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산 시인 / 문득 외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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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산 시인 / 문득
청소기의 소음에서 따르릉 따르릉 쏟아지는 수돗물에서 딩동 딩동 스위치를 끄면 침묵뿐인데 누가 자꾸 나를 부르나 생각에 잠긴 빛살 좋은 오후 처음과 끝이 만나고 있다 소음이 고요로 고요가 소음으로 언젠가 쏟아낸 나의 눈물인가 수없이 발설한 너의 이름인가 빛으로 소리로 몸을 바꿔 돌아왔나 토막난 생선을 씻을 때 피가, 내장이, 비늘이 분리될 때 물소리에 집중하는 생선의 눈알, 파도를 가르던 몸과 분리된 몸 사이에 남겨진 생각들, 이 눈알에 갇혀 나는 오래전 어떤 행위를 기억해낸다 그 곳에 두고 온 내 영상, 파도에 새긴 이름과 발자국 그리고 지금 안부가 되어 흐르는 이 물의 감촉과 파도무늬 선명한 몸의 감기지 않는 눈동자 초인종을 누르고 숨어서 지켜보는 아이의 몸속에 차오르는 초조, 같은 멀쩡한 대낮이다
이미산 시인 / 요코하마 메리
요코하마 길모퉁이 한줌 공간에 앉은 기다림 주름살 속 협곡엔 그녀와 그녀의 남자가 다정히 걷고 하얀 분 다시 덧칠하면 그의 속삭임 생생해 하얀 드레스 하얀 구두 빨간 입술로 피워내는 꽃송이 남아있는 날들이 그녀가 앉은 가방 속으로 흘러들어 한 끼를 때우고 한뎃잠을 자고 달콤한 공상에 빠지는 동안 어디선가 전쟁을 수행 중인 그가 무덤 같은 그녀 속으로 걸어오고 있다
-계간 『애지』 2025년 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베란다
우리가 된 이후 베란다가 생겨났다 두 개의 의자를 겹쳐 놓고 무릎 위에 구름을 앉히고 나는 나를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을 생각한다 배고픈 베란다 우리가 심은 꽃들, 심장으로 피운 꽃은 실제보다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목록, 곁눈질까지 기록되는 꽃들의 거짓말 어우러져서 꽃이 되는 노래와 저마다의 향기가 꽃이라는 소리가 예의를 다해 우리를 채울 때 구름은 침묵한다 성당 종소리는 침묵을 버무려 소나기를 불러낸다 처음을 기억하는 소나기ⵈⵈ 보글보글 물방울과 빨라지는 걸음과 상상으로 부푸는 각자의 베란다 우리는 한 번 더 구름놀이를 한다 외롭다는 말 대신 처음처럼 웃는다 혼자 서 있기에 아름다운 베란다 서로를 수정하기에 충분한 장소
계간 『모든시』 2020년 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카페 아마도
밖을 내다보는 그 안을 바라보는 나 우리는 노을이 타는 유리창에서 만난다
이곳의 나비는 날개가 젖었다 시끄러운 거리는 나비의 언어가 아니어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오래 중얼거리면 사철 꽃피는 섬에 닿는다 붉은 웃음소리 춤추는 나무들 우리는 꽃잎 속에서 잠이 들고
밤새 젖은 날개 말리느라 단잠에 빠진 신의 잠꼬대에 놀란 암막커튼의 숨겨진 빛이 흘러나와 새하얀 시폰커튼으로 변신한다 불확실은 매혹의 유전자 안개는 가능성의 입자들 슬픔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옛날이야기 날개가 한 뼘쯤 자라 거리엔 쏟아지는 빛 그는 여전히 밖을 내다보고 나는 칭얼거리는 다짐을 안고 횡단보도로 향한다
계간 『예술가』 2023년 여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묵음의 티비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풀어헤쳤다 실패한 연애와 소화되지 않은 슬픔 후식으로 쩝쩝거리며 밤의 대문을 열어놓고 어둠이 반짝이도록 닦아주었다 잘생긴 사람이 착한 것 같아 예쁜 꽃처럼 잘 사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을까 늘 기분 좋은 향기처럼 두 개의 깃발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때 변함없을 외모와 부가될 능력이 미래의 등불처럼 깜빡거렸고 매듭 둘 매듭 셋
마모되는 청춘이 한 방의 행운을 찾아 헤매다 사각지대에서 길을 잃을 때
급조된 꽃이 할퀴듯 쓰다듬는 몇 개의 그림자로 다녀갔다 쓸쓸할 소蕭쓸쓸할 소脩쓸쓸할 소萧 쓸쓸할 소䔥……
나란히 앉아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를 흥얼거릴 때 스스로 풀린 매듭이 먼 곳의 그리움에 닿아있었다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 제목
계간 『예술가』 2023년 여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빗금의 자세
우리가 잡았던 손을 놓을 때 함께한 시간은 빗금으로 새겨졌지 그때 당신이 돌아보았다면 내 젖은 눈빛 거두어 갔다면 우리의 기울기는 회복되었을지도 사소한 무게가 결정하는 관계의 자세 후회는 새벽을 갉아 노을로 펼쳐지고 어둠을 뒤척여 다시 새벽을 키우지 개나리꽃 피어 환해진 세상 벚꽃들의 수다는 다정하고 쓸쓸해 서로의 그림자에 기댄 엉거주춤 멈춘 시계 위로 빙빙 도는 바람 -계간 『예술가』 2024년 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샹들리에
주먹을 움켜쥐고 태어난 갓난아기 잎사귀처럼 펼친 손가락 눈동자 방글방글 콧구멍 발랑발랑 입술 오물오물 환영사는 오구오구 동시에 켜진 꽃숭어리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때 주먹은 허공에 심은 씨앗 겨울과 또 겨울 후에 피어날 꽃송이 저녁이면 집으로 가는 우리 하하 호호 웃음의 샹들리에 속으로 자꾸 쓰다듬으면 돌멩이도 웃는다, 이때 손바닥은 한 땀씩 쌓아 올린 에피소드, 때로는 왼손을 쓰라는 엄마의 간청, 허공으로 잽을 날리는 변두리의 자세 실컷 울다 다시 움켜쥔 다섯 개의 손가락 삭망월 별처럼 반짝거려 거꾸로 서기 위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고드름이 참아온 눈물로 그리는 새 이정표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잠자는 주먹 환하게 피어날 날개의 꽃 -계간 『애지』 2024년 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여름 끝에 찾아온 ……) 봄* 나는 늦게 깨어난 애벌레 들키기 쉬운 쪽으로 숨어든 어리둥절 맨살에 들러붙은 친절이 지글지글 끓는다 여름의 송곳니가 탈피를 재촉한다 생살을 찢고 나온 봉오리가 생경해 나무는 불면에 뒤척이고 한낮이 쏟아내는 붉은 소문 반가운 사람이 온다는 소식 같아 묵힌 권태를 한 겹씩 벗겨낼 때 내 화사함에 놀라 화들짝 웅크리는 꼴람을 그리는 마음으로 문간을 서성일 때 여기요 환청은 천천히 내려앉았고 사방은 분홍빛이었다
* 조근현 감독의 영화 <봄>에서 빌림. -계간 『시인하우스』 2024년 창간호 발표
이미산 시인 / 저물녘
노을이 안간힘으로 풀어지고 있다 노을을 환송하는 지붕의 모서리가 풀어지고 있다 나무의 곧은 가지가 풀어지고 있다 시계추 같은 농부의 두 팔, 흔들리며 가늘어지는 두 다리가 풀어지고 있다 잠들기 위해 새들의 지저귐이 풀어지고 있다 악착으로 따라붙는 그림자 날숨의 덩어리 뒷모습의 시작 지워지며 드러나는 빛의 안과 밖 오늘이라는 불꽃 시간의 발전기가 천천히 돌아눕고 있다
이미산 시인 / 심야버스를 탔다
어두운 차창에 비친 잠든 얼굴들 흑백의 소리 입안에 잔뜩 물고 꿈꾸는 신생아처럼
어디 보자 우리 아가
내 얼굴 함부로 핥으며 나를 아가라 부르는 푸르스름한 파충류의 입술을 열고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길쭉한 어둠의 애무는 한정없이 이어지고 모르는 엄마의 친절은 징그럽지만 말랑말랑하고
모르는 아기 옆에 두고 수다 떠는 엄마들 오래된 골목처럼 구부러진 혀들 금세 익숙해지고
내 잠이 기울어질 때 잽싸게 달려와 반듯하게 자라야지 인기척 없이도 갸웃거리며 어디 보자 우리 아가 이마에 서늘한 침 듬뿍 발라주고
버스는 끈질기게 먼 곳의 엄마 찾아 달리는데 차창에 매달린 수많은 혀의 엄마들
하나의 잠에 서너 명의 엄마들 달라붙네 브레이크에 놀란 내 잠 받으러 혀를 넝쿨처럼 뻗어 올리네 공중에 검은 꽃이 활짝 피었다 지네
얼마나 오래된 엄마들인지 무덤도 없이 떠도는 껍질들인지 아가아가우리아가 온종일 핥던 기억으로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에서 산골 오지에서 숨차게 달려온 혀뿐인 엄마들
가벼운 흔들림에도 온몸 알람이 되는 바퀴 소리 반죽해 다 큰 아기에게 풍성한 젖 물리는
느리게 흐르는 무성영화처럼 어떤 혀는 이내 사그라지고 어떤 혀는 잠 끝까지 따라오고
이미산 시인 / 초록의 숨소리는 똑딱똑딱
모르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걸었네 다정한 숲길
손에도 계절이 있어 내 손은 여름을 좋아하네 초록을 통과하여 정점으로 진입하는 사람의 세계
우리가 동시에 손을 내밀어 여름의 숲으로 초대될 때 하나의 몸으로 이어지는 사랑이라는 감각
그때 초록의 숨소리는 똑·딱·똑·딱·
나는 눈을 감고 별의 눈물을 훔치네 눈물로 비를 만들어 손가락을 적시네 이 여름이 시들지 않도록
당신 발자국으로 만든 초록 목걸이는 내 지문이 되고 내일이 되고 달콤한 기다림이 되어 꿈 밖으로 나오면 문득 허전해 누가 내 손 좀 잡아줘
어느 날 손바닥이 간지럽다면 다시 우리의 여름이 시작된 것 꿈 밖으로 추방되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시인정신 2023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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