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수진 시인(아산) / 팔려가는 개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3. 08:00
이수진 시인(아산) / 팔려가는 개

이수진 시인(아산) / 팔려가는 개

 

 

저 눈동자의 그늘은

아침빛에 더욱 잘 들킨다

 

움직이면 조여드는 목줄이 불안마저 움켜쥐고

비어져 나온 조바심 속절없이 다리에 달라붙는다

 

저렇게 막연히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이라면

그 길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서성이는 게 일이라면

그 저린 다리로 어딜 그리 쏘다녔던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고 옆으로 밀렸다 끝내 일어서길

반복하면서, 어둡고 좁은 지하차도 지나

 

모란장 가는 화살표 속으로 사라진 창살 속 개

 

어느 날 내가 시장 골목에서 한 접시 수육을 먹는다면

 

난 저 개들의 살점이 아닌

컴컴한 공포를 물어뜯는 것일 게다

 

 


 

 

이수진 시인(아산) / 끈

 

 

새가 떠난 나뭇가지에는

새가 떠난 자리가 남고

 

새의 노래가 사라진 나뭇가지에는

새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나무 그늘에서

그 노래의 음조로 이태째 걷는다

 

그럼 그 음조는

여기 이곳의 삶을 살고 있다 해도 될까

 

오늘이 왜 여기 살다 어제가 되는지

오늘이 어떻게 여기 살다 내일이 되는지

 

오늘이 오늘이어서 슬픈

이 끈

놓고도 놓을 줄 몰라

 

우리는 숨이 차오르는 걷기를 자주 한다

어딘가에 당도해서 먼 곳을 바라보면

 

도착지를 알 수 없는 열차가 조그마해지고 있다

 

 


 

 

이수진 시인(아산) /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장지에서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꽃잎을 하나씩 따내고 있었다

우리가 떨어뜨린

눈알 사탕에

개미들 몰려드는 줄도 몰랐다

게임이 끝물로 향해가고 있을 즈음

먼 친척 형이

이놈의 개미 새끼, 하면서

오른발로 개미족을 짓이겼다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지구 끝의 비명이 가볍게 덮였다

우리는 그때

죽음을 열망하며

마지막 꽃잎 잃을 이마에

딱밤 새길 생각으로

웃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에서

 

 


 

 

이수진 시인(아산) / 슬픔은 깨어나는 법

 

 

해야 할 이별이 있을 땐

꽃을 무덤처럼 사는 버릇이 내겐 있다

 

압축된 문장처럼

슬픔을 허용하여 슬픔을 건너가는 방법으로,

 

어느 해 여름

데이지 꽃을 사들고 오후의 고개를 떨궜을 때

 

이제 좀 괜찮은 거니, 어느 목소리에 막혔던 울음이 쏟아진 일은

괜찮아서 그런 건지 괜찮아야 해서 그런 건지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슬픔은 자꾸 깨어나는 법

 

소설 속 혼자 밥 먹는 사람처럼

느닷없는 깨어나고 잠드는 날이 미래가 될 때

화병의 물을 갈아준 적이 있다

 

꽃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치면

꽃잎마다에 하늘이 내려앉고 바람이 내려앉고 빗물이 내려앉은

얼룩에도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 걸음을

앞으로 옮기려면

보려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한 시절의 희미한 문장으로

꽃에 가 닿으면

아득이란 말을 풀어내고 아뜩해지던 시간들이 풀려나올 것 같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이수진 시인(아산) / 연신내

 

 

온다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터너스 잎맥을 닮은

푸른 생활로

 

누군가의 영혼이 삶이 되러 오는 일은

어떤 마음인 걸까

 

온다는 것은 무엇일까

 

국화의 소란 속에

번지는 분주함으로

 

누군가의 시간이 가슴이 되러 오는 일은

어떤 마음인걸까

 

아련으로 끌림으로 견딤으로 미움으로

 

물들고

삭이다

 

시나브로 눈물이 익어가는 동안

 

어느 날의

정으로

 

어느 날의

덧정으로

 

누군가의 전생에 사슬처럼 묶여도 좋을 생살

식고 상하고 닳고 파이면서 텅 비어가는 마음

 

어디서 빌려 와 어디로 돌려주는 약속일까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에서

 

 


 

 

이수진 시인(아산) / 죽음을 사는 일

 

 

줄곧 길을 잃거나 워낙 멀고 낯선 고장에 와 있어

그의 앞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드는 시간들

- 카프카 『성』에서

 

 

꽃을 들고 붉은 돌담을 지나면서

장미의 꽃잎을 혀라고 부르기로 한다

 

바람이 불자

장미꽃 한 잎의 혀 쏙 빠진다

 

다시 바람이 불자

장미꽃 수만 잎의 혀 쑥쑥 빠진다

 

장미는 어떻게 자기를 지워 자기를 사는가

 

혀, 안에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바깥을 넘어서

있는 것 같다

 

여름 그 해

땀구멍

송송

막혀

제 혀, 깨물고 싶었을 때

 

삶은 알고 장미는 모르는 어떤 소용돌이

장미는 모르고 삶도 모르는 어떤 소용돌이

 

장미는 어떻게 자기를 걸어 자기에게 이르는가

 

혀, 바깥에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안을 타 넘지

못하는 것 같다

 

바람이 허공을 도려내면

장미, 푸른 천공의 붉은 밑바닥이 된다

 

장미는 어떻게 그리 많은 이야기가 되어 아무 말 없는

말이 되는가

 

혀, 해야 할 말보다 앞에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한 발 뒤에 서 있는 것 같다

 

검은 계절이 휴식에 봉해져도

장미는 어떻게 홀로 스스로 자기를, 흰 재 속에서

불꽃으로 솟아나게 하는가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에서

 

 


 

 

이수진 시인(아산) / 해나

 

 

해나와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는 소설가 박솔뫼가

나보다 더 잘 안다

 

이 도시가 세워질 무렵

밖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을지 아닐지 그건 나도 모른다

 

그녀와 가까운 해나는 해를 썬이라 부른다

해나라는 이름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식은 하늘에서 무얼 찾고 싶었는지

그건 나도 모른다

 

그녀는 해나를 그냥 해나라 부른다

그녀가 해나라 불렀기에 한 번도 본 적없는 해나가

나에게도 해나가 된다

그녀와 해나를 따라가면서 나도 해나의 이야기가 내 귀에 잘 돌아오도록

그녀가 되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는 해나가 살고

박솔뫼의 ‘나’가 산다

나는 가끔 해나가 들려주는 귓속의 말과 ‘나’의 입속에서 맴도는 말들이

내가 오래 등 뒤에 내려놓고 있는 이야기라서 살짝 놀란다

 

언젠간 해나가 나를 부르든지

‘나’가 나를 부르든지 할 것 같아 눈을 감기도 한다

 

어둠 하나하나를 건너 낙인찍힌 별을 본 듯도 아닌 듯도 하다

 

그럼 무얼 부르지*

 

버클리 대학 근처 테이블 넓은 카페에는

30년 전 5월에 붉은 밑줄을 긋는 해나가 있고 그것을

읽는 내가 있다

 

밑줄 안엔 massacre가 있고 밑줄 밖엔 학살하다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 사는 해나는 ‘나’와 이메일주소를 나눈 사이다

나는 해나와 ‘나’에 대해 알 듯 모를 듯 하나 이미 그들의 이야기에 연루된 사이다

 

*그럼 무얼 부르지- 박솔뫼

 

 


 

 

이수진 시인(아산) / 더 자랄 수 있는 시간에 대한 환상

 

 

* 닫힌 이 층 창문

* 흰 블라우스 입은 처녀

* 처녀 어깨 위에 손을 얹은 남자

 

남자는 여자의 어깨 위에 손을 걸친 채 죽어간다

사실은 남자의 손은 이미 죽어 있다

여자 좁은 어깨의 새벽이 죽어 있듯

남자의 손이 여자에게 얹는 그 순간도 죽어 있다

창으로 통과하는 생각도 죽어 있다

바깥 정원으로 흐르는 시선이 죽어 있듯

의자가 죽어 있다

커튼이 죽어 있다

장미의 소용돌이가 죽어 있듯

죽음이 오래 살아 있다

 

* 죽음은 키를 높여 바깥으로 향하려는 성향이 있다

* 어떤 스토리는 히스토리, 히스토리가 되어 살아나려는 성향이 있다

 

이중으로 닫힌 문, 이 층 창문

팔꿈치를 걷어 올린 흰 블라우스 입은 처녀

 

* 죽음은 벌써와 아직 사이로 내민 오해이다

 

 


 

이수진 시인(아산)

충남 아산 출생. (본명 이영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문예창작학 박사. 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웹진 『시인광장』 편집 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