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지우 시인 / 내일의 반경 외 9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4. 08:00
정지우 시인 / 내일의 반경

정지우 시인 / 내일의 반경

 

 

퇴화 목록을 살펴보면

가장 빈번한 곳은 반경입니다

밤과 낮의 길이에 따라

별들은 농경지를 슬쩍 옮겨 놓고

초침과 분침처럼 잡초와 식량을 구별합니다

동지를 지나는 계단과 빙판

짧아진 동선은 앞집을 옆집에 묶어 둡니다

집 앞에 그림자를 가두는 골목은 좁아진 걸까요

가시거리가 짧아진 걸까요

꽃병을 보고 있으면 병(病) 안에 갇히는 기분

꽃은 사라지고 자주 마실 오는 앞집 늙음에게

병에 물을 갈아 주듯 반경을 갈아 줘야 할까요

 

발걸음보다 저녁이 먼저 도착하는

활동 반경은 행동반경을 조절합니다

곧 매화가 핀다고 개구리가 튀어나온다고

옆집 목련이 담 너머로

헐렁한 옆구리를 긁적입니다

 

소녀를 보고 있으면 소녀가 된 것 같다던 눈빛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건 늙은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손톱 밑에서 관절에서 주름 속에서

하지를 지나는 나무를 보다가 서로를 돌면서

서로를 돌아 나옵니다

먼 곳 끌어당긴 근처에서 꽃이 핍니다

 

-시집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2018. 민음사

 

 


 

 

정지우 시인 / 가지지구에서 온 메일

 

 

 불 켜진 창문을 세어보듯 어둑어둑한 서신을 읽는다.

 

 떨어진 포탄 속에서 무너진 건물 속에서 죽은 엄마의 품속에서 어린 난민들은 울먹이는 문장이다.

 

 위로가 모른 척하면

 슬픔은 어느 쪽을 바라봐야 할까.

 

 창밖에 함박눈이 내리면 두 눈에 쌓이는 적설량.

 

 녹아 사라진 눈과 코와 팔이 가자지구 장벽을 넘어 내게 도착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보이지 않는 우리를 찾아달라는 당부들

 

 안으로 더 잘 보이도록 숨는다. 그게 전 세계에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굴려온 눈덩이가 점점 사라지면서 사라지기 직전을 증명하는 최후의 발견이니까.

 

 입안에 모은 말들은 소실점과 같아서 멀리 퍼져나갈수록 사라지고.

 

 전쟁은 몇 사람의 말로 셀 수 없는 사람의 울음을 듣는 일. 고통을 속이고 죽음을 속이고, 속이는 일로 들키는 날카로운 초승달.

 

 눈보라의 긴 비명을 읽는다.

 그 속에서 눈사람이 태어나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정지우 시인 / 개기월식

수박의 보폭으로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약병 뚜껑을 돌리다가

금이 간 숨,

그 사람은 어쩌다가

약통 안에 갇히게 되었을까

매일 복용한 알약의 효과는

매일매일 사라지는 것의 일부

지병은 약통 속에 갇힐 수도 있겠지

마술 램프에 갇힌 거인의 출구처럼

조금씩 어둠을 먹어 치우며 부푸는 달을 본다

어제 본 공터는 요란한 망치 소리로

그 이전의 형태를 지우며 갇히고,

새로 생긴 창문이 탁, 하고 닫히면

아무도 빠져나오지 않은 풍경이 되듯

달은 왼쪽으로 익고

그 사람은 왼쪽을 다 써버려서

이미 모든 시간을 다 써버린 탓에

익지 않은 오른쪽을 기웃거렸겠지

조금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저 수박의 마지막 본심

약병 안에서

넝쿨 잘린 달 하나가 달그락거린다

​​

-웹진 『님Nim』 2024년 8월호 발표

 


 

 

정지우 시인 / 그라운드 모빌

 

 

​ 커지는 동공 속에서 수축하는 천체를 발견한 것처럼 미세한 움직임을 따라 생겨나는 징후들처럼 동작 속에서 부재를 발견하게 하는 날씨야

 

 소도시의 어긋난 측백나무가 도려낸 정지된 학교 운동장 철봉 자장가의 첫 소절 오래된 마을의 웃음소리

 

 즐거움이 줄어들고 있는 몸짓

 

 얼굴 가득한 축구공이 굴러온다 여럿은 공간을 대체할 수 있고 다음날을 기약할 수 있어서 좋아 나눌 수 있는 기분을 나눌 수 없을 때까지 나누던 동아리였지

 

 하지만 5명이 부족해서 더 이상 축구팀을 할 수 없다는 것

 연대할 수 없는 건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

 

 부족하다는 건 너무 치명적인 만약의 수인지도 모를 테니까 이를테면 기아와 전쟁과 전염병과 구조의 막강한 팀

 

 수비와 공격의 팀플레이 팀풀 파이팅...

 함께여서 지켜낸 역사가 고비를 넘기고 있는 위기의 순간이야

 

 바람으로도 채울 수 없는 몸짓

 울음을 머금은 공이 공의 울음을 꺼내고 있다 말머리성운에서 들려오는 태곳적 먼 훗날의 종소리로 3교시가 시작된 거야

 

 호흡이 재생되는 운동장에서 사라진 흔적을 모아 나란히 세워둔 모빌을 깨워 줘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2월호 발표

 

 


 

 

정지우 시인 / 날아가는 접시들

 

 

어제의 가설은 허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낮과 밤은

모두 어제의 흔적입니다

어둠의 그림자는

촘촘한 별빛들로 밝혀졌습니다

접시는 어떤 방법으로 달아날까요

세제의 틈을 엿보다가

사람의 손을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날카로운 비명이 있겠습니까

와장창 날아가는 접시들

파국이라는 변태 과정을 거칩니다

변한다는 의미에서 애벌레의 종류라고 해도 될까요

맨 처음 접시는 흙이었고

다음은 불이었고

그 사이사이 기술의 외피를 벗고 나옵니다

어떤 장인은 자신을 밀어 넣기도 했으니까요

소리는 무중력으로 퍼져서

입 모양으로 사라집니다

엉킨 관계에서 단추와 지퍼를 열고

존재했던 살과 뼈를 유추해 봅니다

집의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고

허물은 사람의 질감처럼

입을 통해서 형태를 바꿔가며 옮겨갑니다

 

지금도 세워지는 가설 안에는

실과 허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거꾸로 박힌 시간이 나를 흘러갑니다

 

-월간 『모던포엠』 10월호 발표

 

 


 

 

정지우 시인 / 말코, 버즘, 고래

 

 

온갖 안색을 뒤지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각별합니다.

모양이 모양 속으로 들어갈 때

어떤 형태는 둘이 되기도 하지요.

말코손바닥사슴을 탐색하는 일이란

버즘나무에 흰 새를 접붙여서 날려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이 들수록 죽은 아버지와 닮아간다는 말,

죽어서도 생김새는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가 봅니다.

여러 모양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끝이고,

대칭을 이루는 다른 세계의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습니다

.

바다에서 민물로 돌아온 고래의 위기는 인간의 다른 모양일 수 있답니다.

변색하는 피부는 부피의 표면이면서 내면이고 흘러넘칠 수 있는 위험일 수 있겠습니다.

모든 형태는 굴욕의 완성태입니다.

끝없이 패배하고 일어선 굴절들

저기, 돌을 깨보면

굴복의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상흔을 발견합니다.

너, 정말 몰라보겠다는 말

알 수 없는 무늬가 속속들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겠지요.

더 늙기 전에 보자는 말을 뒤로 한 채

더 멀리 달아난 시간의 얼굴이겠습니다.

우리가 거절할 수 있는 일과 수긍할 수 있는 일들의 간극엔

아주 사소한 마음이 판형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계간 『문예바다』 2024년 가을호 발표

 

 


 

 

정지우 시인 / 문서의 후예

 

 

 옷고름을 여미는 숨

 매듭은 실패와 청산을 묘혈에 묻고 시작하는 일이다

 붉은 인장은 입김이 피어올린 구절

 찢거나 불태워버릴 수 없는

 문서의 후예인 사람

 살아내야만 하는 초지를 몸에서 펼쳤다

 

 지문을 헛돌 듯 안개에 휩싸인 옆구리에서 구릉과 골짜기의 탐욕과 엇갈린 진술이 생겨났다 담장은 요원한 높이, 등에 심은 나무에 스스로 오를 수 없으니 관습을 만들어 되돌아보게 했다 땅을 낳자마자 나눠가진 탓에 불어난 젖을 우기라 불렀다

 

 평지와 강을 두고 어긋난 팔과 다리

 지경을 넓히는 것보다 지켜야 한다

 훤칠한 명지를 얻고 싶다면

 사람의 맹지盲地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착란과 화색은 논과 밭에서 일궈낸다

 

 폭력의 문장은 심는 대로 거둔 결과, 쑥쑥 낳던 교만한 잡초는 충혈 된 눈에서 재배했다 지혜의 약풀로 머리가 맑아지듯 서명은 수혈하는 일과 같다 재가 된 심장으로 읽는 피의 문서, 육체에서 돋아난 율척(律尺)의 줄기들

 

 죽었던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고 불가능한 손이 바닥을 뒤집으면 문턱을 넘는 양식, 살길 잘했다는 그 곳은 광활한 몸

 

 얼굴에서 발견한 마침표에 시작처럼 인장이 찍혀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난 척추에서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정지우 시인 / 향신료 상인

 

 

 최초의 흥정은 눈빛이었을 것

 보자기를 씌운 손으로 셈하는 수는 나귀로 둔갑하기도 한다.

 

 말은 손을 옮겨 다니며 먼 곳을 지향하지만

 모든 손짓엔 한 곳으로의 정착이 숨어있다.

 

 골목에 들어선 상호(商號)의 시작은 그러했을 것이다.

 

 마른 고요로 피운 향은 두통을 지그시 눌러 놓고 흰 연기는 구불구불 빠져나간다는 상술의 첫머리. 창문에 펼쳐진 사막과 낙타의 짐. 상인은 터번에 빨강과 노랑을 웃음에 묻혀 덤으로 팔고 있다.

 

 향기를 진열하는 갖가지 궁리들, 먼지로 날아가는 새는 없다지만 새로 날아드는 바람 속에서 상인은 손가락 사이로 가루를 걸러낸다. 제체기로 튀어나온 그린페퍼는 가려운 허공의 말.

 

 폭염을 쓰다듬어 줄 시원한 냄새가 있나요. 비둘기의 죽음을 덮을 수 있는 향신료가 있나요.소량으로 날개보다 넓은 공간을 날아갈 수 있나요.

 아랍인 손맛은 입자가 고운 식물의 울음

 뿔과 이빨을 갈아 마시면 낫는 울음

 

 꽃잎과 감정을 주조하면 말이 필요 없는 세계가 들어 있겠지. 부글부글 손가락만 들어있는 몸짓. 향을 나누면 요란한 소리도 구슬처럼 굴러가는 상점으로

 

 오직 눈빛으로만 거래하는 상인은 골목을 끌고 태양의 뒤쪽에서 노을을 뿌리고 있다.

 

 


 

 

정지우 시인 / 우리는 날아가는 검은 우산을 기억해낸다

어떡해,

 

죽음 이후는 죽음 이전을 생각하게 하는 걸까?

갑작스러워서 너무 안타까운 부고장 속으로 비가 내린다

 

머그잔을 만지면 빗물을 떨어뜨리는 너머에 골목이 골목을 돌며 벗어나지 못한다 질문 하나가 수문을 여는 하늘,

검은 이끼처럼 먹구름이 창문을 덮어온다

 

접힌 형태로 새가 날아간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둥지와 자녀들 시집 출간에 대해 얘기했지만 테이블과 바닥에 울음이 흘러넘치므로, 우리는 부족해진다

 

출판을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 유고시집

생존하는 시들은 회생할 가능성이 있을까?

 

이 세 사람은, 세 사람으로는 충분치 않는,

한 사람을 흘려보낸다

 

수심은 헤아릴 수 없어 쌓이는 물방울 무덤이겠다

시의 영혼에게 육체를 입히는 구름 수의

흠뻑 비를 맞은 시들이 자신을 장사지내고 돌아오는 집, 시집을 묻는다

 

묻다가 대답이 될 때까지 묻는다

마른 우산은 빗소리를 가두고 점차 퍼져나가는 구절,

밀고 들어오는 문과 열고 나가는 문으로 웅덩이가 생기고

 

우리는 저 멀리 날아가는 검은 우산을 기억해낸다

-시사사 2022년 가을호 발표

 


 

 

정지우 시인 / 전망

 

 

 휘감긴 장면을 끝없는 경관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남아 있는 날들이라고도 했다. 밤새 달려와 마주한 비경엔 스쳐간 감정이 분절되어 있다. 어루만지지 못한 순간들. 멀리 던져버린 더 먼 곳. 어디까지 가능성이고 어디까지 멈춰야할 아득함인지, 자세를 바꾸어도 협곡은 불투명한 돌멩이를 던진다. 새벽을 뚫고 터져 나온 탄성은 밀봉해온 정적의 것. 지난날의 예견도 마음의 잔상이 만들어낸 일렁임들. 몇 겹의 풍경에서 돌려받은 과거와 미래를 구분했다.

 푸른 별밤이 가득한 테라스와 호수는 소환된 시야라고 했다. 슬프도록 아름답다, 라고 환호하는 부드러움이 온갖 종류의 여백을 단숨에 지워버린다고 했다. 폐점과 냉기와 병실과 난간과 광휘마저도... 이것은 빈번하다. 그것을 희구한다. 저것을 동반한다. 어떤 것은 정치적이다. 하얀 눈이 폐허와 지저분한 거리를 깨끗이 덮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기에 전망 좋은 곳을 찾아 주말마다 떠나는 행렬이 행선지를 압도한다고 했다. 누구나 관람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암각화처럼 빗금들을 모은다.

 허공위에 허공을 쌓고 올라갔다. 오래된 응시가 뭉쳐 있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3월호 발표

 

 


 

정지우(鄭誌友) 시인

1970년 전남 구례 출생.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낯선' 동인으로 활동 중.