늘 모퉁이로 퍼져나갈 때

당신의 치명적인 독기에 취한 내 사랑

둥근 열매 속으로 스러지는 몸을 감추지

 

끊임없이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는 저,

욕망의 순수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믿기지 않을

당당함으로 서있는 당신은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나의 아미그달린*

 

*은행, 살구씨등에 들어 있는 독성분의 물질

 

 


 

 

김인구 시인 / 마음수련

 

 

스르륵,

발 없는 잠이 블랙홀에 빠지듯

몸을 주-욱 늘이세요

불면의 문턱을 마악 넘어오는 잠에서

꿈이 제외되도록 관절마디 마디에

토막 난 잠을 박아 넣으세요

자꾸만 일어서려는 불뚝거리는 생각의 욕망일랑

꾹꾹 접어 비트세요

삼일 간 비틀린 당신 잠의 실타래를 최대한

느슨하게 풀어내세요

생각이 생각을 먹고

시간의 고개를 넘어가다 낳은 말들일랑

모두 하얗게 게워내세요

천지간에 사라지고 말 희뿌연 한마디의 고백일지라도

접선된 암호를 믿듯 무작정 믿고 뱉어내세요

옆으로 몸을 말아요

고개는 겸손하게 처리된 부호처럼 앞가슴에 박고

마음의 질량을 최대한 늘여보아요

발 없는 잠과 꿈 없는 잠이 서로 밀납꽈배기처럼

몸을 꼬아 올라가는 잠의 나선형구조처럼

당신을 꼬아보세요

어설프게 배치된 당신 몸짓일랑은

절대 들여다보지 말고 깊은 우물 속 들여다보듯

당신 무의식의 창만 들여다보며 잠을 끌어다 덮어요

잠의 늪에 매몰된 잠으로 다시 당신을 만나요

스르륵-쉿!

당신, 잠의 문턱을 밟지는 말아요.

 

 


 

 

김인구 시인 / 경계를 잃어버린 달에 대하여

 

 

 내  몸에서 달의 기울기가 사라지더니 나는 점점 뚱뚱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 안으로 기어들어와 내 중앙의 변두리를 차지하더니 급기야 나는 뚱뚱한 발목과 뚱뚱한 허리를 가지고 기우뚱거리며 걷기 시작 했다. 달이 빠져 나간 다음 나의 가장 깊숙하고도 내밀한 그곳에서 진행된 일들은 나의 그 어디쯤에 서 있던 기울기의 경계를 잃어 버렸을 것이다. 경계를 잃어버린 나침반들이 사방 그 어딘가에 자신의 생애를 눕힐 어둑한 공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반생을 뒤척이고 다독인 노곤한 갈지자를 어딘가에 가두거나 고착시킬 비밀의 방이 필요 했을 게다. 무사히 안착된 그들의 생애가 도도하게 내 중심부에서 뿌리를 내리고 둥글게 가지의 순을 치고 내며 자리 잡은 곳. 내 중앙의 변두리에서 그들은 내게 뚱뚱한 사물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 날마다 팽창하려는 세포의 본질에 몸을 내 맡긴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조금씩 더 나를 뚱뚱하게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뚱뚱한 것을 우롱하는 온갖 매체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구겨 넣으며 이 땅의 제3의 성으로 살아남았을 게다. 내 안에서 빠져 나간 그 많은 달들의 표정들이 하늘로 올라가 푸른 달빛을 낳았다. 나는 조금씩 뚱뚱해져 가면서 내 안의 달들을 꺼내보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다. 마녀도 성녀도 없는 그 달 속에는 달의 기울기가 사라진 후 밤낮없이 희고 붉은 꽃숭어리들이 피고 졌다. 조금씩 더 뚱뚱해지는 사물들의 힘을 작품처럼 만들어 내며 오늘도 어제 보다 조금 더 뚱뚱해진 모가지로 서둘러 사라지려는 나를 지탱한다.

 

 


 

 

김인구 시인 / 불타는 집

 

 

서른 셋, 예수가 되고 싶었다

깨진 날계란의 세례를 받으며 유유히 무덤 속을

걸어 나오는 부활의 예수이고 싶었다

 

예수는 성공했고 나는 실패 했다

 

마흔 셋, 또 다른 예수를 꿈꿨다

거미줄에 걸려 나오듯 고달픈 일상의 희비가

끊이지 않고 나를 찾아와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오병이어 기적도 일으키지 못했고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지 못했으므로 밤마다

때 절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울어야 했다

 

예수를 제대로 보기는 한걸까

물음표에 십자가를 매달고 생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슴을 쥐어뜯으며 물어도 끝내

십자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네온사인이 사방에 주파수를 맞추어도 끝내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다시 예수를 꿈꾼다

한 끼의 저녁식사를 반납하며 다시 올

나 닮은 예수의 재림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 주기도문 한 줄 외운다

 

나의 나를 지키게 하소서,

나의 나로 살게 하소서

 

 


 

 

김인구 시인 / 숲속의 진언

 

 

어느새 숲이 넓어졌어요

살금살금 숲속으로 기어들어 온 시월이

건초더미처럼 야위고 있어요

낮은 나무 위로, 높은 나무 아래로 웅크리고 앉아

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시월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숲 속으로 천천히

가을이 태어나고 있어요

아시나요?

숲 속 나무들은 하지 이후로는 자기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대요

그냥 그대로 마르고 말라 나무를 떠나간대요

숲속의 법칙엔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는 법

숲속에선 꽃보다 아름다운 뿌리의 힘으로

좌절조차 금지되는 것을 아시나요?

숲이 깊어졌어요

슬그머니 숲 속으로 기어들어 온 어둠 안에

동그랗게 눈 뜬 시월

가을이, 숲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생애에

화들짝 놀라고 있어요

 

 


 

 

김인구 시인 / 하찮은 변명

 

 

서른세 살

죽음을 선물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널브러진 몸을 적당히 구부려 넣은 마음에

쓰다 만 자서전 같은 휜 대못을 박고

아이 하나 낳아보지 않은 몸을 오각형

꽃잎 속에 말아 넣으며 벌레 먹은 푸른 잎사귀

그 구멍 너머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시기와 증오로 가득한 악의 화살을 품은

족속들이 부르는 화음 따위는 던져버려!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만 부르기에도 모자라는 백년

어차피 목 놓아 부를 수 없는 노래라면

 

서른세 살이란 나이는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는 어리숙한 나이

모든 걸 받아들이지 않기에는 너무 명랑한 나이

모든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만의 화석을 문지르며

사라져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아무도 모르게 한 마리 애벌레처럼 세상 모퉁이 기어다니다

뒤집혀진 딱정벌레 발버둥처럼 나뭇잎에 몸을 맡기는

파리한 생애가 남기는 유언 따라가 보고 싶지만

아직 내 나이는 서른세 살에 다다르지 않아

기억도, 추억도 한없이 짧기만 한 나쁜 밤.

 

 


 

 

김인구 시인 / 허공 법문*

 

 

시든 꽃 묶어버리고

 

각을 지닌 유리꽃병을 비운다

 

빈병 가득 허공 한 자락 들어와 앉는다

 

꽃병의 모양을 따라 나투는

 

허공의 허공

 

끝도 없는 그 무극의 어느 선상에서

 

허공은 태어나셨는가

 

금이 간 유리 꽃병

 

허공 가득 내가 들어 앉는다

 

*백봉 김기추거사 법어집 제목에서 빌어옴

 

 


 

김인구 시인

전북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의식》> 여름호에 <비, 여자> 외 2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시작. 시집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신림동 연가』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